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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9월의 6‧25전쟁영웅, 공해동 육군 하사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가 ‘공해동 육군 하사’를 2019년 9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처에 따르면, 공해동 육군 하사(1931.11.22.~1952.09.13.)는 1931년 경상북도 달성군 출생으로 전쟁기간 중 육군에 입대하여 수도사단 기관총사수로 수도고지 전투에 참전했다. 이 전투에서 기관총 사격으로 적의 공격을 지연시키고 고지를 사수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1952년 9월 6일 중공군에게 고지를 빼앗긴 수도사단은 제26연대가 6차례의 탈환전을 전개하였으나 모두 실패하고, 임무를 교대한 제1연대가 9월 9일에 고지를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제1연대는 수차례에 걸친 적의 공격을 물리치면서 고지를 끝까지 사수하였는데, 특히 제1연대에 배속된 제21수색중대 기관총사수 공해동 하사의 활약이 있었다. 1952년 9월 13일 새벽 1시 15분에 한 발의 녹색 불빛과 함께 적의 출현이 급보되었다. 적은 다섯 개의 접근로를 따라 각각 중대규모의 부대로 공격해 오며 맹렬히 공격을 퍼부었다. 공해동 하사는 우박처럼 쏟아지는 실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불굴의 투지로 기관총을 발사했다. 이 과정에서 여러 발의 적 탄환을 어깨에 맞았음에도 죽음의 마지막 순간까지 방아쇠를 놓지 않았다. 공해동 하사의 투혼에 힘입어 수도사단은 마침내 중공군의 공격을 격퇴하고 고지를 사수할 수 있었다. 정부는 공해동 하사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1952년 을지무공훈장을 수여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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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2019년 9월 호국인물, 박정모 대령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이 2019년 9월 호국인물로 ‘박정모 대령’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전쟁기념관에 의하면, 박정모 대령(1927.03.20.~2010.05.06.)은 1927년 3월 전남 신안군에서 태어났다. 1946년 해군 신병 1기로 입대 후 6·25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1월, 해병대간부후보생 1기로 해병소위에 임관했다. 대령은 1950년 9월, 국군 제1해병연대 소속으로 인천상륙작전에 참가, 서울 탈환작전 당시 중앙청에 태극기를 처음으로 게양했다. 1950년 9월 27일, 당시 국군 해병 제2대대는 미 제1해병연대와 함께 마포와 서울역을 경유하여 서울 시가지를 수복하고 있었다. 박정모 소위(당시 계급)가 지휘하는 제2대대 제6중대 1소대는 중앙청을 수복하기 위해 심야를 이용해 태극기를 지참한 채 중앙청으로 진격했다. 치열한 교전 끝에 중앙청에 돌입한 박 소위와 양병수 이등병조, 최국방·정영검 견습수병 등 4명은 오전 6시 10분, 서울이 북한군에 의해 피탈된 지 92일 만에 중앙청 돔 난간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쾌거를 거두었다. 박 소위(당시 계급)는 이후 원산상륙작전과 화천댐 탈환작전 등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웠으며, 정부는 6·25전쟁 기간 중 이룬 그의 공훈을 기려 을지·충무무공훈장을 수여했다. 휴전 후에도 해병대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다 1961년 대령으로 예편한 후 2010년 5월 6일 향년 85세로 타계하여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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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전현충원 2019년 9월의 현충인물, 안치범 의사자
【중앙보훈방송=김하늘 기자】 국립대전현충원이 2019년 9월의 현충인물로 ‘안치범 의사자’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국립대전현충원에 따르면, 안치범 의인은 1988년 8월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성우를 꿈꾸었고 그 꿈을 향해 도전하던 청년으로 깊은 배려와 정의로운 성격에 주위에 친구, 선·후배가 많았다. 그리고 그는 꾸준한 나눔과 봉사로 실천하는 선행자이기도 했다. 안치범 의인은 대학에서 외국어를 전공했지만 그의 꿈인 성우의 길로 진로를 정하고 본격적인 성우공채 시험을 위해 학원 근처 서울 서교동으로 독립했다. 그렇게 공채 시험에 매진하던 중 2016년 9월 9일 대부분의 이웃이 잠든 새벽 4시경 주택에 화재가 발생하자 건물 밖으로 나와 119에 신고한 후 이웃을 살리기 위해 다시 불길에 휩싸인 건물로 들어갔다. 그 위급한 순간에도 5층 건물 21세대(원룸)를 돌며 집집마다 초인종을 누르고 현관문을 세차게 두드리며 주민들을 대피시켰다. 그의 용기와 의로움으로 이웃들은 모두 생명을 건질 수 있었으나 정작 본인은 5층 계단에서 유독 가스로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열하루 동안 사경을 헤매다 20일 끝끝내 가족 곁을 떠나며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당시 쓰러져있던 그의 손은 뜨겁게 달아오른 문들을 두드리느라 심한 화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의 의로운 일화도 전해진다. 