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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의 6․25전쟁영웅 홍윤조 대한민국 육군 중위
【중앙보훈방송=구용환 기자】 국가보훈처는 홍윤조 대한민국 육군 중위를 ‘2023년 6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하였다. 홍윤조 대한민국 육군 중위는 6‧25전쟁 당시, 통신선 단절로 연대의 철수 작전이 예하 대대에 전달되지 않자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자세로 유선 통신 연결을 성공시키고 산화하였다.1927년 5월 4일 평안남도 평원군에 태어난 홍윤조 중위는 1953년 1월 육군 소위 임관과 동시에 제8사단 제16연대 통신 가설 장교로 임명되었다. 6‧25전쟁의 정전 협상이 막바지에 다다를 무렵인 1953년 7월 13일, 중공군은 유리한 지형과 작전상 요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중부 전선에 5개 군단을 투입, 최후 공세를 시작했다. 이에 아군은 중공군의 공격을 최대한 저지하다 철수 명령이 하달되면 서로 엄호하면서 부대별로 철수할 계획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도처에서 백병전이 벌어지던 중 제8사단 제16연대의 철수계획이 변경 지만, 예하 1대대는 통신선이 단절되어 철수계획을 전달받지 못해 고립 위기에 처했다. 이때 당시 소대장(소위)이었던 홍윤조 중위는 긴급가설 결사조를 편성, 대원 10명과 함께 끊어진 유선 통신선 복구에 나섰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적의 박격포탄이 터져 가슴과 대퇴부에 큰 부상을 입은 홍 중위는 생명이 위험한 가운데서도 “생명선을 연결하라, 부탁한다”는 말을 남긴 채 산화했다. 소대장의 죽음을 목격한 조원들은 목숨을 걸고 무사히 철수작전을 완료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목숨을 바쳐 임무를 수행한 그에게 중위로의 1계급 특진과 함께 화랑무공훈장을 추서했다. 구용환 기자 kyh@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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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2022년 7월의 호국인물, ‘홍대선 해군하사’ 선정...신형 유도탄고속함(PKG) 12번함, 홍대선함 명명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은 2022년 7월의 호국인물로 ‘홍대선 해군하사’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전쟁기념관에 따르면 홍대선 하사(1929.1.14.~1952.1.4.)는 1929년 1월 14일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났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 해군에 입대했다. 6.25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져가던 1951년 10월, 북한군은 서해안 옹진반도에 진지를 구축하고 우리 군이 주둔 중이던 서해 도서 지역에 기습상륙을 도모하였다. 이에 우리 해군은 해상을 통제하고 피난민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탁수작전(濁水作戰)으로 명명된 서해안 경비작전을 실시하였다. 이때 홍대선 하사는 LST-801함(천안함)의 LCVP(Landing Craft, Vehicle, Personnel: 상륙주정)정 정장으로서 작전에 참가하였다. 1952년 1월 4일, LST-801함에 순위도(巡威島) 피난민 840명을 안전하게 호송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홍대선 하사는 LCVP정으로 피난민을 LST-801함으로 호송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 때 북한군이 피난민 호송작전을 수행하는 우리 해군을 발견하고 경기관총과 박격포 등으로 공격하며 전마선(傳馬船: 배와 육지사이의 연락을 맡아하는 배)을 이용하여 순위도에 상륙하려고 하였다. 홍대선 하사는 피난민 수송을 다른 단정에게 맡기고 자신의 LCVP정으로 북한군의 전마선을 향해 돌진, 파괴하여 적의 상륙을 저지하였다. 그러나 충돌 공격으로 LCVP정도 파손되어 더 이상 피난민 호송작전을 실행할 수 없게 되었다. 홍대선 하사는 피난민을 안전하게 탈출시키기 위해 인근 예안리 해안에 홀로 상륙하여 의도적으로 자신의 위치를 노출시켜 북한군의 사격을 유인하였다. 북한군을 향해 기관단총으로 응사하던 그는 결국 북한군이 쏜 탄환에 흉부와 복부를 맞고 전사하였다. 홍대선 하사의 희생으로 순위도 피난민 840명은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었다. 정부는 홍대선 하사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52년 11월 8일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하였다. 또한 대한민국 해군은 신형 유도탄고속함(PKG) 12번함을 홍대선함으로 명명하여 그의 희생정신과 애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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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2022년 6월의 호국인물, 제2연평해전 6용사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은 2022년 6월의 호국인물로 ‘제2연평해전 6용사’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한일 월드컵 막바지였던 2002년 6월 29일 오전, 연평도 부근 해상에서 북한 경비정 2척이 서해 북방한계선(Northern Limit Line: NLL)을 침범하여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에 북한의 침입에 대비하고 있던 참수리-357정과 참수리-358정이 긴급 출동하였다. 우리 해군은 남하하는 북한 경비정을 향해 퇴거 경고 방송과 함께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하도록 차단기동을 실시하였다. 10시 25분, 근접 거리에서 차단기동을 하던 참수리-357정을 향해 북한 경비정이 모든 포를 동원하여 기습공격을 시작했다. 북한 경비정은 미리 공격을 준비하고 배를 지휘하는 함교와 조종하는 조타실을 정확히 노려 공격하였다. 이 공격으로 참수리-357정을 지휘하던 정장 윤영하 소령(당시 대위)이 전사하고 부장 이희완 중위가 중상을 입었다. 참수리-357정 승조원들은 지휘관이 전사·중상을 입어 지휘체계에 손상을 입은 상황 속에서도 40mm 함포와 20mm 벌컨포, M60기관총 등으로 북한 경비정을 향해 대응사격을 실시했다. 이와 함께 우리 해군 고속정과 경비 중인 초계함 등이 교전에 참가하여 북한 경비정을 향해 대응사격을 실시하였다. 10시 50분, 25 분간의 교전 끝에 우리 해군의 집중 포격을 받은 북한 경비정은 화염에 휩싸인 채 다른 북한 경비정에 예인되어 북상하였다. 이 전투에서 우리 군은 적 경비정 1척을 격파하고 적 30여 명을 사상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아군은 6명이 전사하고 19명이 부상하였으며 참수리-357정이 침몰하는 피해를 입었다. 윤영하 소령은 교전규칙에 따라 참수리-357정을 지휘하던 중 적의 기습공격을 받아 전사하였다. 한상국 상사(당시 중사(진))는 적의 공격이 조타실로 집중되는 상황에서도 배에 타고 있는 승조원들의 안전을 위해 손을 조타기에 끈으로 묶고 키를 유지하던 중 전사하였다. 조천형 상사(당시 중사(진))과 황도현 중사(당시 하사)는 20mm 벌컨포 사수로서 응전하다 적의 집중 공격을 받아 방아쇠를 잡은 채 전사하였다. 서후원 중사(당시 하사)는 M60 기관총 사수로 교전 중 적의 흉탄에 전사하였다. 박동혁 병장(당시 상병)은 의무병으로서 자신이 부상한 상황 속에서도 승조원들의 구호를 위해 분투하였다. 또한 전사한 서후원 중사 대신 기관총을 잡아 응사하던 중 집중 사격을 받아 중상을 입었고, 교전 후 국군수도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결국 전사하였다. 정부는 제2연평해전에서 전사한 6용사의 공훈을 기려 전원 1계급 특진과 함께 윤영하 소령·박동형 병장에게 충무무공훈장을, 한상국 상사·조천형 상사·서후원 중사·황도현 중사에게 화랑무공훈장을 추서하였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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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의 독립운동가, ‘동제사’ 활동 「김갑·한흥교·민제호」 선생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공동으로 “일제강점기 동제사(同濟社)에 가입,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헌신한 김갑·한흥교·민제호 선생을 2022년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30일 보훈처(처장 박민식)에 따르면 동제사는 1912년 신규식 선생이 중심이 되어 상하이에서 조직된 최초의 독립운동 단체로, 상하이 한인들의 단결과 젊은 독립운동가들의 교육을 위해 박달학원을 설립하기도 했다. 