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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전현충원 2020년 6월의 현충인물, 김종벽·이정숙 국가유공자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립대전현충원이 2020년 6월의 현충인물로 ‘김종벽·이정숙 국가유공자’를 선정했다. 국립대전현충원에 따르면 국립대전현충원 6월의 현충인물은 구월산 유격부대의 대장과 여대장인 김종벽·이정숙 국가유공자로 우리 역사에서 국난 때마다 등장한 의병의 전통을 이은 ‘6·25 의병’이다. 김종벽 유격대장은 1914년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났다. 김 대장은 육군본부 정보국 소속으로 6·25전쟁 당시 빈약한 무기로 구월산의 공비와 연일 혈전을 벌이고 있는 고향 청년들을 보고 1950년 12월 7일 반공청년들을 규합해 연풍부대를 창설했다. 구월산 유격부대의 전신인 연풍부대는 현역장교인 김종벽 소령이 지휘함으로써 효과적으로 유격전을 전개할 수 있었다. 민간인을 훈련시켜 적을 교란하고 적진에 침투시키는 등 정규군 못지않은 활약을 했다. 이후 연풍부대는 부대정비와 인근도서 등 각 지역의 청년들을 규합하고 수월부대, 백마부대 등을 흡수해 구월산 유격대로 성장했다. 이정숙 유격대원은 1922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나 1950년 10월 황해도 안악군에서 서하무장대를 조직해 농민군을 진두지휘하며 북한군과 맞서 싸웠다. 이후 구월산 유격대로 합류한 이 대원은 재령유격부대가 적에게 포위되자 촌부로 가장해 100여 리를 밤새 걸어 적의 포위망을 뚫고 89명을 구출하는 등 많은 전공으로 ‘구월산의 여장군’으로 불렸다. 여자 유격대의 상징으로 꼽히는 이정숙 유격대원의 활약상은 1960년대 중학교 교과서에 수록되었고, 최무룡 감독의 영화 ‘피어린 구월산’과 고우영 화백의 만화 ‘구월산 유격대’를 통해서도 생생하게 그려져 많은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죽음의 두려움을 넘어 조국을 지켜낸 김종벽·이정숙 국가유공자에게 대한민국 정부는 각각 충무무공훈장을 추서(2012년 김종벽, 2015년 이정숙 국가유공자)하고,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하여 그 공훈을 기리고 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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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2020년 6월 호국인물, 조달진 육군 소위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이 2020년 6월 호국인물로 ‘조달진 육군 소위’를 선정했다. 전쟁기념관에 따르면 故 조달진(1928.11.18.~2008.10.15.) 육군 소위는 1928년 11월 18일 전라남도 승주군(現 순천시)에서 태어났다. 1949년 8월 입대해 제6사단 제19연대 제3대대에서 근무했다. 6·25전쟁 발발 사흘째인 1950년 6월 28일, 홍천지구 말고개 전투에 참전하여 북한군의 자주포 대열에 매복을 가하여 적 자주포 10량을 파괴하는 대전과를 세웠다. 또 전쟁 초기 북한군 전차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아군의 사기를 높였을 뿐 아니라 6월 30일까지 홍천을 사수해 적의 남침을 3일간 지연하는데 기여했다. 이때의 전공으로 2계급이 특진되었다. 이후에도 1950년 7월 25일, 경상북도 상주군 유곡전투에서 특공대 7명과 함께 4대의 적 전차를 격파하는 등의 큰 공을 세워 ‘불사조’, ‘탱크’라는 별명을 얻었다. 위험천만한 공격을 두 번이나 연이어 성공시킨 그는 한 달 만에 이등상사로 진급한 ‘유명인’이 되었다. 이후 제19연대 수색중대의 선임하사로 근무하며 최전선을 지키다가 휴전 이후인 1955년 2월, 소위 진급과 동시에 예편하였다. 2008년 10월 15일, 향년 80세를 일기로 타계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故 조달진 소위는 1950년 을지무공훈장, 1951년 화랑무공훈장을 수여 받았다. 또 타계 이후인 2011년에 국군 최고의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이 추서되었다. 그리고 한국군 최초로 미국 동성무공훈장(Bronze Star)을 수여받는 영예를 안았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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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의 6‧25전쟁영웅, 장철부 육군 중령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는 ‘장철부 육군 중령’을 2020년 6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 보훈처에 따르면 ‘장철부 육군 중령’은 192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나 1944년 일본 주오(中央)대학교 법학과 재학 중 일본군 학도병으로 끌려가 중국 전선에 투입되었으나, 일본군의 일원으로 싸워야 하는 치욕감을 견디지 못해 2번의 탈출을 시도한 끝에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망명하였다. 자신의 일생을 조국의 독립에 바치기로 결심하고 본명 김병원(金秉元)을 장철부(張哲夫)로 개명하였다. 이 후 한국광복군에 입대해 제1지대 제1구대 유격대장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군사방면에서 독립운동을 체계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김구 선생의 추천으로 중국 황포군관학교 기병과에 입교하여 졸업하였다. 귀국 후 1948년 육군사관학교 5기로 임관한 그는 계속 학교에 남아 중대장, 전술학 교관 등을 지냈으며, 독립기갑연대 창설과 함께 기병대대장으로 근무하다가 6‧25전쟁을 맞게 되었다. 당시 장철부 소령의 기병대대는 경기도 의정부로 출동해 수색작전을 전개한 후 한강 이남으로 철수해 진지를 구축하였고, 6월 29일 한강을 도하하는 북한군 수백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또한, 7월 11일에는 충남 공주에서 북한군 제6사단 1개 대대를 섬멸하는 등 각종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8월 4일 경북 청송지구에서 청송-경주로 진출하려는 북한군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다 중상을 입고도 최후까지 총격전을 벌였으나, 대대 지휘소가 점령되기 직전“포로가 되는 수치를 당하느니 죽음을 택하겠다”라며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고 29년의 삶을 마감했다. 