어느 날 다른 사람을 도우다 희생한 내용의 뉴스를 보다 어머니(정혜경 님)는 “치범아 혹시 저런 일 생기면 절대 나서면 안돼, 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것은 자기 목숨이야”라고 말을 건네자, 안치범 의인은 “옆에서 사람이 죽어 가는데 어떻게 모른척할 수가 있어 그리고 내가 남을 도와야 남도 나를 돕지”라며 화답한 일화에서 그의 깊은 의로움을 엿볼 수 있다. 보건복지부는 살신성인으로 아름다운 의(義)를 실천한 안치범 의인의 그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2016년 10월 의사자로 결정했다. 그리고 같은 해 서울 마포구는 용감한 구민상을, 서울시로 부터는 서울시 안전상을 수상했다. 또한 자신의 목소리를 그 누구보다 값지게 쓴 안 의사자의 희생정신을 기려 한국성우협회에서는 명예회원으로 결정했다. 대한민국정부는 살신성인으로 정의로운 사회의 귀감이 된 안치범 의사자를 국립대전현충원 의사상자 묘역에 안장하여 그 숭고하고 아름다운 의(義)를 기리고 있다. [김하늘 기자 hn90071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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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출신 2019년 9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김옥련 선생
【중앙보훈방송=오천지창조 기자】 제주특별자치도보훈청이 제주 출신 2019년 9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김옥련 선생’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청에 따르면, 김옥련 선생(1907.09.02.~2005.09.04.)은 북제주 출생으로, 1932년 1월 제주도 구좌면에서 해녀들의 권익침탈에 항거하는 시위를 전개했다. 1931년 해녀들에 대한 일본 관리들의 가혹한 대우와 제주도해녀조합 어용화의 폐단이 있자, 해녀들은 1931년 12월 20일 요구조건과 투쟁방침을 결의했다. 김옥련 선생은 1932년 1월 7일과 12일 제주도 구좌면에서 해녀조합의 부당한 침탈행위를 규탄하는 시위운동을 주도하고, 해녀들의 권익을 위해 부춘화 등과 함께 도사(島司) 전구정희(田口禎熹)와 담판을 벌여 요구조건을 관철시켰다. 그리고 1월 26일 경에는 제주도 민족운동가의 검거를 저지하려다 피체되어 6개월 정도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포장을 수여했다. [오천지창조 기자 oh-5004-o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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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전현충원 2019년 8월의 현충인물, 신명철 의사자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립대전현충원이 2019년 8월의 현충인물로 ‘신명철 의사자’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국립대전현충원에 따르면, 숭고한 의(義)를 실천한 신명철 의사자는 1963년 10월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다. 자신의 소중한 생명을 우리 사회에 진정한 용기와 희망으로 남기고 간 그는 부모에게는 든든한 버팀목이었고 사랑하는 배우자와 두 딸에게는 자상하고 존경받는 남편이자 아버지였다. 신명철 의사자는 2003년 섬유업체를 창업하고 불경기 속에서도 여름휴가를 포기해야할 정도로 바쁜 일상을 보냈다. 그러다 2005년 8월 14일 가족들에게 못내 미안한 마음에 시간을 내어 아내와 딸들과 함께 강원도 홍천의 수타사 계곡을 찾아 자매가 물놀이하는 것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소소한 행복을 즐겼다. 그러다 그 날 그 행복이 멈추지 않을 것만 같던 그 때 신명철 의사자는 딸들과 비슷한 또래의 여자아이 2명이 급류에 휘말린 위급한 사고현장을 목격하고 곧장 계곡 물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아이들을 밖으로 밀어내며 구해냈으나 자신은 물살에 휩쓸리며 안타깝게도 다시는 가족 곁으로 돌아 올 수 없었다. 보건복지부는 급박한 위기에 처한 타인을 구하고 희생한 신명철 의사자에게 의롭고 숭고한 희생정신과 용기를 기리기 위해 2005년 12월 의사자로 결정했다. 의사자란 직무 외의 행위로 구조행위를 하다가 사망한 사람으로 정의하고 있다. 구조행위는 자신의 생명 또는 신체상의 위험을 무릎 쓰고 급박한 위해에 처한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직접적·적극적 행위를 의미한다. 자신을 희생해 우리 사회의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남겨 준 신명철 의사자의 아름다운 용기는 온전히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정부는 살신성인으로 정의로운 사회의 귀감이 된 신명철 의사자의 공로를 기려 국립대전현충원 의사상자 묘역에 안장하여 숭고하고 아름다운 의(義)를 기리고 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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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2019년 8월 호국인물, 이범석(李範奭) 장군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이 2019년 8월 호국인물로 ‘이범석(李範奭) 장군’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전쟁기념관에 의하면, 이범석 장군(1900.10.20.~1972.05.11.)은 1900년 10월 서울 명동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5년 여운형 선생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가 1916년 항주체육학교에서 6개월간 수학했으며, 운남육군강무학교 기병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3·1운동 소식이 알려지자 이 장군은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취임하여 독립군 양성에 주력했으며, 1920년에는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 교수부장으로 활동하며 부대의 전투 역량 강화에도 힘을 썼다. 