부산 동래에서 출생(1889년)한 김갑 선생은 1909년 영남지역 첫 비밀 결사조직인 대동청년단에 가입해 항일운동을 했으며, 1917년 5월 베이징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상하이로 건너가 동제사에 가입했다. 동제사의 박달학원에서 교육을 받고 동제사 중견간부로 활동한 선생은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임시의정원이 수립되자 경상도 대표 의원으로 활약했으며, 임시정부에서는 교통부 위원, 군무위원회 이사, 법제위원회 위원으로서 초기 임시정부 안정화를 위해 힘을 쏟았다. 1924년 4월부터 임시정부 법무총장대리차장, 노동총판에 이어 재무장으로 활동하며 임시정부의 살림을 책임지기도 했지만, 1933년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租界)에 있는 광제의원에서 4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임시정부는 선생의 헌신에 보답하기 위해 국민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부산 동래 출생(1885년)의 한흥교 선생은 1910년 오카야마 의학전문학교를 졸업, 1911년 신해혁명(중국의 민주주의 혁명)참여를 위해 상하이로 건너가 본격적인 항일운동에 투신했다. 신해혁명 국민군 참여를 계기로 신규식 선생 등을 만나 동제사가 결성될 때부터 가입·활동했고, 항저우 의학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동제사 동지들의 의료지원을 전담했다. 이후 베이징 의학전문학교 교수로 근무 중 만주, 몽골지역의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위한 지원업무에 이어 중국 육군 군의정(현 소령)등을 거쳐 1914년 상하이로 돌아온 선생은 1916년까지 상하이, 절강성 가남지역에서 의원을 개업, 동제사를 재정적으로 후원했다. 신채호 선생과 중외통신, 신광신보 등을 간행하며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알리는데도 헌신한 선생은 1927년 국내 귀국 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만주지역 의료 활동과 함께 북경, 태원 등에서 병원을 운영하며 독립운동을 후원했다. 해방 후 귀국, 1967년 82세의 일기로 숨을 거뒀다. 민제호 선생은 서울 종로에서 출생(1890년), 한성영어학교 재학 중 국권을 빼앗기자(1910년) 항일운동 참여를 결심, 1913년 상하이로 망명해 동제사에 가입한 뒤 한중우호단체인 신아동제사에서 대외 협력업무를 맡았다.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열린 임시의정원에서 69명의 의원에 선출된 후 대한적십자회와 대한인거류민단 등 대중단체에 참여해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1929년까지 임시정부 대외업무를 수행하며 자금모집 등의 협력업무도 담당했다. 1932년 한인애국단 단원인 윤봉길 의거로 일제의 탄압이 시작되자 상하이 임시정부와 함께 항저우로 피신했지만, 곧 병을 얻어 1932년 42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감갑, 한흥교, 민제호 선생은 동제사에 가입해 항일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신 분들로, 이후 임시정부에서도 주요 임무를 맡아 조국독립을 위해 끝까지 헌신했다. 정부는 선생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김갑 선생에게 1986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한흥교 선생과 민제호 선생에게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각각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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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의 6·25 전쟁영웅, 남아프리카공화국 제2전투비행대대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박민식)는 “6·25전쟁 당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최전방 기지에서 주요 작전을 수행하며 수많은 전과를 올렸던 남아프리카공화국 제2전투비행대대를 ‘2022년 7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30일 보훈처에 따르면 이 부대는 6·25전쟁에서 부산 수영, 평양, 수원, 진해, 여의도, 횡성, 오산 비행장 등 최전방 기지에 배치되어 주요 작전을 수행했으며, 연 병력 826명이 참전하여 총 12,405회의 출격기록을 수립했다. 이를 통해 적군 전차 40여대와 야포 220여문, 대공포 147문, 보급품 보급소 500여 개소 등을 파괴 및 파손시키는 전공을 세웠다. 6·25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27일, 유엔안보리에서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결의함에 따라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에서 이를 지지, 제2전투비행대대의 파병을 결정했다. 당시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대한민국과 외교관계가 수립되지 않았고, 아프리카 최남단이라는 지리적 여건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병력을 파병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용맹으로 ‘창공의 치타(Flying Cheetahs)’라는 별칭을 얻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제2전투비행대대는 1950년 9월 26일, 대대장 테론(S.V.B. Theron) 중령을 비롯한 206명이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 항을 떠나 11월 5일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에프(F)-51 무스탕 전투기 16대를 미군으로부터 인수한 뒤, 11월 15일 부산 수영비행장으로 이동한 제2전투비행대대는 실제 전투 임무를 개시한 1950년 11월 19일부터 정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7월 27일까지 최전방 기지에서 지상군 근접지원, 적 보급로 차단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이 과정에서 36명이 전사했고, 8명이 포로가 되는 희생을 겪기도 했다. 한편, 남아프리카공화국 제2전투비행대대는 6·25전쟁 참전에 따른 공로로 대한민국 무공훈장 11개, 미국 은성훈장 2개를 비롯한 각종 훈장 1,109개, 유엔 훈장 797개 등을 수여받았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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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의 독립운동가, 한인애국단 활약 ‘안경근·이덕주·최흥식’ 선생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공동으로 일제강점기 한인애국단에서 일본군 고위 관료 처단을 위해 군사교육과 의열투쟁을 주도한 ‘안경근·이덕주·최흥식 선생’을 ‘2022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한인애국단은 1920년대 중반 이후 독립운동의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침략의 원흉인 일본군 주요 인물을 처단하기 위해 1931년 김구 선생 주도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결성된 단체이다. 31일 국가보훈처(처장 박민식)에 따르면 ‘안경근 선생’은 안중근 선생의 4촌으로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났으며, 1918년 국내에 가족 모두를 남겨두고 독립운동에 전념하기 위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했다. 선생은 1924년 중국 운남성 곤명의 운남강무학교를 졸업, 만주 정의부에 참가하고 황포군관학교 교관으로도 근무하면서 군사 인재를 양성했다. 1931년 한인애국단에서는 윤봉길의사 의거 이후 일제의 독립유공자 탄압을 피해 김구 선생 신변을 보호했다. 