정부에서는 그의 전공을 기려 중령으로 1계급 특진을 추서했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2002년에는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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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의 독립운동가, 임병극 선생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공동으로 ‘임병극 선생’을 2020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에 따르면 임병극(1885~미상) 선생은 1885년 평안도에서 출생하였으며 1917년 고향을 떠나 북간도(北間島)로 망명하여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일원으로 북간도에서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대한국민회가 만든 항일무장활동 기관인 국민회군의 제2중대장에 임명되어 독립전쟁의 최일선에서 활동했다. 국민회군과 함께 북간도에 근거지를 구축하고 항일무장활동을 펼치던 독립군단들은 효과적인 항일전을 위해 1920년 5월 22일 북간도 독립군 연합체인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를 탄생시켰으며, 북간도의 여러 독립군단 소속의 독립군 유격대는 수시로 국내진입전쟁을 전개해 일제 침략자들을 응징했다. 1920년 6월 4일 독립군 유격대는 국내로 진입하여 일본군 헌병 순찰대를 격파하는 큰 전공을 세운 후, 6월 6일 대한북로독군부 주력부대가 주둔해 있는 왕청현(汪淸縣) 봉오동(鳳梧洞)으로 향했다. 봉오동은 마치 삿갓을 뒤집어 놓은 모양의 지형으로 들어 올수 있는 입구가 하나였고, 나머지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외부의 공격을 방어하기에는 최적의 요건을 갖춘 요새지로 오늘날에는 그 지형의 이점을 살려 봉오저수지가 축조되어 있는 곳이다. 1920년 6월 7일 홍범도 사령관의 공격 신호탄에 따라 일제히 일본군을 공격하였으며, 대한북로독군부 피복과장이면서 국민회군의 2중대장이었던 임병극 선생도 부하 독립군을 독려해 적극적인 공격을 실시하여 봉오동 전투 승리에 기여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발표한 결과에서 일본군 사망자 157명, 중상자 200여명, 경상자 100여명이었으나, 독립군은 전사자 4명, 중상자 2명뿐으로 독립군의 완승이었다. 이로 인해, 봉오동전투는 침략자 일제에게 한민족이 기필코 조국광복을 달성하리란 증표를 보여준 독립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선생은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에도 참여하여 전승을 거두었으며, 이후 1921년 안도현에서 의용대를 조직하여 군자금을 모집하고 일제의 기관을 기습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923년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연해주 민족운동계 및 고려혁명군 대표자격으로 참가하였다. 선생은 북간도에서 의열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1924년 2월 8일부터 10일까지 3일간 적기단(赤旗團)·북로군정서의 인사들과 회합을 가졌다. 이후 선생에 대한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돈화(敦化)와 연길을 왕래하며 지하활동을 이어갔다. 선생의 이 같은 활동은 중국군에 포착되어 1924년 9월 연길현 숭례향 대명월구(大明月溝)에서 부하 5명과 함께 체포되어,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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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전현충원 2020년 5월의 현충인물, 정요한 의사자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립대전현충원이 2020년 5월의 현충인물로 ‘정요한 의사자’를 선정했다. 국립대전현충원에 따르면 정요한 의사자는 198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성균관대학교 스포츠과학부에 진학할 정도로 거의 모든 운동에 탁월한 신체능력과 강한 정신력을 지닌 건실한 학생이었다. 뿐만 아니라 평소 자원봉사 활동으로 따뜻함을 나누고 참사랑을 실천하던 착실한 청년이기도 했다. 2009년 12월 27일 정요한 의사자는 비행기를 두 번 갈아타고 자동차로 3시간을 달리고도 또다시 2시간을 걸어야 하는 오지인 말레이시아 사라왁주 보르네오섬의 원주민 마을로 서현교회(서울 소재) 청년 18명과 함께 자원봉사를 떠났다. 그는 다음날 28일부터 4박 5일 동안 밀림의 원주민 마을 2곳에서 의료봉사와 이·미용봉사, 어린이 봉사 등의 궂은 일도 마다않고 값진 땀을 흘리며 나눔을 실천했다. 그리고 귀국을 앞둔 2010년 1월 2일 말레이시아 쿠칭시 한 해변에서 갑자기 밀어닥친 강한 파도에 휩쓸린 위급한 한국여성 3명을 고(故) 김성현(연세대학교 재학)군과 함께 혼신의 노력으로 구조한 후 정작 두 명의 의인들은 빠른 조류에 휩쓸려 사랑하는 가족 곁을 떠나는 안타까운 이별을 했다. 정부는 2010년 제3차 의사상자심사위원회를 개최하여 살신성인의 용기와 행동을 몸소 실천한 정요한 군을 의사자로 인정했다. 의사자란 직무 외의 행위로서 구조행위를 하다가 사망한 사람을 말한다. 구조행위는 자신의 생명 또는 신체상의 위험을 무릅쓰고 급박한 위해에 처한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직접적·적극적 행위를 말한다. 자신을 희생해 인류애를 실천한 정요한 의사자의 의로운 용기는 우리 사회에 한 줄기 희망의 빛으로 온전히 기억될 것이다. 대한민국정부는 진정한 봉사의 의미를 알게 해준 아름다운 청년 정요한 의사자의 숭고한 정신을 기려 국립대전현충원 의사상자 묘역에 안장하여 그 의롭고 숭고한 살신성인 정신을 기리고 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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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2020년 5월 호국인물, 한신 육군 대장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이 2020년 5월 호국인물로 ‘ 한신 육군 대장’을 선정했다. 전쟁기념관에 따르면 故 한신(1922.12.27.~1996.5.6.) 