그해 10월 청산리전투에서 총사령관 김좌진을 도와 북로군정서군을 지휘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크게 기여했고, 이후 고려혁명군 기병대장으로 활동하며 시베리아에서 일제의 지원을 받고 있던 백계 러시아군과 전투를 벌였다. 1934년에는 낙양군관학교 한인 특설반의 대장으로 부임하여 한인 군사간부를 양성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1940년에는 한국광복군 창설에 참여하여 참모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광복군 총사령부의 핵심 부대라 할 수 있는 제2지대장으로서 미국 전략정보국(OSS)과 합작하여 국내 진공작전 수행 계획을 세우는 등 항일투쟁을 적극 전개했다. 그러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고, 1946년 광복군 동지들과 함께 인천항을 통해 조국으로 돌아왔다. 1946년에는 조선민족청년당을 결성했으며, 대한민국 정부수립 직후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으로서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고 국군 창설과 육성에 크게 공헌했다. 정부는 장군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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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의 6·25전쟁 영웅, 홍은혜 여사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가 해군의 어머니로 불리던 ‘홍은혜 여사’를 2019년 8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처에 따르면, 대한민국 해군의 창설자인 손원일(1909~1980) 제독의 부인 홍은혜 여사(1917.08.11.∼2017.04.19.)는 1917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나 1939년 이화여전(현 이화여대) 음악과를 졸업하고 당시 30세인 청년 손원일과 결혼했다. 이후 1945년 손 제독이 해군의 전신인 해방병단을 창설하고 초대 해군참모총장으로 취임하면서, 홍 여사도 한평생 대한민국 해군을 위한 봉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홍 여사는 우리나라 해군 최초의 전투함인 ‘백두산함’의 구매를 위해 해군장병 부인들과 함께 삯바느질로 전투함 구매 자금을 모으는데 앞장섰다. 이렇게 해서 도입한 백두산함은 6·25전쟁 발발과 함께 부산으로 은밀히 침투하던 북한수송선을 격침해 최초의 해상전투 승전기록을 남겼다. 또한 홍 여사는 6·25전쟁 중에 부상당한 해군과 해병대 병사들을 돌보는데 헌신했다. 정전협정 체결 이듬해,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에 공장과 탁아소, 유치원 등을 지어 전사자 가족들의 생계를 도왔으며 부상당한 병사들을 돕기 위한 모금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해군사관학교 생도들이 군가가 없어 일본 군가에 가사를 붙여 부르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던 홍 여사는 손 제독이 쓴 가사에 곡을 만들어 우리나라 최초의 군가 ‘해방(海防)행진곡’을 발표했다. 그 이후에도 ‘바다로 가자’, ‘해군사관학교 교가’ 등 다수의 해군 군가를 직접 작곡하여 부르게 하였다. 한평생 우리나라 해군을 향한 사랑과 관심을 놓지 않고 헌신하여 ‘해군의 어머니’라 불리던 홍은혜 여사는 2009년 손원일 제독 탄신 100주년을 맞아 해군으로부터 공로패를 받았으며, 2017년 향년 100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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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의 독립운동가, 김구 선생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이 공동으로 ‘김구 선생’을 2019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처에 따르면, 김구 선생(1876.08.29.~1949.06.26.)은 1876년 7월 11일(양력 8.29)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1896년 국모를 살해한 원수를 갚기 위해 일본인 스치다를 살해하고 옥고를 치렀다. 1904년 신지식인을 길러내는 애국계몽운동을 펼치기 시작했으며, 황해도 문화군 초리면(신천군 초리면)의 서명의숙(西明義塾)과 안악의 양산학교(楊山學校) 교사, 재령의 보강학교(保强學校) 교장 등을 지내며 교육 구국운동에 힘을 쏟았다. 또한 최광옥과 함께 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를 조직하여 학무총감(學務總監)에 추대되어 각 군을 돌며 계몽운동을 펼쳤다. 선생은 1910년 신민회에 가입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다 1911년 일제에 붙잡혀 징역 2년 형을 언도받았고 안명근 사건에 연루되어 15년 형이 추가되어 옥고를 치르다 1915년 가출옥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중국 상하이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 경무국장에 임명되어 일제가 보내는 첩자들을 가려내 처단하고 정부요인들과 동포들의 안정을 지켜내는 일을 수행했다. 1931년에는 임시정부가 조직한 한인애국단을 맡아 일왕 처단(이봉창), 조선총독 처단(이덕주·유진식), 관동군사령관 처단(유상근·최흥식) 등을 지휘했다. 1933년 장제스 총통을 만나 한인청년을 장교로 길러내는 길을 열었다. 