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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서부보훈지청, 2018년 10월 우리고장 현충시설에 ‘백야 김좌진 장군 기념관’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충남서부보훈지청이 2018년 10월 이달의 우리고장 현충시설에 충남 홍성군 갈산면 ‘백야 김좌진 장군 기념관’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백야 김좌진 장군은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1917년 만주로 건너갔다. 1918년 12월 무오독립선언서에 민족지도자 39명 중의 한 사람으로 서명했고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는 등 대한민국의 독립운동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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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북부보훈지청, 10월 우리지역 현충시설 안동 향산고택 선정
【중앙보훈방송=김희자 기자】 경북북부보훈지청은 10월의 우리지역 현충시설로 안동 향산고택을 선정했다. 향산고택은 순국으로 일제에 저항한 향산 이만도 선생의 생가이자 3대의 걸친 독립운동가문의 자부심이 깃든 독립운동 현충시설이며 국가보훈처에서는 2009년 현충시설로 지정했다. 향산 이만도 선생(1842~1910)은 1896년 선성의진의 의병대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05년 을사늑약 파기와 을사오적 처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1910년 경술국치 후 일제통치를 부정하며 24일간의 단식 끝에 순국하였다. 이에 국가는 선생의 업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경북북부보훈지청에서는 국민들이 현충시설을 일상에서 친숙하게 접하고, 방문할 수 있도록 2017년부터 매월 지청 SNS(http://www.facebook.com/경북북부보훈지청)를 통해 관내 현충시설을 선정해 소개하고 있다. [김희자 기자 khj-pizz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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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경기도 가평군 한국전쟁 미군참전기념비···2016년 2월 4일 건립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한국전쟁 미군참전 기념비’는 한국전쟁 동안 가평지구에서 미군들이 보여준 희생과 봉사에 보답하고 한·미 양국의 영원한 우정을 상기시켜 주기를 바라며 그 역사적인 현장을 후세에게 알리고자 최승성 회장과 뜻있는 몇몇 분이 2011년 한국전쟁맹방국용사선양사업회를 설립하고 가평군이 지원하여 2016년 2월 4일 가평군 북면 이곡리 산 123번지에 건립했다. 경기도 가평은 6.25전쟁 당시 적들이 서울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하는 중부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는 수많은 전투가 벌어졌다. 미 제2사단 72탱크대대는 1951년 4월 목동에서 제령리 대원사 능선을 따라 남하하는 중공군을 맞아 치열한 교전 끝에 격퇴시켰다. 미 213 야전포병대대 J. F. Dalley 중령이 이끄는 유타 주 출신의 600명 대원 중 240명 미군은 1951년 5월 26일 북면 화악리(현 홍적리)에서 중공군 4,000명을 맞아 싸워 사살 350명, 포로 830명의 엄청난 전과를 얻고 한명의 사상자도 없이 전원 귀환하는 ‘가평의 기적’이라 명명하는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미 40사단은 사단장 Joseph Cleland 소장은 장병들이 십시일반 모은 기금으로 사단의 첫 전사자인 Kenneth Kaiser Jr일병의 이름을 딴 카이저고등학교(현 가평고등학교)를 설립해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했다. 아울러 1987년부터 매년 방한 시 가평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자료출처 : 한국전쟁맹방국용사선양사업회)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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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열사 윤병구선생 기념비, 충남서부보훈지청 '9월 우리고장 현충시설'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충남서부보훈지청이 9월 우리고장 현충시설에 충남 청양군 청남면 중산리 ‘애국열사 윤병구선생 기념비’를 선정했다고 밝혔다. 