육군대장은 1922년 12월 27일 함경남도 영흥(永興)에서 3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함흥공립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변호사가 되기 위해 일본 주오대학(中央大學) 법학과에 입학해 수학하던 중 태평양전쟁으로 귀국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1944년 병(兵)으로 입대, 간부후보생이 되어 견습사관(見習士官)중 광복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왔다. 1946년 월남 후, 국방경비 사관학교(現 육군사관학교) 제2기로 입교하여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수도사단 1연대장으로서 안강·기계전투, 38선 북진작전, 대관령전투 등 수많은 격전지에서 명성을 떨쳤다. 특히 낙동강 최후방어선의 요충지였던 안강·기계지역에서는 철수명령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진지를 사수하여 북한군 12사단의 공세를 저지함으로써 국군의 방어선 유지와 반격작전 여건 조성에 결정적인 공훈을 세웠다. 또한 중공군의 춘계공세가 한창이던 1951년 5월 22일, 동해안의 전략적 요지인 대관령전투에서 2일간 처절한 사투 끝에 1개 사단 규모의 중공군을 격퇴하여 적의 남하를 저지하고 전세를 역전시키는데 기여하였다. 6·25전쟁 이후에는 수도사단장, 6군단장, 1군사령관, 합참의장 등의 주요 직위를 역임하였다. 특히 ‘잘 먹이고, 잘 입히며, 잘 재우는’ 사병복지의 구현과 이를 통한 교육훈련 제일주의를 실현함으로써 군의 기강확립과 강군 육성에 헌신했다. 그리고 합참의장 재직 시에는 국군 현대화 계획을 입안하여 자주국방의 기틀을 세우는 등 큰 업적을 남겼다. 나라와 군 발전을 위해 평생을 바친 그는 청렴결백의 표상과 국군의 사표(師表)로 불리며 존경을 받았다. 1996년 5월 6일 향년 74세를 일기로 타계했으며, 서울 국립 현충원 장군묘역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그의 전공과 헌신을 기려 1953년 8월 27일 국군 최고의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하였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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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5월의 6‧25전쟁영웅, 김재현‧현재영‧황남호 철도 기관사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는 ‘김재현’ 철도 기관사와 ‘현재영‧황남호’ 철도 부기관사를 ‘2020년 5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 보훈처에 따르면 대전철도국 소속 기관사로 재직 중인 김재현, 현재영, 황남호는 6·25전쟁으로 대전시가 북한군의 손에 들어가던 날인 1950년 7월 19일 충북 영동역에서 군수물자 후송 작전에 참여 중이었다. 이때 북한군이 점령한 대전으로 가서 “미군 제24보병사단장인 윌리엄 딘 소장과 우군을 구출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윌리엄 딘 소장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도왔던 군정장관이자, 당시 한국 지형을 알고 있는 미군 지휘관으로 많은 역할을 한 인물이다.이에 김재현 기관사 등 철도용사들은 미군 결사대 30여명과 함께 충북 옥천에서 증기기관차를 몰고 대전으로 향했다. 당시 대전에 남아있던 국군은 이미 16일에 철수한 상태로 대전으로 향하는 모든 철로는 북한군 통제 하에 놓여 있었다. 기관차가 폭우처럼 쏟아지는 적탄 속을 뚫고 대전역에 도착했으나 적의 기습으로 미군 결사대원 27명이 전사하였고, 김재현 기관사는 전신에 8발의 총상을 입고 장렬히 순직하였다. 현재영 부기관사도 팔에 관통상을 입고 쓰러졌고, 황남호 부기관사가 기관차를 운전하여 옥천역까지 퇴각하였다. 이러한 김재현 기관사 등 참전 철도용사들의 희생은 향후 병력, 군수물자 및 피난민을 수송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큰 힘이 되었다. 미 국방부는 이러한 공로를 기리기 위해 민간인이나 외국인에게 수여하는 가장 훈격이 높은 공로훈장인 ‘특별민간공로훈장’을 추서하였다. 한편, 김재현 기관사는 1983년 철도인 최초로 국립서울현충원 장교묘역에 안장되었으며, 현재영 부기관사는 2010년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고, 황남호 부기관사는 2016년 국립임실호국원에 안장되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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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5월의 독립운동가, 유찬희‧유기석‧유기문 선생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공동으로 유찬희·유기석·유기문 선생 삼부자(三父子)를 ‘2020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에 따르면 유찬희(1884.8.8~1930.2.13) 선생은 1883년 8월 8월 황해도에서 태어나 배재학당에서 수학하였으며 슬하에 딸 둘과 아들 둘을 두었다. 장녀는 신덕(信德), 차녀는 신영(信永)이고 장자는 기석(基石), 차남은 기문(基文)이다.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과 1907년 고종황제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을 보면서 항일의식과 민족의식을 형성하였으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인재를 길러야 한다는 생각에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등에서 교육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3년 북간도에서 한인 자치단체인 간민회 등에 참여하여 한인의 식산흥업과 국적취득 등 권익을 옹호하고, 교육과 언론을 통해 한인을 계몽하였다. 1919년 3월에는 독립운동단체의 통일체로서 간도지역 항일민족운동단체인 대한독립기성총회를 조직하였다. 또한 1920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인상무총회를 설립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위한 자금을 모집하였으며, 대한국민회에서 무장투쟁과 자금을 지원하였다. 1923년 12월에 중국 돈화현에서 조선독립을 위한 항일사상을 고취하는 동성노농공사의 간사로 활동하였다. 