뤄양(洛陽)에 있던 군관학교에 한인청년들을 장교로 길러낼 특별반을 만들었으며, 만주에서 독립전쟁을 벌이던 이청천, 이범석, 오광선 등을 초빙하여 장교 양성에 주력했다. 1940년 선생은 한국독립당의 집행위원장, 광복군 통수권자,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이 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굳건히 지키고 조국의 광복을 위해 활약했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요인 1진과 함께 환국 후 오로지 통일국가 수립을 위해 애쓰시던 선생은 1949년 6월 26일 경교장(京橋蔣)에서 안두희의 흉탄에 서거했다. 선생의 유해는 온 국민의 애도 속에 국민장으로 치러지고 효창공원에 안장됐다. 한편,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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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출신 2019년 8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고경수님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제주특별자치도보훈청이 제주 출신 2019년 8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고경수님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청에 따르면, 전남 해남에서 출생한 고경수님(1916.08.01.~1935.07.04.)은 1931년 3월 제주농업학교(濟州農業學校)에 재학 중, 동료 학생 10여 명이 일본인 교장의 한국인 차별정책 등에 항거하다가 퇴학 또는 일본 경찰에 의해 구속되는 사건이 벌어지자, 양공팔(梁公八)·김만제(金萬濟) 등과 함께 민족차별과 식민지교육에 항거하여 일본인 교장의 사택을 습격할 것을 결의했다. 같은 달 9일 저녁 교장의 사택으로 들어가 장작과 곤봉을 이용하여 가옥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어 1931년 9월 3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징역 9월에 집행유예 4년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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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전현충원 2019년 7월의 현충인물, 강태조 육군일병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립대전현충원이 2019년 7월의 현충인물로 ‘강태조 육군일병’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국립대전현충원에 따르면, 강태조 육군일병은 1929년 6월 전북 무주에서 태어났다. 강 일병은 1948년 육군에 입대해 복무 중인 1950년 6월 25일 6·25전쟁이 발발하자 조국의 미래를 위해 본인과 가족의 미래보다 조국을, 백 년을 살기보다 조국의 영광을 지키는 삶을 선택했다. 6·25전쟁 당시 강태조 일병이 속한 육군 7사단 8연대 등 국군은 북한군과 인제-원통 도로와 주변 저지대를 통제할 수 있는 한석산을 확보하기 위해 한 치의 양보 없는 고지쟁탈전을 벌였다. 마침내 국군의 승리로 동부전선 방어선을 지켜낼 수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1951년 4월 24일 강태조 일병이 이 전투에서 산화하며 끝끝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아버지 어머니! 평안하게 계시오. 까마귀 우는 곳에 저 가겠소. 삼팔선 넘어 백두산 상봉에 태극기 날리며 죽어서 뼛골이나 돌아오리다. 아내여! 굳세게 새 세상사시오. 우리 다시 만날 백년의 언약. 지금은 이별가를 합창하고 가오니 나에게는 중대한 책임이 있소” 강 일병이 아내에게 남겨준 ‘이별가’(전문)에서 그의 우국충정의 면모를 볼 수 있다. 강 일병은 1949년 여름휴가를 나와 백일이 갓 지난 딸(강춘자님)을 한 번 안아보고 복귀한 뒤 ‘이별가’ 노래 가사처럼 강산이 바뀌고도 한참 뒤인 2012년 61년 만에 뼈골이 돼서야 가족 품으로 돌아왔다. 2009년 5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에 의해 유해가 발굴됐으나 신원 확인에 필요한 단서가 없어 유족을 찾지 못하고 있다가 2010년 6월 아버지를 찾아 나선 자녀 강춘자님이 유전자를 제공하면서 마침내 유족의 품에 안겼다. 아버지를 찾게 된 강춘자님은 "남겨진 한 장의 사진으로만 뵙던 아버지가 돌아온다니 꿈만 같다"며 "입대당시 불러주신 아버지의 노래 가사를 평생 잊지 못하고 내게 들려준 어머니의 한이 어느 정도 풀린 것 같다"고 말하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대한민국정부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나라와 민족을 위해 고귀한 목숨을 바친 강태조 일병을 2011년 12월 13일 6·25전사자 발굴유해의 합동안장식을 거행한 후 국립대전현충원 사병 제3묘역에 안장하여 그 공로를 기리고 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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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2019년 7월 호국인물, 여방오(呂芳午) 일등중사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이 2019년 7월 호국인물로 ‘여방오(呂芳午) 일등중사’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전쟁기념관에 따르면, 여방오 일등중사(1928.02.13.~1953.06.09.)는 1928년 2월 전라남도 완도에서 태어나, 1952년 1월 군에 입대했다. 