애국열사 윤병구 선생은 충남 청양에서 출생해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이후 만주로 넘어가 의열단의 일원으로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선생은 1922년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파 계획을 위한 군자금을 마련하고자 유석현 선생과 함께 당시 친일 부호의 집에 방문했다가 미리 잠복해있던 왜경들에게 붙잡혀 중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순국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고, 청양군은 1991년 기념비를 건립해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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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충령사, 대전지방보훈청 ‘9월의 우리고장 현충시설’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대전지방보훈청이 대전·세종·충남지역의 ‘9월의 우리고장 현충시설’로 충남 부여군 부여읍 부소로 31에 위치한 충령사를 선정했다고 밝혔다. 부여 충령사는 나라와 겨레를 위해 고귀한 생명을 바친 호국영령들의 숭고한 애국애족정신을 추모하기 위하여 부여군 출신 순국선열과 전몰군경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충령사는 부여군 전몰군경 충령각 건립기념회가 성금을 모아 1954년 건립한 것을 2004년 부여군이 증‧개축해 매년 6월 6일에 현충일 추모식을 거행하고 있다. 인근 현충시설로는 순국지사 유기섭 기적비, 애국지사 원인 이호철 선생 기념비가 있으며, 관광지로는 부소산성(낙화암)과 구드래국민관광단당지가 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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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화성시, 제암리3·1운동 순국유적 ... 일제의 화성지역 독립운동 근거지 전복과 3.1운동 확산 저지 학살사건
【중앙보훈방송=오재욱, 박정미 기자】 “(일본)대학생이었는데, 지금은 자료가 없어졌지만 그 당시에 ‘오야마 레이지’ 목사님을 중심으로 해서 ‘제암리소타사건 사죄위원회’을 만들어서 민간단체에서 사죄를 하겠다며 모금운동도 벌이고 이곳을 주기적으로 방문도 하기도 했는데, 그러한 자료들을 보고 우는 거예요. 그 (일본)학생이. 그래서 왜 우느냐고 했더니, 너무 미안하고 너무 충격적이고 놀랍다고”(서영주 화성시 문화관광해설사) 1919년 3월 1일, 전국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은 일제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려는 독립운동이자 자유·민주·평등의 가치를 추구하는 비폭력 운동이었다. 그러나 화성지역에서 일어난 3.1운동은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불태우고 순사 2명을 처단하는 등 무력항쟁으로 전개되었다. 1919년 4월 15일, 수원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헌병 제78연대소속 아리타(有11田俊夫) 중위는 보병 11명을 이끌고 제암리로 들어와 마을의 15세 이상 남자들을 제암리 교회로 모은 뒤, 창문과 출입문을 모두 봉쇄하고서 석유를 뿌린 후 불을 지르고 건물 안을 총으로 난사하며 학살했다. 남편을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여인 2명을 살해하고 제암리 마을 33가구 중 빈집 1가구만 남기고 모두 불을 질렀는데 멀리 오산에서도 이 불길이 보였다고 한다. 일본군은 인근 고주리로 건너가 독립운동가 김흥렬 일가 6명을 참살하고 방화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사건 후에도 일본군의 심한 감시로 희생자의 장례조차 치르지 못했으며, 4월 17일 의료선교사 스코필드가 유골들을 향남면 도이리 공동묘지 입구에 안장했다. 언더우드는 참사현장을 보고서로 작성해 미국으로 보냈으며, 스코필드는 몰래 현장사진을 찍어 일제의 야만행위를 국제사회에 알렸다. 제암·고주리 사건은 일제가 화성지역 독립운동의 근거지에 대한 전복과 3.1운동의 확산을 저지하고자 자행한 반인도적인 학살사건이다(취재 : 오재욱, 박정미 기자 / 촬영‧편집 : 오재욱 기자).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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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동두천시 보훈탐방 1, 독립유공자추모비 ... 의병장 송천 김연성 등 총 28位 애국선열