이후, 선생은 블라디보스토크, 연해주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펼쳤으나 위암으로 1930년 귀국하여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별세하였다. 장남 유기석(1907.1.12~1980.11.27) 선생은 1930년 4월 상하이에서 유자명(柳子明) 등과 아나키즘 단체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을 결성하고 의열투쟁을 촉구하였다. 같은 해 6월 선생은 천진에서 대한독립당주비회 기관지 『한국의 혈』의 고문으로 활동하며, 안창호의 유일정당 운동인 대독립당(大獨立黨) 결성운동을 후원하였다. 1938년 김구(金九)와 협력하여 일본 군함 출운환(出雲丸)호 폭침(爆枕)과 상하이지역 일본 책임자 곡정지(谷正之) 공사의 암살을 시도하였다. 1943년 조선민족혁명당에 입당하여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으며, 1944~1945년 남경(南京)에서 광복군(光復軍) 징모 제3분처 대장으로 광복군 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 선생은 광복 후 중국 남통학원, 강소사범학원 등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학을 양성하였으며 1980년 별세하였다. 차남 유기문(1910~미상) 선생은 1931년 11월 무력 투쟁단체이자 남화한인청년연맹의 의열투쟁 조직인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 결성에 주도적인 참여하여 의열투쟁에서 많은 역할을 하였으며, ‘천진(天津) 폭탄 의거’와 ‘육삼정(六三亭) 의거’, ‘변절자에 대한 숙청’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선생은 1935년 5월에 흑색공포단원 엄순봉과 이규호와 함께 친일 상하이 거류민회장 이용로와 친일파 옥과빈을 처단한 사건에 참가하였다. 이 사건에 선생은 체포되지 않아 소재불명(所在不明)으로 기소 중지되었으며, 이후 선생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한편, 정부에서는 세 분의 공훈을 기리어 유찬희 선생에게는 201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유기석 선생에게는 200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유기문 선생에게는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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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전현충원 2020년 4월의 현충인물, 김성권·강혜원 애국지사
【중앙보훈방송=김하늘 기자】 국립대전현충원이 2020년 4월의 현충인물로 ‘김성권·강혜원 애국지사’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국립대전현충원에 따르면, 김성권·강혜원 애국지사는 먼 바다 건너 미국 땅에서 일제가 조국의 국권을 침해하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을 수 없어 항일운동에 앞장선 부부 독립운동가다. 김성권 선생은 1875년 경북 경주에서 태어나 1904년 하와이 사탕수수농장 노동자로 이민해 미주지역과 인연을 맺었다. 하와이 에와(ewa) 농장에 배치된 선생은 에와친목회를 결성하고 친목회보 주필과 한인합성협회를 조직하는 등 미국 내 한인들을 결속하고 애국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많은 활동을 전개했다. 1908년 갑작스러운 병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한 선생은 안창호 선생 등이 이끄는 공립협회에 가입해 본격적인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다. 1909년에는 미주 한인의 최고통일기관인 국민회를 탄생시켰고, 1913년에 대한인국민회에 독립 의연금을 출연했으며, 1920년대 초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흥사단 이사장과 1943년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 집행위원장 겸 기관지 「독립」신문사의 사장으로 활동하며 조국이 해방될 때까지 희생과 헌신으로 민족운동에 힘썼다. 강혜원 선생은 1885년 평양에서 태어나 1905년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으로 노동 이민을 했다. 1913년 평생의 동반자이자 영원한 독립운동 동지인 김성권 선생과 결혼한 뒤 캘리포니아주 다뉴바 지방으로 이주하여 강원신 선생과 함께 포도농장에서 일하며 여성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1919년에는 신한부인회를 결성하고 한인 부녀자들의 민족정신 고취와 미주 항일민족운동단체인 대한인국민회를 적극 후원했다. 같은 해 선생은 대한여자애국단 초대 총단장으로 선임되어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해 임시정부에 송금하였고, 흥사단과 대한인국민회에서 조국 독립을 위한 지원 활동을 적극 전개했다. 1940년에 다시 대한여자애국단 제8대 총단장을 맡은 강혜원 선생은 임시정부와 국민회의 재정을 적극 원조하는 한편, 미주 내 한인 동포 자녀들을 대상으로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등 조국을 위해 헌신하셨다. 정부는 조국을 위해 헌신한 김성권 지사에게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고, 강혜원 지사에게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미국 내 한인 결속에 힘쓰고 꿈에 그리던 고국에 돌아오기를 희망하던 김성권 지사는 1960년에, 강혜원 지사는 1982년에 별세하여 미국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2016년 11월 유해봉환을 통해 그리워했던 고국의 품인 국립대전현충원에 잠드셨다. [김하늘 기자 hn90071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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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4월의 독립운동가, 오광선·정현숙 선생 부부···독립군 부부에서 광복군 가족으로 독립전쟁에 투신하다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이 공동으로 ‘오광선·정현숙 선생 부부’를 2020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처에 따르면 오광선(1896.5.14~1967.5.3) 선생은 1896년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나 1913년 삼악학교를 졸업한 후 이웃 마을 출신 정현숙(이명 정정산) 여사와 결혼했다. 