여방오 일등중사는 휴전회담이 막바지에 달하던 1953년 6월, 제12보병사단 52연대 9중대 분대장으로서 강원도 인제군 서화 북방 812 고지 전투에 참가했다. 812고지 탈환은 서화에서 인제까지 가는 국군의 주보급로였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임무였다. 이러한 812고지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있던 북한군은 6월 8일 우세한 병력으로 파상 공격을 감행하여 52연대의 방어진지를 돌파한 뒤 812 고지 동쪽 능선이었던 쌍용 고지까지 점령했다. 위기에 처한 국군 제12사단은 쌍용 고지 탈환을 위해 여방오 일등중사가 속해 있던 9중대를 투입하여 반격을 하려 했으나 쌍용 고지를 이미 점령하고 유리한 지형을 차지하고 있던 북한군에게 번번이 무산됐다. 이에 여 일등중사는 더 이상 아군을 위험에 빠뜨릴 수 없다는 생각에 단신돌격을 결심, 아군의 항공폭격을 유도하기 위해 공중에서 쉽게 식별할 수 있는 대공포판을 메고 직접 북한군의 기관총 진지로 뛰어드는 공격을 감행했다. 적진 속으로 돌진한다는 것은 곧 적과 아군 모두의 공격목표가 된다는 것을 의미했지만 여 일등중사는 끝까지 고지를 향해 접근했다. 죽음을 무릅쓴 여 일등중사의 유도를 받은 아군 공군기는 적의 기관총 진지에 강력한 화력을 퍼부었다. 검은 연기가 온 산을 뒤덮을 정도의 공군 공격에 힘입어 마침내 북한군의 은폐, 엄폐된 적의 기관총 진지를 완전히 파괴할 수 있었다. 적의 기관총 진지가 파괴되자 국군은 드디어 고지를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여 일등중사는 끝내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고인의 전공을 기려 1955년 3월 1일 을지무공훈장을 수여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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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의 독립운동가, 이동휘 선생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광복회·독립기념관이 공동으로 ‘이동휘 선생’을 2019년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처에 따르면, 이동휘 선생(1873.06.20.~1935.01.31.)은 1873년 6월 20일 함경남도 단천에서 빈농의 아들로 출생했다. 선생은 1904년 러일전쟁 발발 이후 일본의 침략이 가속화되자, 1905년 보창학교(普昌學校)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운동에 헌신했다. 이후, 대중을 자각시켜 구국운동에 나서게 하기 위해 교육문화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기독교야말로 쓰러져 가는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종교라는 신념에서 기독교 전도활동에 힘썼다. 선생은 서북학회(西北學會)와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의 지도자로서 구국운동을 전개했으며, 1911년 3월 안명근·양기탁사건으로 일제총감부에 체포되어 인천 앞 바다에 있는 무의도에서 1년간 유배생활을 보내야했다. 1912년 6월 유배에서 해제된 선생은 1913년 2월경 압록강을 건너 북간도로 탈출했다. 선생은 북간도 한인자치기관인 간민회(墾民會)를 지도하는 한편, 북간도 각지를 순회하며 신교육 보급과 기독교전도활동을 계속하며 동포사회의 단결과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러일전쟁 10주년이 되는 1914년에는 제2의 러일전쟁 발발에 대비하여 항일광복전쟁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를 위해 선생은 만주와 러시아의 민족운동세력을 규합한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를 조직하였으며, 북간도 왕청현 나자구에 사관학교를 설립했다. 1918년, 선생은 하바로브스크에서 김알렉산드라․유동열․김립․오성묵․오와실리․이인섭 등 동지들과 최초의 한인사회주의정당인 한인사회당을 창당했다. 한인사회당은 기관지 발행, 군사학교 설립, 일본군병사들을 상대로 한 반제반전(反帝反戰)선전, 한인적위대 조직 등을 추진했다. 선생은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직에 취임했다. 선생은 안정된 체제에서 방안을 찾는 정치가라기보다는 혁명적 방법에 의해서만이 조국광복을 달성할 수 있다는 신념을 지녔던 진보적 민족혁명가였다. 특히, 조국광복을 위한 일이라면 모든 일에 앞장서서 선봉에 서고야마는 선생의 진보적 행동성과, 전통적인 권위와 사회적 제약을 과감히 개혁코자 했던 혁명성은 다른 사람들의 추종을 불허했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편,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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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의 6‧25전쟁영웅, 김재호 육군 일등병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가 ‘김재호 육군 일등병’을 2019년 7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처에 따르면, 김재호 일등병(1926.01.05.~1953.07.15.)은 1926년 전라남도 광양군 출생으로 육군에 입대 후 수도사단 제26연대 1대대 소총수로 복무하면서 수도고지 전투에 참전했다. 수도고지 전투는 1952년 중부전선의 금성돌출부에 있는 수도고지에서 국군 수도사단과 중공군이 군사분계선 설정에 대한 휴전협상의 주도권 장악을 목적으로 전개한 고지 쟁탈전이었다. 김재호 일등병은 이 전투에서 중공군의 대규모 공격을 저지하고 수도고지를 사수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1952년 10월 6일 저녁, 중공군의 전차 4대가 수도고지에 포격을 가하고 6,000여 발의 포탄을 고지 일대에 쏟아 부으며 집중 공격을 가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중대의 전선이 무너지고 적이 진내로 돌입하면서 수도고지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김재호 일등병은 접전이 벌어지기 직전, 적의 전차포 사격으로 엄체호가 무너지면서 잠시 정신을 잃고 말았다. 