선생은 1926~27년(황포군관학교 교관), 1934년(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황포군관학교 전신)에 걸쳐 조국 독립을 위해 꼭 필요한 군사인재를 양성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선생으로부터 교육을 받은 졸업생들은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대 창설의 핵심 세력이 되어 무장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이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에서 군사위원회를 조직(1937년 7월), 선생은 군사위원으로 선임되어 항일운동을 펼쳤다. ‘이덕주 선생’은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나, 20세에 조국 독립을 위해 단신으로 상하이로 망명했다. 이후 대한교민단 산하 의경대, 상해한인독립운동청년동맹, 상해 한국독립당, 상해 한인청년당에 가입하여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던 중 1932년 3월, “조선총독을 처단해야 한다”는 김구 선생의 지령을 받고 황해도 신천에 도착했다. 일본 경찰의 경계가 삼엄해 김구 선생에게 도움을 요청, 김구 선생은 유진식을 국내로 파견했다. 그러나, 유진식과 함께 조선총독 처단 의거 준비를 하던 선생은 평소와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을 수상히 여긴 신천경찰서 경찰에 의해 체포, 취조 중 조선총독 처단 계획이 발각되면서 의거는 불발됐다. 선생은 1932년 7월 해주지방법원에서 ‘살인예비, 치안유지법, 총포 화약류취체령 위반’으로 징역 7년형을 선고 받았다. ‘최흥식 선생’은 서울에서 태어나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각종 행상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다 20세에 귀향, “큰 포부와 위대한 뜻을 품고 죽음으로써 3천만 백성을 고통과 압박에서 구해낼 생각”을 갖고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 망명을 결심했다. 선생은 상해 도착 후, 윤봉길 의사가 취직했던 종품공사에서 1931년 12월부터 3개월 정도 근무하던 중, 한인애국단 숙소를 사용하면서 한인애국단과 인연이 시작됐다. 선생은 “1932년 5월 26일부터 30일까지 리튼(Lytton) 조사단(만주사변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국제연맹이 영국의 리튼을 위원장으로 하여 파견한 조사위원회)이 대련에서 현지 조사 일정이 있는 만큼, 국제적인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대련에 있는 관동군 사령관, 남만주철도 총재 등 일제 고위 관료를 처단해야 한다”는 김구 선생의 지령을 받았다. 선생은 1932년 5월 26일 오후 7시 40분, 리튼(Lytton) 조사단 일행이 대련역에 도착한다는 사실을 확인, 대련으로 나오는 관동군 사령관과 남만주철도 총재를 유상근과 함께 처단하기로 했다. 만약 의거가 실패할 경우, 조사단이 대련을 떠나 다음 행선지로 이동하는 5월 30일 오전 9시 두 번째 의거도 계획했다. 하지만, 선생이 대련의거 준비 과정에서 중국 상해로 보낸 전보를 상하이 주재 일본총영사관에서 의심하여 수취인(곽윤-김구 선생이 편지 등을 통해 주요 정보를 주고받을 때 사용하는 이름)을 확인한 뒤, 관동청에 발신인 체포를 요청하면서 거사일 이틀 전 일본경찰에 의해 체포, 의거를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선생은 대련법원에서 징역 10년 형을 선고 받고, 여순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들 세 분의 선생은 한인애국단 소속으로 특수정보를 수집하여 의열투쟁을 지원했고, 본인의 안위보다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초개(草芥)같이 버리신 분들이다. 정부는 선생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안경근 선생에게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이덕주 선생은 1990년, 최흥식 선생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각각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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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의 6·25 전쟁영웅, 최용덕 대한민국 공군 중장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박민식)는 제2대 공군참모총장으로 6·25전쟁에서 활약한 ‘최용덕 대한민국 공군 중장’을 ‘2022년 6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31일 보훈처에 따르면 최용덕 공군 중장(1898.9.19.~1969.8.15.)은 6·25전쟁 당시 공군사관학교장으로 재직하며 김포기지 방어를 위해 김포지구 경비사령부를 편성, 적군과 대치하였으며, 이 외에도 항공기지사령관과 작전참모부장으로서 임무를 수행했다. 또한, 제2대 공군참모총장에 취임하여 휴전이 될 때까지 작전을 지휘하는 것은 물론 대한민국 공군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최용덕 중장은 1898년 9월 19일 서울 성북동에서 태어나 봉명학교에서 근대 교육을 받고, 경술국치 이후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2년 동안 숭실중학교를 다니며 중국어와 새로운 사상을 익히고 접했다. 1916년 중국 육군군관학교에 입교하여 교육을 받고, 중국군 초급장교로 군 생활을 시작한 그는 3·1운동 직후 중국군에서 나와 의열단에 가입하고 의열단 활동의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다. 1920년 중국 보정항공학교에 입교하여 전투기 조종사로 성장한 최용덕 중장은 독립운동에 참여함과 동시에 중국 공군으로 복무하며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광복군 총무처장과 참모처장 등을 지내며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며, 해방 후 귀국해 공군 창설에 헌신했다. 1948년 창설된 육상경비대 항공사령관에 임명되어 항공 분야의 발전과 요원 양성에 이바지한데 이어, 국방차관으로 국군조직법을 초안해 공군 독립의 토대를 마련했다. 6·25전쟁 직전 공군사관학교장에 보임된 그는 개전 당시 김포지구 경비사령부를 편성, 김포기지 경비와 북한군의 김포반도 상륙 저지에 나섰다. 1952년 12월, 제2대 공군참모총장으로서 동해안의 전략요충지인 351고지의 근접항공지원작전을 주도해 적의 위협을 제거하는 등 대한민국 공군의 우수성을 세계에 떨친 여러 작전을 이끌었고, 1953년 3월 13일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1956년 공군 중장으로 예편한 그는 체신부 장관과 중화민국 대사를 지냈고, 1969년 8월 15일 광복절 자택에서 영면하였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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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2022년 5월의 호국인물, ‘김지섭 의사’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은 2022년 5월의 호국인물로 ‘김지섭 의사’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전쟁기념관에 따르면 김지섭 의사(1884.7.21.~1928.2.20.)는 1884년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풍북면 오미동(現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에서 태어났다. 공립 상주보통학교 교원으로 근무했던 그는 집안 족형 김응섭의 영향으로 진로를 바꿔 재판소 통역관 시험에 합격, 1909년 금산구(錦山區)재판소 통역관보 겸 서기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일본에 의해 대한제국의 국권이 피탈되고, 각별한 관계였던 금산군수 홍범식이 나라를 되찾으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자, 1913년 모든 직을 내려놓고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뒤 중국으로 망명한 김지섭 의사는 1922년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다. 가입 이후 총독부 등 조선 내부의 식민통치기관 및 주요 인사를 공격하기 위해 폭탄을 경성으로 반입하였으나 아쉽게도 경찰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이외에도 거사를 위한 군자금 모금 등 활발한 투쟁 활동을 벌였다.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인들이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한국인들을 학살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고 격노한 김지섭 의사는 일본 본토를 직접 타격하기로 결심했다. 