독립운동에 큰 뜻을 품은 선생은 1914년 서울로 올라가 종로에 있는 상동(尙洞)청년학원에 입학하였으나, 총독부의 지속적인 탄압과 재정난으로 1915년 문을 닫게 되자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건너갔다. 1918년 신흥무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동흥(東興)학교 군사교관과 체육교사로 재직한 후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서 독립군 양성에 헌신하였다. 1920년 12월 대한독립군단(총재 서일, 부총재 홍범도·김좌진·조성환, 부대원 약 3천 5백여 명) 중대장에 임명되었으며, 1930년 7월 이청천과 홍진 등이 중국 위하현에 결성한 한국독립당의 의용군 중대장으로 활동하였고, 1934년 2월에는 중국 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교관으로서 군관 양성 활동에 매진하였다. 이후 김구 선생의 지시로 1936년 북경으로 파견되어 첩보활동을 벌이던 중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신의주 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1945년 11월 귀국하여 ‘대한국군준비위원회’, ‘광복청년회’, ‘대동청년단’에 참여하였으며, 1948년 12월 육사 8기로 입교하여 이듬해 육군대령으로 임관하였고 전주지구위수사령관을 지낸 후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또한 정현숙(1900.3.13~1992.8.1) 여사는 1919년 남편을 따라 만주로 망명하여 화전을 일구며, 남의 집 일을 해주고 받은 품삯으로 생활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독립군의 뒷바라지에 헌신하여 ‘만주의 어머니’로 불리었다. 1941년 한국혁명여성동맹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44년에는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임정 활동에 참여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부부의 두 딸 오희영, 오희옥 선생(생존 애국지사) 역시 1939년 2월 조직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가담하여 선전활동에 참여한 것은 물론, 광복군에 입대해 초모(招募)공작 등에 활약하였으며 사위(오희영의 남편 신송식)까지 독립운동에 투신한 독립운동가 가문이다. 정부는 두 분의 공훈을 기리어 오광선 선생에게는 1962년 독립장을 수여하였고, 정현숙 선생에게는 1995년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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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4월의 6‧25 전쟁영웅, 성관식 해병대 소령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가 ‘성관식 해병대 소령’을 2020년 4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처에 따르면 성관식 소령은 1928년 광주(光州)에서 태어나 1951년 3월 수원농과대학을 졸업한 후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7월 1일 해병대 소위로 임관했다. 적군과 아군 간 전선이 교착되어 고지쟁탈전과 진지전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시기에, 성관식 소위는 해병 제1연대 3대대 2소대장에 보직되어 장단 일대에서 중공군과 대치하게 되었다. 1952년 9월 중공군이 대규모의 인해전술로 방어중인 장단 사천강가 제36전진 진지를 포위 공격해오자 성관식 소대장은 연대의 포병지원으로 적의 후속부대를 차단시킨 가운데 교통호까지 진입한 적과 격렬한 수류탄전과 육박전을 벌이며 진지를 사수했다. 특히, 적군의 포격으로 참호가 무너지면서 대원 5명과 함께 매몰되는 위기를 맞았으나 매몰된 상황에서도 필사적으로 무전기를 찾아 교신을 재개, 아군의 포병 지원사격으로 고지를 포위하고 있던 적군을 격멸하였다. 또한 진지를 성공적으로 방어함으로써 임진강 일대 아군 주저항선의 핵심 요충지를 확보하는 큰 전공을 세웠다. 6·25 전쟁이 끝난 후 성관식 소령은 해병대 교육단에서 신병교육에 힘썼으며 1958년 해병대 항공대 창설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1958년 9월 안타깝게도 비행훈련 중 불의의 사고를 당해 31세를 일기로 순직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계급 특진과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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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2020년 4월 호국인물, 나창준 공군 소령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이 2020년 4월 호국인물로 ‘나창준 공군 소령’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전쟁기념관에 따르면 故 나창준 공군 소령은 1928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출생하여 1944년 3월 일본 다치아라이(太刀洗) 육군비행학교를 졸업했다. 1948년 9월 육군 항공대에 입대해 이듬해 10월 공군 창설과 함께 L-4연락기 조종사로 근무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연락기를 몰고 전·후방 정찰임무와 공비토벌 임무를 수행했다. 특히 6월 28일에는 동료 조종사 3명과 함께 여의도비행장에서 미처 철수하지 못한 미군사고문단 소속 L-5 연락기 2대를 적의 대공포 사격을 뚫고 수원기지로 무사히 귀환시켰다. 1950년 10월 소위로 현지 임관한 후 1951년 3월 중위로 진급한 그는 같은해 8월 F-51D 무스탕 전투기 기종 전환훈련을 받은 후 제1전투비행단 강릉전진기지에 배속되었다. 이후 우리 공군 최초의 단독 출격작전에도 참여하였을 뿐 아니라 원산, 평양 등 적 후방 지역 깊숙이 출격하여 수많은 적 전차와 진지 그리고 보급품 집적소와 군수공장 등을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1952년 4월 5일 그는 평양 남쪽 진남포 지역의 적 보급로 차단과 군수공장 폭격 명령을 받고 4대의 F-51D 무스탕 전투기 편대를 이끌고 강릉기지에서 출격했다. 철교와 군사시설을 폭파한 후 진남포 군수품 생산공장을 공격했으나 적의 대공포에 피탄되었다. 그는 항공기가 비행불능 상태에 처하자 적 진지로 돌진, 자폭함으로써 25세의 나이로 장렬히 산화했다. 고(故) 나창준 소령은 6·25전쟁 기간 중 F-51D 무스탕 전투기 조종사로 총 57회의 출격을 기록했다. 그 결과 지리산지역 공비소탕작전과 송림제철소 폭격작전 등 전쟁 중 우리 공군의 주요 작전 성공에 크게 기여하였다. 정부는 이러한 그의 공적을 기려 1계급 특진과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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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전현충원 2020년 3월의 현충인물, 이신애 애국지사
