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 송악산 일제 동굴진지...크고 작은 진지동굴 60여개소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제주 송악산 외부 능선 해안에 있는 ‘일제 동굴진지’는 당시 일본군의 군사시설로서 1943~1945년 사이에 만들어졌다. 송악산에는 이처럼 크고 작은 진지동굴이 60여개소나 되며, 이 진지동굴은 태평양전쟁 말기, 수세에 몰린 일본이 제주도를 저항 기지로 삼고자 했던 증거를 보여주는 시설물 가운데 하나로서, 주변에는 섯알오름 고사포 동굴진지와 해안동굴 진지, 알뜨르비행장, 비행기격납고, 지하벙커, 이교동 군사시설, 모슬봉 군사시설 등이 있다.송악산 외륜 일제 동굴진지는 전략 요충지인 알뜨르 비행장 일대를 경비하기 위한 군사시설이다. 송악산 외륜에 분포하고 있는 동굴진지는 모두 13곳에 이르며, 동굴과 출입구의 형태가 지네의 모습을 하고 있다. 총 길이가 1,433m로, 출입구 수는 41곳으로 제주도 내에서 가장 많다.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
경기 가평, 삼충단(三忠壇)...운악산 현등사 일주문 옆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삼충단(三忠壇)’은 일제의 무단 침략에 항거하다 자결한 조병세, 최익현, 민영환선생을 기리기 위해 내시부지사 나세환, 첨지 김두환, 현등사 주지 정금명 등 가평의 유지들이 1910년에 만든 제단이다. 1986년 6월 19일 가평군 향토유적 제12호로 지정된 ‘삼충단’은 경기도 가평군 조종면 운악산 현등사로 올라가는 길 현등사 일주문 옆에 자리하고 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단이 사라졌으나 1988년 유지 39인이 삼충단 복원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추모비를 복원하고 기념비를 세웠다. 2005년 다시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고 2019년 추모비문의 내용 오류 수정을 위해 다시 제작하였다. 1905년 을시늑약이 체결되자 조병세선생은 의정대신(議政大臣)으로 있다가 가평에 은거하고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상경하여 을사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며 을사오적을 처단하고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며 항거하였으나 왜헌들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결고국중사민서(訣告國中士民書)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민영환선생은 시종무관(侍從武官)이었는데 대한문앞에 나가 석고대죄하며 국권회복의 상소를 올리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국민과 각국공사에게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최익현선생은 의병을 조직하여 왜구토벌에 앞장서 싸우다가 체포되어 단식항거 중 1906년 대마도에서 순국하였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
양주시 광적면 만세배미, 일제에 대항해 만세시위를 벌이다 현장에서 ‘김진성, 이용화, 백남식 열사’ 순국
경기 양주시(시장 이성호) 광적면의 만세배미는 항일독립운동이 일어났던 현장으로 1919년 3월 28일, 세 분의 열사가 일제에 저항하며 만세운동을 하다 순국했다. 양주시는 매년 3.1운동 기념식 및 재연행사를 거행하며 그 숭고한 뜻을 기리고 있다. 3.1절을 맞아 양주에서 있었던 항일독립운동의 역사를 간략히 소개한다. 양주의 항일독립운동은 3월 1일보다 좀 늦게 일어났다. 역사적 그날, 광적면의 만세시위는 면소재지인 가납리에서 일어났다. 가납리에는 3월초부터 만세운동의 소식이 전달됐고 만세시위를 추동하는 사발통문이 나도는 등 만세운동의 분위기가 고조됐다. 광적면의 만세시위는 당시 양주군 내 만세시위 중 가장 격렬하게 전개됐다. 이때 만세시위를 주도적으로 계획 추진했던 인사들은 효촌리 출신의 김진성, 백남식, 이용화 등이었다. 이들은 광적면에서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하고 시위대를 이끌고 장고개를 넘어 광적면 가납리에 도착해 태극기를 휘날리며 만세를 고창했다. 이때 가납리에는 광적·백석면민들이 모여 만세를 부른 후 해산하고 있었다. 효촌리 시위대가 도착하자 흩어졌던 시위대원들이 다시 모였고, 시위대의 수는 950여명에 달했다. 시위대는 논 가운데(현 가납리 732-4, 이 날의 시위이후 이곳을 ‘만세배미’라고 부른다)에 모여 오후 4시경 시위를 재개했다. 만세시위가 전개되자 의정부에서 급파된 헌병 5명과 보조원 노호연, 광적면장 이하용이 도착했다. 헌병들이 논둑 위에서 주모자를 찾자, 이용화를 필두로 김우규, 한춘석이 앞으로 나섰다. 헌병이 군중의 해산을 명령했지만 시위대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만세를 외쳤고 헌병들은 깃발 든 쪽을 향해 발포를 시작했다. 