【중앙보훈방송=오재욱, 박정미 기자】 경기도 동두천시 독립유공자추모비는 동두천 출신의 독립유공자를 추모하기 위해 1996년 동두천시가 건립한 기념비로 동두천시 상봉암동 산1-1 소요산다목적광장에 자리잡고 있다. 1908년 1월 15일 일본군 적성 및 연천 수비대가 동두천에서 활약 중인 의병과 교전해 80여명의 의병을 사상했다. 13도연합의진에 참여했던 의병장 김연성 등은 동두천 소요사에서 재집결해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가했다. 1919년 3월 26일 동두천 장날 송내·지행·좌기골·기촌·빈양말·하봉암·상봉암·창말·싸리말·안흥리 등 10여 마을 주민 1,300여명이 일시에 동두천시장에 집결해 만세운동을 벌였다. 만세운동 참가자들은 시장을 행진하는 가운데 더욱 늘어났고 면장도 만세를 부르며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독립유공자추모비에 모셔진 동두천출신 애국선열은 다음과 같다. 의병장 송천 김연성, 추삼만(90,독립장), 홍희영, 정두환(90,애국장), 정충환(90,애국장), 전순만(90,애족장), 정제환(90,애국장), 전목기(96,애족장), 이긍내, 유재만(90,애족장), 송창근, 목자상(90,애국장), 우병창, 김병기, 목연욱(90,애족장), 황용호, 홍병준, 김병주, 이명기, 이병하, 김병시, 김병원, 정원이, 한원택, 박창배, 박영철, 박경필, 고복돌 선생 등 총 28분이다. [촬영/편집 :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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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고양 행주산성, 임진왜란 3대 대첩지 『행주대첩』의 역사적 현장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행주산성은 사적 제56호로 해발 124.8m의 고양시 덕양산 능선을 따라 경사진 언덕처럼 흙으로 쌓은 토성으로 그 길이는 약 1km에 이른다. 성의 남쪽은 한강이 인접해 있고, 동남쪽으로는 창릉천이 산성을 돌아 한강으로 유입되고 있어 자연적인 해자[垓字,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주위를 둘러서 판 못]가 조성되어 있다. 1593년 2월 12일,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의 지휘 아래 관군, 승병, 의병, 부녀자 등 모두 2,300여명이 왜군 3만여명을 물리친 『행주대첩』의 역사적 현장이다. 부녀자들도 앞치마에 돌을 담아 날라 왜군에 맞서 싸웠는데, 이때부터 부녀자들이 부엌에서 입는 앞치마를 ‘행주치마’라고 부른다. [취재 / 촬영 / 편집 :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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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오미광복운동기념공원, 경북북부보훈지청 4월 현충시설 선정
경북북부보훈지청은 4월의 우리지역 현충시설로 경북 안동시 풍산읍 '오미광복운동기념공원'을 선정했다. 오미광복운동기념공원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한 오미마을 출신의 독립운동가를 기리고자 2008년 10월 건립한 시설로 국가보훈처가 2009년 9월 현충시설로 지정했다. 기념탑은 독립운동가들의 기개와 애국애족의 충혼이 영원불멸의 불꽃으로 온누리를 비춘다는 의미로 불꽃형상으로 조각했으며, 의열단원으로 일본궁성에 폭탄을 투척한 김지섭(건국훈장 대통령장)과 김만수(건국훈장 독립장), 김재봉(건국훈장 애국장) 등 8명의 건국훈(포)장 포상자를 포함하여 모두 24명의 독립운동가의 양력과 업적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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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민족저항 시인 이상화 고택...일제강점기에 민족의 광복을 위해 저항정신의 횃불을 밝힌 시인