【중앙보훈방송=김하늘 기자】 국립대전현충원이 2020년 3월의 현충인물로 ‘이신애 애국지사’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국립대전현충원에 따르면, 이신애 애국지사는 1891년 평안북도 구성에서 태어나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따라 원산으로 이주했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개성 호수돈여학교로 진학했으나 어려운 가정 형편과 결핵으로 건강이 악화되자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이후 건강을 회복한 이신애 선생은 1914년 성경여학교에서 공부한 후 1918년 루씨여학교 두산리분교에서 교편을 잡고 여성들에게 독립 사상을 고취하는 일에 열중했다. 그 무렵 손정도 목사의 설교에 깊은 감명을 받은 선생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919년 혈성부인회에 가담해 상해임시정부 군자금 모금과 강우규 선생의 부탁으로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 암살을 위한 군자금 모집에 주력하는 한편 서울로 들어온 강우규 선생을 은닉시키는 것은 물론 의거에 필요한 물품을 제공하는데 힘썼다. 이신애 선생은 강우규 선생이 서울로 오기 전인 1919년 9월 초, 조선민족대동단 부인단총대에 선출되어 여성동지를 규합하고, 동지들을 모으는 활동을 했다. 독립을 위해 투쟁을 벌이고 있는 이신애 선생을 본 이종춘 선생은 “저토록 젊은 여자도 조국을 위해 투쟁한다면 우리도 독립할 수 있으리라”라는 확신으로 조직에 참여했다. 1919년 10월 초 조선민족대동단은 조직의 본부를 상해로 이전할 계획 아래 의친왕 이강 공(李堈 公)의 상해 망명과 대대적인 독립 만세운동을 추진했다. 이때 이신애 선생은 여성 대표 자격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거사를 준비했다. 그러나 11월 11일 의친왕 일행이 일경에 체포되며 대동단의 조직은 대부분 붕괴되어 만세운동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다시 만세운동을 준비한 이신애 선생 등은 11월 28일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안국동 경찰관 주재소 광장에서 선언서를 뿌리고 태극기와 「대한 독립 만세」라고 쓴 깃발을 흔들며 ‘조선 독립 만세’를 높이 불렀다. 이에 일경은 만세운동 확산을 우려해 이신애 선생을 포함해 독립운동가들을 신속히 체포했다. 체포된 이신애 선생은 종로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투옥 중에 3·1운동 1주년이 되자 유관순 열사와 옥중 만세 운동을 전개하다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심한 고문으로 고초를 겪었다. 광복 후에는 ‘한국부인회’를 조직, 부녀 계몽운동에 투신하셨다. 정부에서는 평생을 조국에 헌신한 이신애 애국지사에게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고,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하여 그 공훈을 기리고 있다. [김하늘 기자 hn90071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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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2020년 3월 호국인물, 박노규 육군준장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이 2020년 3월 호국인물로 ‘박노규 육군준장’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전쟁기념관에 따르면 박노규 육군준장은 1918년 3월 14일 전라북도 임실군 둔남면에서 출생했다. 1946년 국방경비사관학교(現 육군사관학교) 제2기로 입교하여 같은 해 11월 육군참위(소위)로 임관하였다. 6·25전쟁 발발 전에는 제4연대 작전주임장교로서 여수·순천 10·19사건 진압작전에 참가했다. 1950년 7월 14일, 그는 국군 제6사단 제2연대 제1대대장으로서 소백산맥의 관문인 문경 이화령 일대를 방어했다. 연대는 이화령을 돌파하려는 북한군 제1사단의 집중 공격을 받은 제2·3대대가 중과부적으로 진지를 이탈하자 그가 지휘하는 제1대대만이 방어진지를 고수하게 되었다. 그는 치열한 백병전으로 북한군을 격퇴하고, 이화령 북방의 연풍 일대까지 반격을 가하는 데 성공했다. 제1대대의 반격에 힘입어 연대는 이화령전투에서 800여 명의 적을 사살하여 후퇴를 거듭하던 국군의 사기를 고양시킬 수 있었다. 또한 상주-대구로 진출하려는 북한군 제2군단의 계획을 지연시켜 낙동강 방어선의 구축에도 크게 기여했다. 같은 해 11월 대령으로 진급한 그는 제2사단 제31연대장으로서 태백산지구 일대의 게릴라 토벌작전을 지휘했다. 당시 태백산지구에는 북한군 제10사단의 패잔병과 함께 남파 유격대가 국군의 후방을 교란시키고 있었다. 이듬해 1951년 3월 4일, 영남 일대의 병참선을 경비하던 제31연대는 일월산지구를 돌파하려는 북한군 1,500여 명의 기습을 받았다. 