이에 의열단원들과 일본 제국 의회 개회 중 폭탄을 투척하기로 결의하고 직접 의거를 자청하였다. 12월 20일 수류탄과 여비를 건네받고 일본으로 밀항한 김 의사는 10일 뒤 후쿠오카에 도착하여 이듬해 1월 3일 기차를 타고 도쿄로 향했다. 그러던 중 의회가 휴회하였다는 소식을 접하자 곧 목표를 일본 왕궁으로 변경하였다. 1월 5일, 궁성이 있는 히비야로 향한 김지섭 의사는 해가 지자 궁성 정문 니주바시에 폭탄을 투척하였다(니주바시 투탄 의거). 그러나 폭탄을 지하에 오래 보관한 탓에 습기가 들어 뇌관이 작동하지 않았고, 급박한 나머지 다른 폭탄도 안전핀을 뽑지 못한 채 던졌다. 현장에서 체포된 김지섭 의사는 1925년 8월 12일 공소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치바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투옥된 지 4년만인 1928년 2월 20일 순국하였다. 유해는 화장되어 고향에 안장되었다가 광복 후 사회장으로 경북 예천군 호명면 직산리로 이장되었으며 2004년 11월 2일 대전국립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김지섭 의사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공로훈장 복장(現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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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의 6·25 전쟁영웅, 송태호 대한민국 육군 하사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황기철)는 6·25전쟁에서 결사대를 이끌고 아군 진지를 사수한 ‘송태호 대한민국 육군 하사’를 ‘2022년 5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29일 보훈처에 따르면 송태호 하사(1930.11.24.~1953.6.12.)는 6·25전쟁 당시 제1사단 제15연대 수색중대 제1소대에서 소총수로 복무하던 중 1952년 10월 6일 중공군이 연천 북쪽 임진강 북안의 고양대 부근 니키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인해전술로 공격을 감행하자 결사대를 이끌면서 진지를 사수하는데 기여했다. 송태호 하사는 1951년 6월 1일 육군에 입대하여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에 참여했으며, 1952년 10월 1일 고양대 일대에 투입되었다. 그러던 중 1952년 10월 6일, 중공군은 추계공세의 개시와 함께 아군의 제15연대 방어선 정면에 포격을 시작한 뒤, 저녁 무렵 중공군 1개 대대가 송 하사가 소속된 수색중대 제1소대가 지키던 니키고지를 공격했다. 이에 송태호 하사를 비롯한 소대원들은 화력을 집중해 적을 저지하며 동굴호에 집결, 중공군을 진지로 끌어들여 진내사격으로 섬멸하고자 했다. 동굴 속에 엄폐한 소대가 진내사격을 요청했으나, 무선이 실패하자 부득이 결사대를 편성했다. 이후 송태호 하사 등 4명의 결사대가 수류탄을 던지며 동굴 입구로 돌진하던 순간, 중공군이 설치한 폭약(TNT, 강력한 폭발력을 가진 화약)이 폭발하면서 흙더미에 파묻혔다. 잠시 후 의식을 차린 송태호 하사 등은 대검으로 흙더미를 파헤치고 빠져나와 신호탄을 쏘아 올렸고, 곧이어 아군 중대가 역습을 가하여 적을 격퇴함으로써 진지를 사수할 수 있었다. 송태호 하사는 이러한 공적으로 1952년 11월 화랑무공훈장을 수여받았지만, 정전협정을 불과 한 달여 앞둔 1953년 6월 12일 서부전선의 무명고지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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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의 독립운동가, 근우회의 창립을 주도하고 항일운동을 전개한 ‘박원희·김영순·조복금’ 선생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공동으로 민족 통합적 여성단체인 근우회 창립을 주도하고 민족차별에 맞서 항일운동을 전개한 박원희·김영순·조복금 선생을 ‘2022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근우회는 신간회 자매단체로 민족계와 종교계, 사회주의계의 여성을 통합하여 ‘한국 여성의 단결, 지위향상 및 항일운동’을 위해 조직된 단체로, 일제의 탄압에도 각종 강연회나 토론회를 통해 여성계몽활동, ‘광주학생운동’ 등 여학생운동 지원 및 여성 근로자 임금 차별 철폐 등의 지원활동을 전개했다. 29일 보훈처(처장 황기철)에 따르면 박원희 선생은 대전에서 태어나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3년간 유학 후 귀국, 1924년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주의 여성단체인 ‘여성동우회’를 조직하고 활동했다. 이후 1926년, 근우회 탄생의 밑거름이 되었던 중앙여자청년동맹을 조직한 뒤, 선생을 포함한 각계각층의 지식 여성 40명이 발기인단이 되어 1927년 4월 26일 개최된 근우회 발기총회에서 21명의 준비위원에 선임되었다. 1927년 5월 27일 YMCA 강당에서 회원 150명, 방청인 1,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된 근우회 창립총회에서 집행위원(21명)으로 선출된 선생은 근우회 집행위원회 교양부원으로 활동했다. 교양부 활동의 핵심은 여성들의 교양을 위한 강연 활동과 계몽운동이었다. 특히, 1927년 10월 ‘특수환경에 처한 조선여성의 사명’이라는 주제로 진행된 강연에서 일제의 경제 침탈과 조선의 대책 마련을 촉구하던 중 일본 경찰에 의해 중지당하고 경찰서에 연행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김영순 선생은 서울에서 태어나 정신여학교를 졸업했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1919년 결성된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에 가입, 서기에 선임되어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조직 간부가 조선인 경찰에 밀고하여 1919년 11월 일본 경찰의 조사로 실체가 드러나면서 체포되어 1920년 2월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박원희 선생과 함께 근우회 발기총회에서 준비위원, 근우회 창립총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회원모집 역할을 수행하여 근우회 전국 60여 개의 지회 설립에 기여했다. 또한 근우회 집행위원회 교양부원으로 편집부와 학생부 설립 운영, 근우회 선전일의 책자 제작·보급, 근우회 지회 설치를 위한 강연회 활동 등을 통해 여성의 지위 향상과 조국의 독립을 위해 힘썼다. 조복금 선생은 1911년 하동에서 태어나 진주여자잠업강습소를 졸업, 1928년 3월 하동청년동맹여자지부 정기대회에서 서무재정부 역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그해 7월 하동지회 설립을 주도하여 서무재정부를 맡게 되었다. 1929년 3월 제2회 정기대회에서 대의원으로 선출되어 정치연구부를 맡아 활동했으며, 1930년 4월 근우회 하동지회의 전국 대의원에, 6월에는 하동청년동맹 집행위원 겸 여자부장으로 선출되는 등 하동지역의 여성운동과 항일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그러나 1931년 일제의 직·간접적인 탄압으로 중앙 근우회가 해체되면서, 하동지역 근우회도 자연스럽게 해체되었다. 이후 선생은 부산에 있는 조선방직회사 직공이 되어 노동항일운동에 참여했고, 1931년 6월 ‘노동자(勞動者)’라는 신문과 격문을 인쇄하여 각 공장의 노동자에게 배포했다. 이 사건으로 부산경찰서에 연행되었고, 8월에는 일명 ‘부산적색노동조합협의회’ 사건으로 송치되어 ‘출판법, 보안법,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이들 세 명의 선생은 당시 차별적인 여성문제를 인식하고 ‘여성 지위향상’이라는 한국근대여성운동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했으며, 일제의 탄압과 민족적 차별에 맞서 투쟁한 대한민국 여성의 상징이었다. 정부는 선생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박원희 선생은 2000년, 김영순 선생은 1990년, 조복금 선생은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각각 추서하였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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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2022년 4월의 호국인물, ‘윤봉길 의사’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은 2022년 4월의 호국인물로 ‘윤봉길 의사’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전쟁기념관에 따르면 윤봉길 의사(1908.6.21.