다른 전우들이 모두 전사한 가운데 홀로 정신을 잃고 쓰려졌던 김재호 일등병은 얼마 후 정신을 차리고 무너진 흙더미를 헤치고 나왔다. 그 때 그의 눈앞에서는 아군과 적군이 무수한 수류탄전과 백병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에 김 일등병은 용맹히 뛰쳐나가 총검을 휘두르며 중공군을 격퇴하고 수류탄을 투척하여 적 일부를 폭살하였다. 또한 당황하여 흩어지는 적을 향해 소총사격을 가해 6명을 사살하고 적이 완전히 퇴각한 후 소총 2정과 다발총 1정을 노획하여 본진으로 복귀했다. 정부는 이 같은 공적으로 1953년 김재호 일등병에게 을지무공훈장을 수여했다. 그러나 김재호 일등병은 정전협정 체결 12일 전인 1953년 7월 15일 금성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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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출신 2019년 7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김남식님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제주특별자치도보훈청이 제주 출신 2019년 7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김남식님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청에 의하면, 전남 해남에서 출생한 김남식님(1919.12.30.~1989.03.03.)은 천주교 신자로서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거부했으며, 거주지인 제주도 서귀포 천주교회의 아일랜드인 선교사 나 신부(본명, 토마스 다니엘 라이언) 및 서 신부(본명, 오스틴 스위니)와 친분을 맺고 1940년 겨울경부터 수시로 중일전쟁(中日戰爭)과 영독전쟁(英獨戰爭)의 전황에 관한 얘기를 나누면서 일본 신문 방송의 보도가 거짓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1941년 7월경에는 "현재 일본은 중일전쟁을 수행하느라 상당히 약해져 있는 터에 앞으로 영미 양대국을 상대로 해서 교전하게 되면 당연히 패전할 것"이라는 발언을 하였다. 이 무렵 일제는 제주도를 중국에 대한 도양폭격(渡洋爆擊)의 발진기지로 만들면서 도내 반일세력을 색출 제거코자 하여, 우선 적성국(敵性國)인 영국 국적의 아일랜드인 선교사들과 그들이 소속된 천주교회 조직을 탄압 파괴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그는 위의 발언을 통해 근거 없는 유언비어를 유포했다는 이유로 1941년 10월 서 신부, 나 신부 등과 함께 일경에 피체되어 1942년 10월 24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육·해군형법 위반으로 금고(禁錮)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했다(자료제공=제주특별자치도보훈청).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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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전현충원 2019년 6월의 현충인물, 윤영하 해군소령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립대전현충원이 2019년 6월의 현충인물로 ‘윤영하 해군소령’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국립대전현충원에 따르면, 제2연평해전의 영웅 윤영하 해군소령은 1973년 11월 경기도 시흥에서 태어났다. 그는 대한민국 해군 장교 출신인 아버지(윤두호님)와 해군사관학교 32년 선후배 사이로 대를 이어 대한민국 바다를 지킨 영예로운 해군 명문가 충무공의 후예다. 윤 소령은 우상인 아버지와 같은 해군의 꿈을 꾸며 자랐다. 전역한 후 해운회사에 근무하던 아버지를 따라 초등학교 3년 동안 영국 런던과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생활하다 귀국하여 송도고등학교와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96년 해사 50기로 대한민국 해군으로서 첫발을 내딛었다. 그는 해군 계봉함 갑판사관을 시작으로 해군 원산함 정훈보좌관, 해군 초계함 제천함 작전관으로 근무 하다 2001년 1월 참수리급 고속정 참수리 357호의 정장에 임명됐다. 윤 소령은 모범적으로 승조원들을 이끌며 성품 또한 따뜻하고 차분하여 주위의 신임이 높았다고 한다. 해사 동기인 최민석 예비역 소령은 “재학 당시 진중한 성격으로 그(윤영하 소령)에게 고민을 상담하는 동기들이 많았다”고 회상하며 그리워했다. 2002년 6월 29일 월드컵 4강전을 앞두고 세계의 이목이 대한민국에 집중된 시기 북한은 제1연평해전(1999년 6월 15일)에 이어 북방한계선(NLL)을 또다시 침범해 왔다. 이에 대응하고자 참수리 357호, 358호로 이루어진 대한민국 해군 고속정 253편대가 긴급 출동하여 대응기동과 경고방송을 했으나 북한 경비정은 속도를 늦추지 않고 우리 참수리 357호를 선제 기습으로 공격하여 제2연평해전이 발발했다. 이 치열한 교전은 북한군 경비정이 화염에 휩싸인 채 도주하며 우리 해군이 대한민국 서해를 지켜낼 수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현장을 지휘하던 윤영하 소령과 다섯 분의 용사가 전사하고 19명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등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윤영하 소령의 살신 보국 정신의 공로를 기려 1계급 특진과 충무무공훈장을 추서했으며, 호국의지를 계승하고자 2007년 6월 28일 참수리 고속정을 대체한 차기 고속함 1번함을 윤영하함으로 명명하고 2009년 6월 2일 실전 배치시켰다. 