시인 이상화(李相和, 1901년 5월 9일~1943년 4월 25일)는 대구에서 4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나 다섯 살에 아버지를 잃었다. 1918년에 서울 중앙학교(현 중앙고등학교)를 수료하고 19세 되던 1919년 서울에서 3·1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3월 8일 장날을 기해 대구에서 학생만세운동을 모의했다. 하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주요 인물이 잡혀가자 서울 박태원의 하숙으로 피신했다. 1921년에 현진건의 소개로 박종화와 만나 ‘백조’ 동인에 참여해 1922년 ‘백조’ 1~2호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얼굴을 내밀었다. 그해 프랑스에 유학하기 위해 일본으로 갔으나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귀국했다. 1925년에 활발한 작품 활동 중에도 평론, 소설 번역에도 힘썼고 8월에 카프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27년 대구로 돌아와 1933년 교남학교(현 대구 대륜고등학교) 조선어와 영어, 작문교사로 근무했으나 이듬해 사직했다. 1937년 만주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하고 있는 큰형 이상정 장군을 만나러 중국에 3개월간 다녀와 교남학교에 복직해 교가를 작사했다. 1943년 3월에 위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가 4월 25일 대구 자택에서 숨졌다. 시인 이상화는 1922년 ‘백조’ 1호에 〈말세의 희탄〉, 〈단조〉 두 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한 이후 〈나의 침실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대구 행진곡〉, 〈서러운 해조〉등 60여 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광복을 위해 저항정신의 횃불을 밝힌 시인 이상화선생의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과 조국에 대한 애정을 절실하고 소박한 감정으로 노래하고 있는 대표적 저항시이다. 이상화 고택은 시인이 1939년부터 작고하던 1943년까지 거하던 곳으로 대구시 계산동 2가 84번지에 자리잡고 있다. 1999년부터 고택을 보존하자는 시민운동으로 시작하여 군인공제회에서 인근 주상복합아파트를 건립하면서 고택을 매입해 지난 2005년 10월 27일 대구시에 기부채납했다. 대구시는 대지면적 205m², 건축면적 64.5m²(단층 목조주택 2동)의 고택을 보수하고, 고택보존시민운동본부에서 모금한 재원으로 고택 내 전시물 설치를 완료했다. 이상화 고택은 암울한 시대를 살면서 일제에 저항한 민족시인 이상화의 정신을 기리고 후손에게 선생의 드높은 우국정신과 문학적 업적을 계승하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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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국채보상운동 시리즈 3 - 서상돈 고택, 국채보상운동의 거장
서상돈(徐相敦 또는 徐相燉, 1851년 10월 17일∼1913년 6월 30일)은 조선 말기의 기업인이자 관료이자 민족 독립운동가였다. 1871년 대구로 가서 지물 행상과 포목상으로 많은 재산을 모았다. 그는 정부의 검세관이 되어 조세곡을 관리하기도 했다. 1898년 독립협회(獨立協會)와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의 간부로 활동하면서 러시아의 내정간섭을 규탄하고 민권보장 및 참정권획득 운동을 전개했다. 1907년 대구의 광문사(廣文社)의 부사장으로 재직 중 금연으로 일본에 진 나랏빚 1,300만원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의하고 국채보상취지서를 작성 발표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대구시는 서상돈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중구 계산동 이상화(1901~1943, 시인) 고택의 옆에 있던 서상돈 고택을 복원하여 2008년 8월 12일 개관했다.[취재 : 오재욱, 박정미 기자 / 촬영, 편집 : 오재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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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국채보상운동 시리즈2 - 국채보상운동기념관