~1932.12.19.)는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태어났다. 신문과 잡지 『개벽』 등을 통해 농촌계몽운동의 필요성과 민족의식, 식민 통치 저항정신을 함양한 윤 의사는 1929년 직접 야학을 열어 주민들에게 한글과 신학문을 가르쳤으며, 야학 교재인 『농민독본(農民讀本)』 제작, 농민조합 결성, 농촌진흥을 위한 월진회(月進會) 조직 등을 통해 농촌계몽운동에 힘썼다. 이후 독립운동에 뜻을 두어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을 남기고 중국 망명길에 올랐다. 상하이[上海]에 도착한 윤봉길 의사는 김구를 만나 독립운동의 뜻을 밝히고 1932년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입단하였다. 이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상하이 사변 전승행사 및 일왕 생일 축하식’이 열린다는 기사가 보도되자 이 날을 거사일로 정했다. 거사 당일 훙커우 공원으로 이동한 윤봉길 의사는 축하식이 시작되고 기미가요 합창이 끝날 무렵 단상으로 준비한 폭탄을 던졌다(훙커우 공원 투탄 의거). 이 투탄 의거로 상하이 일본 거류민단장 가와바타 테이지[河端貞次], 일본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가 사망하고 주중 일본 총영사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 9사단장 우에다 켄키치[植田謙吉] 등이 중상을 입었다. 현장에서 체포된 윤봉길 의사는 5월 25일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2월 19일 가나자와[金沢] 미츠코지산[三小牛山] 육군작업장에서 순국했다. 그의 유해는 가나자와 공동묘지 관리사무소 앞 좁은 통로에 암장되었다가 광복 후 이봉창·백정기 의사 유해와 함께 고국으로 봉환되어 효창공원 삼의사묘역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윤봉길 의사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現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1968년 덕산에 충의사를 건립하고, 1988년 서울 양재동 시민의 숲 공원에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을 건립하여 윤봉길 의사를 추모하고 그 뜻을 계승하고 있다. 중국에서도 1994년, 의거가 일어난 루쉰공원 내에 기념관 ‘매헌(梅軒)’을 건립하였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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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의 독립운동가, 신민회 주역인 ‘안태국 선생’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공동으로 안태국 선생을 ‘2022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처(처장 황기철)에 따르면 안태국 선생(1877∼1920)은 신민회 활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만주(북간도 혼춘)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으며, 3․1만세운동 이후 상하이로 와서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나, 1920년 4월 고문 후유증 등으로 병사하였다. 신민회는 1907년 4월, 안창호의 발기로 양기탁, 이동휘, 유동열 등 7인의 창건위원과 노백린, 안태국, 이시영, 이회영, 신채호, 박은식 등이 중심이 되어 서울에서 조직된 비밀결사 단체로, 1910년경 회원수가 800여 명에 달할 정도로 당시의 영향력있는 애국계몽가들을 거의 망라한 국권회복운동 단체이다. 1877년 평안남도 중화(현재 평양 부근)에서 태어난 선생은 1907년 안창호, 양기탁, 노백린, 신채호 등과 함께 애국계몽운동 단체인 신민회를 조직하고, 최고위 간부인 평안남도 총감(평양이 속해 있어 서울 총감 다음의 직위로 신민회에서 세력이 막강했음)에 임명되어 1911년 해체 시까지 4년여간 국권 회복에 힘썼다. 당시 신민회 기관지 역할을 한 「대한매일신보」 평양지사장을 겸임하던 선생은 1909년 애국계몽운동을 활발히 전개하기 위해 태극서관(서적의 출판과 보급을 목적으로 설립된 서점)을 설립하였고, 신민회의 외곽조직인 청년학우회 발기인으로 초대 총무에 선임되었다. 일제가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거 이후 신민회 간부들을 탄압하기 시작하자, 신민회에서는 지역 총감이 참석하는 전국 간부 회의를 통해 독립운동 근거지를 해외에 건설하기로 하고 군자금과 이주민 모집사업을 실행하였다. 1910년 11월 ‘안명근 사건(일명 안악사건, 안명근 등이 황해도에서 무관학교 설립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된 사건)’ 조사 과정에서 신민회가 간도에 독립군 기지와 무관학교 설립을 계획하고 있다는 단서를 잡은 일제는 이를 저지하려고 신민회 간부들을 체포하였는데, 이때 선생도 보안법 위반으로 붙잡여 1911년 7월에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일제는 이 사건을 ‘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사건(일명 105인 사건, 이하‘음모사건’)’으로 조작하여 전국에 걸쳐 신민회 간부 600여 명을 검거하여 기소하였는데, 선생도 복역 중 가혹한 고문을 당하며 재 기소되어 1912년 9월에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선생은 공판 중에 정확한 기억과 물증까지 제시하며 음모사건이 날조된 것임을 논리정연하게 폭로하여 일제 재판부를 궁지에 몰아넣는 완강한 공판투쟁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1913년 7월 항소심에서 징역 6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그리고 투옥된 지 5년 만에 석방된 선생은 가혹한 고문과 감옥 생활로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1916년 가족들을 이끌고 북간도 혼춘으로 이주하여 새 근거지를 마련하고 독립운동을 다시 시작하였다. 선생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혼춘지방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고 후배들과 한민회를 창립하였고, 그 산하에 결사대원을 모집하여 한민회군을 창설하였다. 이후 한민회군은 청산리전투에도 참가하여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선생은 안창호의 초청으로 1920년 3월 상하이 임시정부로 갔으나, 임시정부의 요직은 고사하고 북간도 지역 독립운동에 매진할 뜻을 밝혔다. 안창호가 이를 받아들여 선생을 대한민국임시정부 특파원으로 임명하여 파견하는 것으로 결정하였으나, 애석하게도 1920년 4월 46세를 일기로 고문 후유증 등으로 병사하고 말았다. 선생의 장례식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거행되었고, 상하이 인근 외국인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문화대혁명기에 만국공묘(1910∼1930년대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들이 안장되었던 묘지)로 이장되었다. 정부는 조국 독립을 위해 위국헌신한 선생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한편, 만국공묘에 안장되었던 선생의 유해는 1993년 8월, 광복 48년 만에 박은식․노백린․신규식․김인전 선생과 함께 대한민국으로 봉환되어, 서울현충원 현충문 앞에서 각계인사, 외교사절, 시민 등 6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국민제전으로 영결식을 거행하고 애국지사묘역에 모셔졌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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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의 6·25 전쟁영웅, ‘무자페르 에르된메즈 터키 공군 중위’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황기철)는 ‘2022년 4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무자페르 에르된메즈 터키 공군 중위(Muzaffer Erodönmez, 1922.11.25.~1951.4.21.)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31일 보훈처에 따르면 무자페르 에르된메즈 중위는 6・25전쟁 당시 미 제5공군 제729폭격대대에 배속되어 B-26 인베이더(Invader) 폭격기 조종사로 참전하여 북한 지역에 대한 폭격 임무를 수행하였고, 1951년 4월 21일에 교량 파괴 임무를 받고 평안남도 순천군 북동쪽의 철도를 폭격하던 중 적의 대공포탄에 기체가 피격되어 전사하였다. 