또한 불굴의 투지와 호국정신의 업적을 기려 국립대전현충원 제2연평해전 전사자 묘역에 안장하여 예우하고 있다(자료제공=국립대전현충원).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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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전현충원 2019년 5월의 현충인물, 최동문 경위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립대전현충원이 2019년 5월의 현충인물로 ‘최동문 경위’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국립대전현충원에 따르면, 최동문 경위는 1953년 3월 경북 김천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교 시절 어려운 집안사정으로 학업을 포기해야만 했으나 굳은 의지로 독학하여 경찰공채시험에 당당히 합격하고 1980년 12월 20일 국가의 치안과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공무원으로서 부산지방경찰청에 첫 발을 내딛었다. 첫 발령지인 부산남부경찰서 대연3파출소를 시작으로 부산남부경찰서 수사 형사과와 부산지방경찰청 형사기동대에 몸담으며 민생의 믿음직한 경찰로 흔들림 없는 길을 걸어갔다. 특히 민락2파출소에서 근무하던 1985년 2월에는 강력범 검거의 공을 세우며 경장으로 특진하는 영광도 안았다. 최동문 경위는 공무원으로 임명된 순간부터 1989년 5월 3일 순직할 때 까지 길지 않은 경력이지만 많은 공적으로 그의 투철한 직업정신을 엿볼 수 있다. 1985년에 IMF/IBRD경호기념장 기장(내무부장관)을 비롯하여 1986년 제10회 아시아경기대회 경비기념 기장(내무부장관)과 1987년에는 모범수사경찰관(경찰서장)으로 임명되는 등 다수의 상훈을 수여 받았다. 주로 강력계 형사로 근무한 최동문 경위는 세 차례나 흉기에 찔리면서도 끝까지 강도를 검거하는 베테랑 형사로도 명성이 높았다. 직업 특성상 위험한 상황은 늘 따라다녔고 부산지방경찰청 형사기동대에 근무 중이던 1989년 5월 3일 부산 동의대학교 학내 입시부정 사건을 규탄하는 학생들의 시위를 진압하던 중 화염병에 의한 화재로 안타깝게도 최동문 경위를 포함하여 7명의 경찰과 전투경찰이 순직했다. 정부는 국법질서를 확립하다 뜨거운 화염 속에서 산화한 최동문 경위에게 경장에서 경위로 2계급 특진과 보국훈장(광복장)을 추서하고 국립대전현충원 경찰관묘역에 안장하여 고인의 공훈을 기리고 있다(자료제공=국립대전현충원).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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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2019년 5월 호국인물, 노종해 경찰 경감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이 2019년 5월 호국인물로 ‘노종해 경찰 경감’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전쟁기념관에 따르면, 노종해(盧鐘海) 경찰 경감(1922.01.14.~1950.06.25.)은 1922년 1월 14일 황해도 안악면에서 태어났다. 1950년 2월 경위에 임용(경찰 간부후보생 4기)됐고, 6월에는 당시 강원도 춘성군 북산면 내평 지서장으로 근무 중이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강원도 일대 경찰은 비상경비사령부를 구성해 각 지서에서 항전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당시 적은 국군의 퇴로를 차단하고자 춘천으로 진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춘천시내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화천과 춘천으로 가는 46번 도로 내평리 마을 한복판에 위치한 내평지서를 반드시 통과해야만 했다. 당시 내평지서에는 지서장인 노종해 경감(당시 경위)을 포함한 경찰관 10명과 내평리 일대 청년단원이 전부였다. 이들이 방어하던 내평지서는 마을 한복판인 46번 도로변의 약간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지형이 매우 불리했고 방호도 지서 주위에 마대로 참호를 쌓아올린 매우 빈약한 수준이었다. 변변한 무기도 없이 전차를 앞세운 적의 정규군을 맞아 노 경감과 경찰관, 청년단원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전투에 임했다. 이들의 분전으로 소규모 경찰지서라고 얕잡아보던 적은 20여 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자 결국 82mm박격포로 포격을 가하며 응전해 왔다. 치열했던 교전에서 노경감과 경찰관, 청년단원들은 장렬하게 산화했다. 이들의 숭고한 희생 덕에 적의 춘천 진격은 1시간 이상 저지되었고, 국군은 소양강 방어선을 구축해 결국 6·25전쟁 첫 승리를 안긴 춘천지구 전투의 초석이 됐다. 정부는 노종해 경감의 공훈을 기려 경위에서 경감으로 1계급 특진과 충무무공훈장을 추서했다. 강원지방경찰청은 2016년부터 매년 고인의 희생과 헌신을 기리는 추모행사를 개최하고 있다(자료제공=전쟁기념관).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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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의 6‧25 전쟁영웅, 김문성 해병대 중위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가 ‘김문성 해병대 중위’를 2019년 6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국가보훈처에 의하면, 김문성 중위(1930.08.25.∼1951.06.08.)