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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03-28 13:13:33
  • 수정 2018-03-28 13: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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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이상화. ⓒ네이버지식백과


시인 이상화(李相和, 190159~1943425)는 대구에서 4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나 다섯 살에 아버지를 잃었다.


1918년에 서울 중앙학교(현 중앙고등학교)를 수료하고 19세 되던 1919년 서울에서 3·1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38일 장날을 기해 대구에서 학생만세운동을 모의했다. 하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주요 인물이 잡혀가자 서울 박태원의 하숙으로 피신했다.


▲ 이상화 시인 아테네 프랑세 수료 기념(1923년, 사진 앞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 . ⓒ이상화기념사업회


1921년에 현진건의 소개로 박종화와 만나 백조동인에 참여해 1922백조’ 1~2호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얼굴을 내밀었다. 그해 프랑스에 유학하기 위해 일본으로 갔으나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귀국했다.


1925년에 활발한 작품 활동 중에도 평론, 소설 번역에도 힘썼고 8월에 카프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27년 대구로 돌아와 1933년 교남학교(현 대구 대륜고등학교) 조선어와 영어, 작문교사로 근무했으나 이듬해 사직했다.


▲ 1937년 중국을 방문했을 때 북경에서 형 상정과 상봉한 이상화. ⓒ이상화기념사업회


1937년 만주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하고 있는 큰형 이상정 장군을 만나러 중국에 3개월간 다녀와 교남학교에 복직해 교가를 작사했다. 19433월에 위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가 425일 대구 자택에서 숨졌다.


시인 이상화는 1922백조’ 1호에 말세의 희탄, 단조두 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한 이후 나의 침실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대구 행진곡, 서러운 해조60여 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광복을 위해 저항정신의 횃불을 밝힌 시인 이상화선생의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과 조국에 대한 애정을 절실하고 소박한 감정으로 노래하고 있는 대표적 저항시이다.


▲ 이상화 고택. ⓒ오재욱 기자


이상화 고택은 시인이 1939년부터 작고하던 1943년까지 거하던 곳으로 대구시 계산동 284번지에 자리잡고 있다.


1999년부터 고택을 보존하자는 시민운동으로 시작하여 군인공제회에서 인근 주상복합아파트를 건립하면서 고택을 매입해 지난 20051027일 대구시에 기부채납했다.


대구시는 대지면적 205m², 건축면적 64.5m²(단층 목조주택 2)의 고택을 보수하고, 고택보존시민운동본부에서 모금한 재원으로 고택 내 전시물 설치를 완료했다.


이상화 고택은 암울한 시대를 살면서 일제에 저항한 민족시인 이상화의 정신을 기리고 후손에게 선생의 드높은 우국정신과 문학적 업적을 계승하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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