국채보상운동기념관은 대구시 중구 국채보상로 670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안에 있다. 2011년 10월 5일 개관한 기념관은 지하 2층, 지상 2층에 연면적 1천129㎡ 규모로 역사 전시실과 영상 자료실, 학예실, 국채보상운동연구소, 휴게실 등이 들어섰다. 건립비 50억원 중에 9억8천여만원은 2008년부터 2011년까지 국민들이 낸 성금이다. 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는 국채보상운동기념관을 나라사랑 정신을 고취하는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대구에서 서상돈, 김광제 선생 등이 중심이 되어 의연금을 모아 일본에 진 빚 1,300만원을 갚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운동이다. 대한매일신보에 나라의 국권회복을 위해 2천만 동포가 금연을 통해 모은 돈으로 국채를 보상하자는 취지문이 발표되자, 전국의 남녀노소, 빈부귀천, 종교를 뛰어 넘어 일본, 미국, 러시아의 동포들까지 참여한 모금운동으로 확대되어 한말 최대의 민족운동이 되었다. 그러나 1907년 말부터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고 있던 대한매일신보에 대한 탄압과 발행인인 영국인 베델 추방 공작이 전개되고, 1908년에는 대한매일신보 총무인 양기탁에게 국채보상금을 횡령하였다는 혐의를 씌워 구속하는 등 일제의 탄압이 가속되자 국채보상운동이 크게 위축되어 좌절되고 말았다.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의 탄압으로 3개월이라는 단기간 동안 전개되고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우리 민족 자주독립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연 역사적인 운동으로 평가된다.[취재 : 오재욱, 박정미 기자 / 촬영, 편집 : 오재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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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국채보상운동 시리즈 1 -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은 1907년 대구에서 서상돈, 김광제 선생 등이 중심이 되어 의연금을 모아 일본에 진 빚 1,300만원을 갚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을 기념하는 공원이다. 기념공원은 대구광역시 동인동2가 중각네거리에 있는 대구의 대표적인 근린공원이다.[취재 : 오재욱, 박정미 기자 / 촬영, 편집 : 오재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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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포병용사 김풍익 전투기념비
‘포병용사 김풍익 전투기념비’는 의정부시와 포천시 경계에 있는 축석고개에 자리한다. 기념비는 육군 전투병과 학교 포병학부(현 육군 포병학교)에서 6·25동란때 의정부지구 전투에서 산화한 김풍익 중령과 분대원 6명의 넋을 기리기 위해 건립했다. 1987년 12월 풍익사업추진위원회(위원장 허전)을 구성해 군장병과 민간의 성금, 출판수익금, 육군본부사업비 및 물자지원, 의정부시의 부지 제공 등 1억 6천여 만원의 사업비를 투입 1988년 6월 17일 착공하여 그해 10월 25일 준공했다. 김풍익 중령은 1921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1941년 선린상고를 졸업하고 광복 후 육사 제7기(특) 입대, 1948년 소위로 임관했다. 1950년 6월 26일 북괴군 3사단이 전차 40여 대를 몰고 포천방면에서 남하, 축석방어선이 무너지자 당시 포병학교 교도 대대장이었던 김풍익 소령은 1개 분대 분대원 6명 및 105미리 야표 1문을 직접 이끌고 축석령이 잘 보이는 고개 밑으로 16km까지 전진, 직접 조준사격 준비를 완료했다. 때마침 커다란 굉음과 함께 축석령 고개를 돌아 내려오는 적전차를 발견한 결사대는 100여m 접근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침착하게 직접 사격을 실시하여 선두의 적전차를 파괴했으나, 후속하는 전차의 집중포격을 받고 그 자리에서 전원 산화하고 말았다. 정부는 일반화기로 격파가 어려운 T-34 전차를 야포로 직접 조준해 파괴한 김풍익 대대장의 놀라운 전공을 인정해 1950년 8월 24일 육군 중령으로 일계급 특진 추서했고, 같은 해 12월 30일에는 을지무공훈장과 충무무공훈장을 수여했다.[취재 : 오재욱, 박정미 기자 / 촬영, 편집 : 오재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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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현충시설 사진기획전 - 광복회 천안시지회