이때 그는 연대장의 직책으로 부대를 진두지휘하며 적의 공격을 격멸하던 중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정부는 그의 전공과 헌신을 기려 1951년 4월 27일 준장으로의 특진과 함께 국군 최고의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훈기번호 제2호)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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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월의 6‧25 전쟁영웅, 이재국 공군 소령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가 ‘이재국 공군 소령’을 2020년 3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28일 보훈처에 따르면 ‘이재국 소령’은 1932년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태어났다. 1952년 8월 1일에 조종간부 1기생으로 임관 후 같은 해 9월 11일 강릉기지에 배속되어 북한 지역에 있는 적의 군사시설 파괴임무를 수행했다. 1953년에는 고성일대의 지상군 전투지역 근접항공지원작전에 참가하여 적을 무력화시키고 아군의 사기를 고양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1952년 10월 한 달 동안 거의 매일 전투 비행에 나서는 등 1952년 9월 23일 첫 출격한 이래 7개월이라는 짧은 작전 참여기간 동안 무려 총 99회 출격하는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이재국 소령은 1953년 3월 6일 고성 남방의 적진을 공격하던 중 적에게 피탄(被彈)되어 기체가 화염에 쌓인 상황에서 기적적으로 생환(生還)하였고, 이 공격으로 심각한 화상을 입었으나 불굴의 투지로 재기하여 1955년에 다시 조종간(操縱桿)을 잡았으나 안타깝게도 1955년 3월 T-33 제트기 도입을 위한 임무수행 중 순직했다. 이재국 공군 소령은 6·25전쟁 중 빛나는 공적으로 정부로부터 1953년 을지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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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월의 독립운동가, 김세환 선생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이 공동으로 김세환 선생을 2020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28일 보훈처에 따르면 김세환(1889.11.18.~1945.09.26.) 선생은 수원에서 출생하고 청소년시기에 교회에서 선교활동과 함께 교육과 구국활동을 펼치는 인물들의 지도를 받으며 성장했다. 이들의 영향으로 교육가 및 독립운동가로서 꿈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선생은 독립을 위한 신(新)학문의 중요성을 깨닫고 한성외국어학교를 졸업 후 일본 주오대학(中央大學)에서 유학했다. 1909년 말경 귀국하여 수원상업강습소(현 수원중·고)와 삼일여학교(현 매향여중·고)에서 교사로 활동하며 후진양성을 위해 지역사회의 중추적 인물을 배출하고 민족의 진로를 모색하는데 앞장섰다. 이후, 미국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소식을 듣고 이를 독립의 기회로 삼고자 3·1운동 준비모임에 참여하였고, 민족대표 48인의 한사람으로 ‘순회위원’이란 막중한 임무를 띠고 수원지역의 3·1운동을 기획 및 지도하였다. 만세운동 참여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선생은 기개를 잃지 않았고, 법정에서는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금후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할 것인가?”라는 검사의 질문에 선생은 “그렇다”라고 간단명료하게 대답하여 독립에 대한 결연한 의지를 강하게 드러냈다. 법정에서 선생의 자세는 재판 과정을 지켜보던 한국인들에게 큰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선생은 1920년 10월 30일 경성지방복심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석방되었다. 선생은 1920년대 초부터 추진되던 민립대학설립운동에 수원지역을 대표하여 참여하였고 신간회 수원지회장에 선출되었으며, 박선태·김병호 등과 함께 수원체육회를 결성하여 수원지역의 민족운동을 조직적으로 강화하고자 했다. 1939년 폐교 직전의 위기에 빠진 삼일학교를 구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으며 1941년에는 수원상업학교를 설립하여 해방되기까지 교육에 힘썼던 선생은 1945년 9월 26에 숨을 거두었으며, 개인묘지에 묻혔던 선생의 유해는 1968년 국립묘지로 안장되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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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전현충원 2020년 2월의 현충인물, 김동빈 장군
【중앙보훈방송=김하늘 기자】 국립대전현충원이 2020년 2월의 현충인물로 ‘김동빈 장군’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국립대전현충원에 따르면, 김동빈 장군은 1923년 함경북도 길주에서 태어나 만주의 용정중학을 졸업하고, 해방 후 국방경비사관학교(현 육군사관학교) 제1기로 군에 입문하였다. 6.25전쟁에 참전한 김동빈 장군은 11연대장으로서 과감한 지휘와 벼랑 끝 전술을 내세워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다부동전투, 영천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또한 1950년 8월 3일 해평리 작전에서는 북한군의 2개 사단 절반을 무찌르는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위와 같은 공을 인정받아 1953년에 군 최고의 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1967년 국방부 군수차관보를 끝으로 예비역 중장으로 편입된 김동빈 장군은 대한준설공사(현 한진중공업) 초대사장으로 임명되어 탁월한 경영능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한국전쟁의 모든 순간을 안고 있었던 김동빈 장군은 2002년 8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고, 현재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김하늘 기자 hn90071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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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2020년 2월 호국인물, 천춘식 해병 이등병조(현 하사)