는 1930년 제주도 서귀포 출생으로 1951년 3월 해병대 소위로 임관한 후 해병대 제1연대 3대대 9중대 2소대장으로 중동부전선 도솔산지구 전투에 참전했다. 1951년 6월 4일, 해병대 제1연대는 강원도 양구 지역에 위치한 도솔산에서 북한군 최정예 제12사단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당시 도솔산은 중동부 전선의 핵심 요충지로 이를 확보하지 못할 경우 해병대는 물론 좌우에 인접한 아군이 한 걸음도 전진할 수 없는 전략상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이를 잘 알고 있는 북한군 또한 매우 거세게 저항했다. 도솔산을 탈환하기 위한 작전에서 김문성 소대장은 24개 목표 중 가장 험준한 지점에 투입되었다. 적은 난공불락의 지형적 이점을 이용하여 자동화기로 집중 공격했다. 김문성 소대장은 선두에서 소대를 지휘하며 빗발치는 총탄을 무릅쓰고 적의 진지 50m 지점까지 육박해 들어갔으나, 안타깝게도 목표를 바로 눈앞에 두고 적탄에 피탄되어 장렬히 전사했다. 소대장의 전사를 목격한 소대원들은 격분하여 총돌격을 감행하여 마침내 적을 격멸시키고 미 해병대도 성공하지 못했던 난공불락의 요새인 도솔산 목표지점을 완전히 탈환하여 ‘무적해병’의 신화를 이룩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계급 특진과 함께 충무무공훈장을 추서했다(자료제공=국가보훈처).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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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의 독립운동가, 한용운 선생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광복회·독립기념관이 공동으로 ‘한용운 선생’을 2019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한용운 선생(1879.08.29.~1944.06.29.)은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1913년 한국불교가 새로운 문명세계에 적응할 수 있는 개혁방안을 제시한 기념비적 책인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을 발간했으며, 그때부터 불교의 혁신 운동을 일으킨 주역이라는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1919년에는 종교계를 중심으로 추진된 전국적이며 거족적인 3·1운동 계획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불교계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탑골공원에서의 만세운동 및 전국적인 만세운동에 적극 동참하도록 권유했다. 1919년 3월 1일 종로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식을 가진 후 모두 일경에게 체포되었으며, 선생은 같은 해 7월 10일 옥중에서 「조선독립의 서」란 논설을 집필하여 명쾌한 논리로 조선독립의 정당성을 의연하게 강조했다. 선생은 1921년 12월 21일 석방된 뒤에도 민족운동을 계속하여 갔다. 1922년부터 전국적으로 확산된 물산장려운동을 지원하고, 1923년에는 조선민립대학 기성회 상무위원으로 피선되어 활동하였다. 그리하여 물산장려를 통한 민족경제의 육성과 민족교육을 위한 사립대학 건립 운동에 앞장섰다. 1927년 2월 좌우합작 민족협동전선으로 신간회(新幹會)의 창설이 추진되자, 선생은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신간회가 창립되자 경성지회장으로 피선되어 민족운동의 최일선에서 활동했다. 선생은 1933년 55세 되던 해 지금의 성북동 집터에 심우장(尋牛莊)이라는 자신의 집을 짓고 입적할 때까지 여생을 보냈다. 집을 지을 때 선생을 돕던 인사들이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볕이 잘 드는 남향으로 터를 잡을 것을 권유했으나 총독부 청사가 보기 싫다고 하여 끝내 동북 방향으로 집을 틀어 버리고 말았는데 여기에서 선생의 민족적 자존심을 엿볼 수 있다. 선생은 일제말기 총동원체제 아래 자행된 황민화 정책의 거센 파도 속에서도 민족적 자존심을 꺾지 않았다.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1940년 창씨개명 반대운동, 1943년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 등을 펼쳤다. 선생은 1944년 6월 29일 그토록 그리던 조국광복과 민족독립을 눈앞에 두고 입적해, 유해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자료제공=국가보훈처).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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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출신 2019년도 6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홍성옥님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제주특별자치도보훈청이 제주 출신 2019년 6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홍성옥님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청에 의하면, 홍성옥님(1913.06.09.~1972.04.23.)이 제주공립농업학교 2학년생이던 1931년 3월에, 3학년생 김원요가 소위 사상 불순을 이유로 졸업 직전에 퇴학처분을 받자 학교 당국에 격렬히 항의했다. 이에 일경은 졸업식장에서 그를 체포했다. 또한 졸업예정자인 신창진·양두옥이 같은 이유로 유급되었다. 홍성옥님은 동료 학생들과 함께 식민지 교육 철폐를 주장하는 격문을 뿌리고 일본인 교장의 관사를 습격하여 집단으로 항의하며 기물을 파손하는 등의 격렬한 항거를 주도했다. 이 일로 피체된 그는 동년 8월 3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동년 10월 22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5년이 확정되기 까지 7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