무자페르 에르된메즈 중위는 1922년 11월 25일 터키 이스탄불에서 출생하였고, 1941년 부르사 군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터키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였다. 그 후 1943년 소정의 교육을 마치고 소위로 임관하였고 1947년 중위로 진급하였다. 무자페르 에르된메즈 중위는 1950년 9월 6·25전쟁에 참전한 터키여단의 일원이자 전방 항공통제 임무를 부여받은 2명의 공군 장교 중 한명이었다. 그는 전방항공통제관으로 복무하면서 조종사로 참전하기를 원했는데, 1951년 1월 미 극동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미 제8군사령부에 배속됨과 동시에 제452폭격전대 예하 제729폭격대대에 배치되었다. 1951년 2월부터 B-26 인베이더(Invader) 폭격기를 조종한 그는 북한 중부와 동북부 지역 적군에 대한 맥아더사령관의 공격 명령에 따라 2월에 1회, 3월에 15회, 4월에 9회 출격하였다. 1951년 4월 21일 교량 파괴 임무를 받고 평안남도 순천군 북동쪽의 철도를 폭격하던 그는 적의 대공포탄에 기체가 피격되어 원창리 북쪽 3km 지점에 추락해 전사하였다. 무자페르 에르된메즈 중위는 이러한 공적으로 1951년 5월 미(美) 공군 수훈장(Air Medal)을 수여 받았고, 자국인 터키 외에서 전사한 터키 공군 최초의 조종사였다. 한편, 황기철 국가보훈처장은 4월 1일(터키 현지 시각) 터키 수교 65주년을 기념하고 한국전 참전용사 위로・감사를 위해 현지를 방문하는 일정 중에, 무자페르 에르된메즈 중학교(이스탄불 소재로 에르된메즈를 기념하기 위해 학교의 명칭을 정함)를 방문하여 학교에 설치된 무자페르 에르된메즈 동상에 헌화·참배를 하고, ‘6·25 전쟁영웅 선정패’를 전달할 예정이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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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2022년 3월의 호국인물, ‘장인환 의사’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은 2022년 3월의 호국인물로 ‘장인환 의사’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전쟁기념관에 따르면 장인환(1876.3.10.~1930.5.22.) 의사는 1876년 3월 10일 평안남도 평양군 대동면 선교리에서 태어났다. 1904년 하와이로 이민을 떠난 장 의사는 1906년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이주, ‘상항(上港, 샌프란시스코) 한인연합감리교회’ 창립에 참여하고, 1907년 한인 독립운동단체인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의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08년 3월, 대한제국 외교 고문으로서 을사늑약 등을 체결하는데 일본을 도운 더럼 W.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이 미국으로 귀국하여 ‘일본의 한국 지배는 한국에 유익하다.’라는 발언을 하였다. 이에 샌프란시스코 지역 한인들이 항의하며 발언 철회와 사과를 요구하였으나, 스티븐스는 사과는커녕 ‘한국의 인민은 우매하여 독립할 자격이 없다.’라는 등의 망언을 늘어놓았다. 이에 장인환 의사는 스티븐스를 처단하기로 결심했다. 1908년 3월 23일 스티븐스이 워싱턴으로 이동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 페리빌딩에 도착하자 장 의사는 거사를 준비하였으나 마찬가지로 스티븐스 처단을 준비한 전명운 의사가 먼저 스티븐스를 저격하였다. 그러나 전명운 의사는 권총이 불발되자 스티븐스과 격투를 벌였다. 이 광경을 목격한 장인환 의사는 권총으로 스티븐스를 저격하였다(스티븐스 저격 의거). 장인환 의사의 저격에 치명상을 입은 스티븐스는 이틀 후 탄환제거 수술을 받던 중 사망했다. 체포된 장인환 의사는 미국 법정에서 25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동포사회의 끈질긴 석방운동과 모범적인 수형생활로 10년만인 1919년 1월 가석방되었다. 가석방 후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부회장, 민립대학후원회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등 조국의 독립을 위해 분주히 활동하였다. 1927년 평양으로 귀국하여 고아원을 운영하다가 다시 미국으로 귀환하였다. 장 의사는 1930년 5월 22일 샌프란시스코 병원에서 지병을 치료하던 중 타계하였다. 장인환 의사의 유해는 동포사회장으로 샌프란시스코 근교 사이프러스 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75년 국내로 봉환되어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묘역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장인환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공로훈장 복장(現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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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의 독립운동가, 군산 3·5만세운동을 주도한 ‘이두열·고석주·김수남·윌리엄 린튼 선생’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공동으로 호남 최초 만세운동인 군산 3·5만세운동의 주역인 ‘이두열·고석주·김수남·윌리엄 린튼 선생’을 ‘2022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28일 국가보훈처(처장 황기철)에 따르면 군산 3·5만세운동은 호남지역 최초의 만세운동으로 당시 만세운동에 참여한 인원만 3만 7,000여 명에 달하였고, 사망 및 부상자 등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을 뿐 아니라 이후 전북 곳곳에서 28회에 걸쳐 만세운동이 일어나게 된 촉매제 역할을 하였다. 3․1운동 소식을 들은 영명학교 교사 이두열 선생과 구암교회 부속여학교 교사 고석주 선생은 호남지역 최초로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고, 만세운동이 이루어진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우선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예수병원에 근무하는 직원들, 교회 신자들, 선생들에게 교육을 받아 민족의식을 가졌던 학생들의 독립만세운동 참여를 이끌어냈다. 거사일을 3월 6일 장날로 잡고 학생들과 함께 영명학교에서 비밀리에 독립선언서 수천장을 인쇄하는 등 차근차근 준비하던 만세운동은 거사 직전, 낌새를 눈치챈 일본 경찰의 급습으로 두 분의 선생과 학생들이 체포, 연행되면서 거사가 좌절될 위기에 처했다. 그 순간, 이를 본 학생간부 등은 긴급회의를 열어 3월 6일로 예정되어 있던 만세운동을 3월 5일로 앞당겼다. 학생, 예수병원 사무원, 교회 신자들은 함께 남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뿌리며 만세를 외쳤고, 거리에 있던 많은 인파가 이 대열에 합세하여 체포된 교사와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군산경찰서까지 나아갔다. 위기를 느낀 일본 경찰은 익산에 주둔하던 헌병대까지 동원하여 만세운동 참가자들을 탄압하였고, 이두열 선생은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죄로 징역 3년을, 고석주 선생도 같은 죄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모진 고초를 겪어야 했다. 당시 노동일에 종사하던 김수남 선생은 동료 이남률 등과 함께 일제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독립운동에 방해가 되는 친일교육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영명학교의 3·5만세운동 이후 군산공립보통학교 일본인 교장과 교사들의 학생 감시와 단속은 더욱 심해졌고, 이런 가운데 3월 14일 학생 70여 명이 동맹하여 연서로 퇴학원을 제출하며 항거했다. 일본인 교장과 교사들은 학부형을 소환하여 끈질긴 회유와 협박으로 이를 방해하였다. 이를 지켜본 선생은 독립운동에 방해만 되는 친일학교인 군산공립보통학교를 불태워 버리기로 결심했다. 선생은 이남률과 3월 23일 밤 11시에 학교에 들어가 건물 동남쪽 출입구에서 불을 붙였고, 맹렬히 타들어가 학교 건물 1개 동을 전소시켰다. 친일교육의 상징이던 군산공립보통학교를 불태워 조국독립의 열망을 표현했던 선생은 방화죄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모진 옥고를 치렀다. 