광복회 천안시지회는 지난 9월 28일, 충남 천안 병천면 유관순 열사 추모각에서 '순국 제97주기 추모제'가 열린 가운데 '현충시설 사진기획전을 열었다. [촬영 / 편집 : 오재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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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재일학도의용군 참전기념비
재일학도의용군 참전기념비는 인천광역시 남구 숭의동 수봉 공원 내에 있는 전적 기념 구조물이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북한의 남침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기 위해 일본 전역에 거주하던 재일 한인 청년 학생 총 642명이 스스로 재일 학도 의용군을 조직하였다. 재일학도의용군은 불과 1주일 정도의 훈련을 거친 후 참전하였고, 백마 고지 전투 등 주요 전장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재일학도의용군 참전기념비는 재일학도의용군 출신들로 조직된 ‘재일학도의용군 동지회’가 산화한 동료 전우들의 넋을 위로하고 그들의 공로를 기리기 위하여 1979년에 세운 기념비이다. 6·25 전쟁 당시 참전하여 혁혁한 공로를 세우고 전사한 동료 전우들을 기리기 위해 ‘재일학도의용군 동지회’에서는 기념비 건립을 추진하였다. 당초 ‘재일학도의용군 동지회’는 처음 조국 땅을 밟은 인천 월미도에 1956년 기념비를 세우고자 하였으나, 군부대 주둔의 이유로 무산되었다. 이후 1976년 서울 국립묘지[현 국립 서울 현충원]에 재일학도의용군 위령비가 건립되었고, 1979년 수봉 공원에 재일학도의용군 참전기념비가 건립되었다. 건립 연혁, 추모글 등이 적힌 비문이 재일학도의용군 참전기념비 주변에 위치해 있다. 추모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방에 거룩한 터전을 열고 유구한 역사의 명맥을 이어 온 배달겨레 슬기론 후예들 혈관 속에 조상의 전통 배어들어 바다 밖에 나가 살아도 내나라 향한 불타는 사랑 그 사랑만은 잊지 못하고 북한의 공산도당들 이리떼같이 몰려 내려와 국토와 겨레를 짓밟을 적에 젊은 학도들 현해탄건너 사자보다도 용감히 싸웠었네. 자유. 평화 정의를 생명보다 더 사랑하기에 물불 속에라도 뛰어들었고 총알 앞에라도 달겨들었네. 의기와 정렬의 사나이들 그 정신 역사에 새겨 민족행진에 횃불이 되고 조국의 제단에 피를 뿌려 청춘을 낙화처럼 바친 이들 겨레의 가슴마다 열매 맺아 조국과 함께 길이 살리라.” 재일학도의용군 참전기념비는 6·25 전쟁으로 인해 조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 일본에서 자원 참전한 학도의용군을 기리는 조형물로서 상징적 의미가 크다. [촬영, 편집 : 오재욱 기자 / 내용출처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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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해남 우수영국민관광지, 명량대첩 기념공원
해남 전라우수영(海南 全羅右水營)은 대한민국의 서해와 남해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로, 명량대첩의 배후기지로 활용되었던 역사적인 유적이다. 조선시대 수군체제의 변화와 발전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관방시설(關防施設)로서 군제사, 성곽사 연구 등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어 2016년 9월 30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535호로 지정되었다. 전라우수영의 앞바다는 물살이 빠른 명량해협으로 울돌목이 있다. 그 안쪽으로 양도(洋島)라는 섬이 울돌목의 거센 파도를 막아주는 방파제 역할을 하는 한편, 외부로부터 시선을 가려주고 있는 천혜의 요새다. 13척 대 133척의 대결, 세계 해전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전투가 바로 명량해전이다. 선조임금은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면서도 수군을 폐지하라 이른다. 그러나 이순신은 "令臣戰船 尙有十二(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명량해협으로 향한다. 우수영관광지는 명량대첩의 대승을 기념하기 위해 1986년에 국민관광지로 지정하고 당시 최후의 교두보였던 울돌목을 성지화하기 위하여 세운 기념공원으로서 1990년 명량대첩 기념공원으로 조성하였다. 아울러 전시관에는 보물 제503호로 지정된 명량대첩비의 탑본과 무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된 강강술래의 배경화가 전시되어 있다. [촬영, 편집 : 오재욱 기자 / 내용출처 : 위키백과, 네이버 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