【중앙보훈방송=구용환 기자】 전쟁기념관이 2020년 2월 호국인물로 6·25전쟁 당시 안동지구 전투에서 큰 전공을 세운 ‘천춘식 해병 이등병조(현 하사)’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전쟁기념관에 따르면 천춘식 해병 이등병조는 1929년 서울시 용산구 효창동에서 태어났다. 1949년 7월 해군 14기로 입대하여 해군에서 교육을 받았으나, 도중에 새롭게 창설된 해병대로 편입되어 해병대 2기생으로 훈련받았다. 1951년 1월 26일 천 이등병조는 해병 독립 5대대 소속 분대장으로 안동-영덕 인근 산악지역의 북한군 게릴라 소탕 작전에 참여하여 후방지역의 안정화에 기여했다. 당시 중공군의 공세가 한강 이남지역을 넘어서자 남한지역에 흩어졌던 북한군 패잔병이 집결하여 후방 지역의 시설과 도로를 위협했다. 해병 독립 5대대는 1월 26일 안동에서 수색정찰을 시작하여 2월 2일 의성군 옥산면 일대에서 적 250여 명을 포위하고 일제히 공격했다. 포위된 적이 격렬하게 저항하자 천 이등병조는 소대의 선두에서 분대를 지휘하여 30여 명의 적을 사살하고 11명을 생포하는 등 큰 타격을 입혔다. 해병 독립 제5대대는 2월 12일까지 후방 안정화 작전을 마치고, 같은 달 16일 김포지역에 배치되어 게릴라 소탕 작전과 전방 개풍지역의 정찰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등병조는 4월 25일 개풍지역에서 수색정찰 임무를 수행하던 중 실종되었다. 천 이등병조는 분대장의 직책으로 저항하는 적에 맞서 선두에서 공격을 지휘하는 군인정신의 표상을 보여주었다.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려 1952년 12월 충무무공훈장을 추서했다. [구용환 기자 khy5000@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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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2월의 독립운동가, 조지 새넌 맥큔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이 공동으로 조지 새넌 맥큔(George Shannon McCune, 한국명 윤산온) 선생을 2020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처에 따르면 조지 새넌 맥큔(1873.12.15.~1941.12.04) 선생은 1873년 12월 15일 미국 펜실베니아(Pennsylvania) 주에서 태어났다. 1905년 9월에 부인과 함께 내한하여 평양선교지부에 배치되어 숭실학교(崇實學校)에 선생으로 부임하면서 한국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1909년 9월 평북 선천선교지부로 전임하여 중학교 과정인 신성학교(信聖學校) 교장을 맡게 되면서 본격적인 교육사업을 시작했다. 1911년 10월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으로 교장으로 있던 신성학교 학생과 교사들이 구속되고 본인도 105인 사건의 연루자로 알려지자, 이들의 석방과 공정한 재판을 위해 활동했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일제의 강경한 탄압 사실과 운동의 의의를 알리기 위해 직접 운동 내용을 적어 여행가는 외국인에게 편지로 맡겨 검열을 피해 미국 시카고에 있던 「컨티넨트(The Continent)」 잡지사로 보내 게재하게 하였다. 또한 3.1운동의 발판이 된 2.8 독립선언서 번역문을 오산학교 시절 인연으로 이광수의 부탁을 받아 교정해 주었고, 3.1운동의 주요 지도자로 활약한 세브란스 의전 학생인 김원벽(金元壁)을 만나 독립운동을 격려하는 등 3.1운동에 직간접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런 선생의 활동에 일제는 지속적으로 감시와 탄압을 시작했고 결국 1921년 미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1928년 다시 돌아와 평양 숭실전문학교와 숭실학교의 교장으로 재직하였다. 1930년부터 일제는 모든 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고 선생이 있는 숭실학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선생은 기독교 사목과 목적에 맞지 않는다면서 계속 거부의사를 표명하며 일제의 탄압에 맞섰다. 결국 1936년 1월 18일자로 기독교의 교리와 양심상 자신이 신사참배를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학생들에게도 참배를 시킬 수 없다고 최종 서면으로 답변함으로써 그날로 숭실학교 교장과, 1월 20일 숭실전문학교 교장 직위를 취소당했다. 1936년 4월 선생은 안식년을 이유로 미국으로 돌아갔고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에서 강연과 논설 등을 지속해 나갔다. 또한 재미 유학생 단체인 북미대한인학생회(The Korean Students League of North America) 자문위원을 맡아서 계속 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을 이어 나갔고, 1941년 12월 4일 시카고 장로회병원에서 사망했다. 선생은 위와 같이 외국인으로서 3․1운동 지원, 신사참배 거부 운동 등 한국의 독립과 한국인 인재양성에 헌신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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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2월의 6‧25 전쟁영웅, 김영국 육군 대위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가 ‘김영국 육군 대위’를 2020년 2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처에 따르면 ‘김영국 대위’는 1928년 충청북도 진천군에서 태어났다. 6‧25전쟁이 발발하고 1950년 10월 육군종합학교 제9기생으로 입교하여 같은 해 12월 육군소위로 임관한 후 제2사단 32연대에 소대장으로 배속되었다. 1951년 9월 1일 중공군 제80사단 239연대가 강원도 김화지구 734고지를 빼앗기 위해 총공격을 개시해오자, 제2사단 대대장은 734고지 전진거점을 전담하던 7중대 중대장 김영국 중위에게 어떠한 상황이 전개되더라도 기필코 734고지를 고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7중대는 대대 규모의 많은 적군에 대항하여 결사적으로 항전을 하였으나, 적군의 수에 이기지 못하고 고지의 9부 능선까지 밀리며 백병전이 펼쳐지게 되었다. 이때 김영국 중위는 솔선수범으로 직접 적진으로 뛰어 들어 6명의 적을 사살하고 기관총 1정을 탈취하는 등 응전하는 전공을 세웠으나, 끝내 적의 흉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결국 김영국 중위가 이끄는 7중대의 분전으로 734고지를 사수 할 수 있었고, 이 전공으로 김영국 중위와 7중대에 이승만 대통령과 트루먼 미(美) 대통령 그리고 유엔군사령관과 미(美) 제9군단장의 표창이 수여되었다. 한편, 김영국 중위는 육군 대위로 1계급 특진되었고, 정부는 김영국 대위의 공훈을 기려 1951년 을지무공훈장과 화랑무공훈장을 추서했다.[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