영명학교에서 교육선교를 시작했던 윌리엄 린튼 선생은 미국으로 돌아가 일제의 잔학한 식민통치와 한국인들의 저항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한국독립의 필요성과 지원을 역설하였다. 1912년 22살의 최연소 나이에 선교사로 한국에 온 선생은 교육선교 1년 만에 한국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여, 한글로 성경을 가르치고 영어도 가르쳤다. 1917년 전임 선교사가 한국을 떠나면서 선생은 영명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선생은 군산 3·5만세운동 당시 교사들과 학생들의 준비를 묵인하고 은밀히 지원도 하였다. 하지만 일제가 군산에서 발생한 만세운동 참가자를 잔혹하게 탄압하고 고문하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이후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돌아간 선생은 애틀랜타에서 남장로교 평신도 대회에서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 애틀랜타 저널에 ‘한국인들이 어떻게 자유를 추구하는지에 대한 애틀랜타인의 증언’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의 상황을 기고하는 등 지속적으로 한국독립의 필요성과 지원을 주장하였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전주 신흥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던 선생은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신흥학교가 폐교하기에 이르렀고, 선생도 1940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되었다. 군산 3·5만세운동은 영명학교 교사들과 학생들이 계획하고 노동계와 종교계가 조직적으로 전개한 전 민족적, 전 민중적 운동으로 자주독립을 꿈꾸는 우리 민족의 염원과 저항정신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정부는 선생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이두열 선생과 고석주 선생에게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김수남 선생에게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그리고 윌리엄 린튼 선생에게는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각각 추서하였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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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의 6‧25 전쟁영웅, ‘강두형 육군 준장’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황기철)는 ‘2022년 3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강두형 육군 준장’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28일 보훈처에 따르면 강두형 육군 준장(1930.3.12.~1977.3.28.)은 6·25전쟁 기간인 1952년 10월 15일, 국군 제2사단 제17연대 제2대대장으로 직접 증원소대를 지휘해 적의 공격을 무릅쓰고 최전방에서 부하들을 독려하며 저격능선 상 ‘A고지’를 탈환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강두형 준장은 1930년 3월 12일 충청남도 보령에서 출생하였고, 1948년 육군사관학교 제7기를 거쳐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6·25전쟁 기간인 1952년 10월 14일 새벽 5시 국군 제2사단은 강원도 오성산 남쪽 중공군 전초인 저격능선을 공격하였다. 첫 공격에서 국군 제2사단 제32연대 제3대대는 저격능선을 탈취했으나, 그날 밤 오성산 일대 적의 역습으로 5시간 만에 빼앗기게 되었다. 10월 15일에 제17연대 제2대대장인 강두형 소령(당시 계급)은 전날 중공군의 공격으로 빼앗긴 저격능선 상 ‘A고지’를 공격하여 재탈환하고 그날 밤 적군의 반격을 받아 8시간 밀집 방어를 시도했지만, 다시 빼앗겼다. 이에, 강두형 소령은 예비중대의 1개 소대를 차출해 반격에 나섰지만, 소대가 적의 집중 사격을 받아 분산되고 소대장마저 부상을 입게 되자, 대대장인 강 소령이 직접 증원소대를 지휘해 적의 사격을 무릅쓰고 최전방에서 부하들을 독려하였다. 그 과정에서 적의 소총과 포탄 및 박격포 포격에 노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적군과 교전하여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혔고, 강 소령의 몸을 아끼지 않는 지휘력과 용기에 힘입어 대대는 16일 새벽에 ‘A고지’를 결국 재탈환하였다. 강두형 준장은 이러한 저격능선 전투에서의 공적으로 1953년 9월 미(美) 은성훈장을, 이에 앞서 6·25전쟁 중의 공적으로 정부로부터 을지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을 수여 받았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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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2022년 2월의 호국인물, ‘전명운 의사’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은 2022년 2월의 호국인물로 ‘전명운
의사’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전쟁기념관에 따르면 전명운 의사는 1884년 6월 25일 한성부 명례방 종현(現
서울시 중구 명동 천주교성당 부근)에서 태어났다. 1903년
미국으로 이민, 하와이에 정착하였다가 1년 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한 전 의사는 안창호를 중심으로 설립한 애국계몽운동 단체인 공립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08년 3월, 대한제국 외교 고문으로서 을사늑약 등을 체결하는데 일본을 도운 더럼 W.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이 미국으로 귀국하여 ‘일본의
한국 지배는 한국에 유익하다.’라는 발언을 하였다. 이에
샌프란시스코 지역 한인들이 항의하며 발언 철회와 사과를 요구하였으나, 스티븐스는 사과는커녕 ‘한국의 인민은 우매하여 독립할 자격이 없다.’라는 등의 망언을 늘어놓았다.
이에 전명운 의사는 스티븐스를 처단하기로 결심하고 1908년 3월 23일 권총을 준비하여 샌프란시스코 페리빌딩에서 스티븐스를 향해
권총을 발사했다. 그러나 권총이 불발되자 스티븐스의 얼굴을 가격하며 격투를 벌였다. 이때 역시 스티븐스를 저격하기 위해 기다렸던 장인환이 그를 향해 권총을 발사해, 스티븐스는 이틀 후 사망했다. 정명운 의사는 장인환과 함께 체포되었으나
동포사회의 끈질긴 석방운동을 통해 6월 27일 무죄 석방되었다.
이후 일제의 감시를 피하고자 이름을 맥 필즈(Mack Fields)로
개명한 전 의사는 1908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하여 최재형,
안중근이 활동한 동의회(同議會)에 참가하였으며, 미국 한인 독립운동단체인 국민회(國民會)의 특파원으로 활동하였다.
1909년 미국으로 돌아온 후, 대한인국민회(前 국민회) 활동을 계속하던 중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전시봉사회를 조직하고, 한인국방경위대(韓人國防警衛隊, The Korean Brigade)에 참여하여 조국의 독립에 이바지하고자 했다.
전 의사는 1947년 11월 18일 미국에서 타계하여 미국 로스앤젤레스 위티어 천주교 묘지에 안장되었다. 이후 1994년 국내로 유해가 봉환되어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정명운 의사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공로훈장 복장(現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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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의 독립운동가, 좌우통합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한 ‘강기덕 선생’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공동으로 ‘강기덕
선생’을 ‘2022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28일 국가보훈처(처장
황기철)에 따르면 ‘강기덕 선생’은 3·1운동을 시작으로 신간회에 이르기까지 국내에서 다양한 독립운동을
했고, 광복 이후에도 남북분단을 막기 위해 노력하는 등 평생 조국을 위해 헌신하신 분이다.
선생은 1886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났으며,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48명 중의 한 명(학생대표, 보성법률상업학교
재학 중)으로 독립선언서를 각 학교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2차
시위(3월 5일)에서
깃발을 흔들며 군중의 선두에서 만세를 부르다 일경에 체포되어 1년 6개월
옥고를 치렀다.
1921년 11월 만기 출소하여 고향인 원산에서 인쇄업에 종사했으나, 1924년 3월경 원산 보광학교 3·1운동 5주년
기념 인쇄물을 제작하며 3·1운동 정신을 계승하고자 했다.
또한 선생은 조선농민의 참담한 현실을 강조하며 경작제도의 문제를 개선하여 농민들의 수입증진을 위한 연설을 했다는
이유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일경에 체포되어 6개월 옥고를 치렀다. 출소 후 선생은 신간회 원산지회 발기인회에 참여하여 설립준비위원과 상무위원을 맡았고, 1927년 7월 11일
신간회 원산지회 설립대회에서 간사로 선임되었다.
‘신간회’는 1927년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세력이 합작한 좌우연합 항일 독립운동 단체로, 일제강점기
가장 규모가 컸던 사회운동 단체이다.
선생은 신간회 활동을 하면서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대책 마련과 신문지법 중단을 촉구하였고, 소작쟁의에 관한 불량지주의 죄악 조사를 요구하는 함남기자 연맹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8개월을 선고받기도 했다.
1929년 11월 만기
출소하여 원산지회 지회장에 선임된지 얼마 되지 않아, 원산 학생들이 일으킨 일제 반대 시위에 연루되어 1930년 2월 또다시 구속되었다가 풀려났다.
1931년 이후 선생은 원산노동조합 간부로서 노동조합의 재건 운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1933년 또다시 징역 1년 2개월 옥고를 치렀고, 1935년 만기 출소했다.
광복 이후에는 신탁통치 반대 국민총동원 위원회 중앙위원을 맡아 통일정부수립을 위해 노력하였지만 안타깝게도 꿈을
실현시키지 못하였고, 6·25전쟁 중 납북되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강기덕 선생에게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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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의 6·25 전쟁영웅, ‘여성의용군’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황기철)는 ‘2022년 2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여성의용군’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28일 보훈처에 따르면 6‧25전쟁 당시 대한민국 여성들은 위기에 처한 조국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 국방의 의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보상과 대가를 바라지 않고 오직 호국정신과 나라사랑 정신으로 참전했다.
대한민국 여성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입대하여 전투 활동을 비롯해 간호,
정훈, 심리전, 행정 및 전투 근무지원 등을
수행했으며, 군에 입대하지 않은 여성들은 학도의용군, 철도근속, 간호요원, 예술대원 등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먼저, 육군은 여성의용군 배출을 위해 1950년 9월 여자의용군교육대를 창설했는데, 이들은 국방부 및 육군본부를 비롯하여 여군훈련소, 전방 군단·사단 그리고 정훈대대, 정보 및 첩보부대, 예술대, 경리‧통신‧병기‧보급부대 등 전후방 각급 부대에 배치되어 전투
및 전투지원 임무를 수행했다.
해병대 여군은 6‧25전쟁
발발 직후 제주도에서 자원입대한 미혼 여교사와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편성했는데, 이들은 진해 해군통제부와
부산의 해군본부에 배치되어 행정, 보급, 정비, 간호보조, 헌병, 정훈, 통신, 교환 등의 분야에서 전투지원 활동을 했다.
공군 여성항공병은 9‧28서울수복
이후 공군본부 참모부서에 배치되어 행정 보조업무를 수행했는데, 이후 전역을 선택한 일부 인원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기상대 및 통신대에서 계속 근무했다.
6‧25전쟁 이전부터 임관하여
간호업무를 수행해왔던 육군과 해군의 간호장교는 전쟁 발발 후에도 전장을 누비며 본연의 임무를 훌륭히 수행했다.
아울러, 6‧25전쟁 중에는 군번 없는
여성들이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활약이 있었는데, 학도의용군, 민간
간호사, 유격대원, 그리고 군사활동을 지원한 여성들이었다. 이들은 전후방에서 간호활동, 행정지원, 유격활동, 첩보수집, 철도근무, 예술대원 등으로 활동했다.
이러한 여성의용군의 고귀한 희생과 헌신은 창설 72주년이 지난 우리
여군이 육‧해‧공군 및 해병대는
물론이고 유엔평화유지군으로 해외파병 부대까지 배치되어 활동하는 등 자랑스럽고 막강한 모습으로 성장하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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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2022년 1월의 호국인물, ‘이봉창 의사’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은 2022년 1월의 호국인물로 ‘이봉창
의사’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전쟁기념관에 따르면 이봉창(1901.08.10.~1932.10.10.) 의사는 1901년 8월 10일
한성부 용산(현 서울 용산구 원효로)에서 태어났다. 14살 때부터 용산역 역부, 오사카 가스회사 인부 등으로 일했으나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민족차별을 받았다.
1928년 11월 10일 일왕 히로히토의 즉위식을 관람하기 위해 교토로 갔다가 단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11일간 유치장에 구금되었다. 이를 계기로 항일의식을 가지고 독립운동에
투신할 결심을 하였다. 이후 상하이에 독립운동 단체가 있는 이야기를 듣고 1930년 12월 상하이로 갔다.
1931년 1월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 안에 위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간 이봉창 의사는 일왕을 격살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1931년 12월 13일
안공근의 집에서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여 제1호 단원이 되었으며 준비한 폭탄을 받아 12월 17일 상하이를 떠나 고베와 오사카를 거쳐 도쿄로 들어갔다.
1932년 1월 8일 요요기 연병장에서 일왕이 참석하는 관병식이 거행된다는 소식을 듣고 이날을 거사일로 결정하였다. 거사 당일 일왕이 환궁하는 길을 노리고, 도쿄 경시청 정문 현관
앞에서 기다리던 이봉창 의사는 두 대의 마차가 지나가자 두 번째 마차가 일왕이 타고 있다고 판단하여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두 번째 마차 뒤쪽, 마부가 서 있을 수 있는 받침대에 떨어지며
터졌지만, 두 번째 마차가 일왕이 탄 마차가 아닌 일왕을 수행하는 궁내대신의 마차였기에 일왕에게는 피해를
주지 못했다.
현행범으로 체포된 이봉창 의사는 9월 30일 공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1932년 10월 10일 도쿄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그의 유해는 사이타이현 우라와시 우라와형무소 묘지에 매장되었다가 광복 후 윤봉길, 백정기 의사 유해와 함께 고국으로 봉안되어 1946년 7월 6일 효창원 삼의사묘역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이봉창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공로훈장 복장(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2020년에는 용산구 효창동에 이봉창 의사 역사울림관을 건립하여 이봉창 의사의 애국정신을 추모, 계승하고
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