결국 시위대의 선두에 서 있던 김진성, 이용화, 백남식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이 외에도 일본 헌병의 발포로 시위대원 가운데 4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마침내 시위대가 해산된 것은 2시간만인 오후 6시경이었다. 당시 만세시위의 현장이었던 가납리 732-4번지 일대는 현재도 ‘만세배미(만세답)’로 불리고 있다. 양주시는 1986년 6월 가래비 3.1운동 기념비를 건립하고 매년 3월 1일 추념식 및 추모제향을 봉행했다. 그리고 2007년 당시 순국열사들이 실제로 만세운동을 했던 만세배미 현장에 순국기념비를 제막하고 일제에 대항해 만세시위를 벌이다 헌병들의 무차별 사격에 의해 현장에서 순국하신 김진성, 이용화, 백남식 열사의 고귀한 뜻을 기리고 있다.[자료 및 사진제공=양주시청]
-
경기도 포천시, 상송우시장 ‘황재호’ 의병 활동지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포천지역에서는 1907년 9월부터 독자적인 소규모 부대 중심의 의병투쟁이 산발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1909년 9월 20일 100여 명의 의병이 포천에 출동하여 일진회원을 응징한 데 이어서 9월 27일 50여 명의 의병이 일본 수비대와 교전하였고, 9월 30일에는 영평분견소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10월 이후에도 포천지역에서 의병부대들이 산발적으로 출몰했다. 10월 4일 포천 동쪽 8km 떨어진 현등사 부근에 집결한 50여 명의 의병이 일본수비대와 교전을 벌였고 이어서 소규모 전투가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이듬해인 1908년 1월 10일 포천 산내면 출신으로 구한국군 보병하사였던 황재호가 이끄는 13명의 의병부대는 포천 외소면 소재 상송우시장을 습격했다. 이후 황재호 부대는 1월 말경에 양주군 고주내면 고읍리에 출동하여 활동을 벌였다. 6월 16일에는 포천 서북쪽 30리 지점에서 적성수비대와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황재호는 대한제국 육군 출신으로 군대가 해산되자 곧바로 의병 투쟁에 나섰다. 그는 정충환·추삼만·전순만·목자상·김수동 등과 함께 양주·파주·가평·영평 일대에서 주로 군자금 모금활동을 벌였다(자료출처=독립기념관).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
경기 포천 현충시설1, 육사 생도 6·25 참전 기념비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육사 생도 1기와 2기 642명의 6·25 전쟁 참전을 기념하고 용감히 싸우다 산화한 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동기생들이 모은 기금과 국비 1억 원을 지원받아 1979년 12월 1일 건립한 ‘육사 생도 6·25 참전 기념비’는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우금리 산89-1번지에 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공산군의 불법 남침으로 6·25 전쟁이 발발했다.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자 당시 육군 사관 학교에 다니던 생도 1기[현 육군 사관 학교 10기] 312명과 2기 330명은 육사 장교 및 교관들의 지휘 아래 6월 26일 새벽 포천으로 출전하여 방어 진지를 구축했다. 공산군 제3사단의 공격을 받아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여 포병의 지원도 없이 소총만으로 적의 공격을 지연시키던 중 실탄마저 떨어져 백병전으로 처절한 혈전을 전개한 이들은 이곳에서 100여 명이 전사했다. 포천에서 백병전까지 치르고 철수를 명받은 일부 사관생도들은 후퇴하던 9사단 장병들과 합류하여 태릉 주변 산악지대를 근거지로 유격대를 조직하였다. ‘호랑이 부대’, 즉 불암산 유격대가 그것이다. 이들은 가파른 수락산과 불암산을 넘나들며 북한군을 상대로 전투를 했다. 불암산에는 그들의 자취가 배인 동굴이 있고, 당시 절의 스님들은 이들을 도왔다. 여기서 활약한 사관생도 중 2기는 대부분 실탄 장전법도 익히기 전에 전투에 투입된 20세 미만의 청소년이었다. 불과 며칠 사이에 생도에서 전사로 변한 그들은 이후 하나 둘 사라져 갔다(사진촬영=오재욱 기자).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
강원 현충시설 1, 강원경찰충혼탑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강원 춘천시 서면 신매3리 68-4에 마련된 ‘강원경찰충혼탑’은 6.25전쟁 당시 전사하거나 공무수행 중 순직한 강원경찰의 넋을 추모하고 그 숭고한 희생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건립했다. 강원경찰은 6.25전쟁 당시 조국수호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경찰관들의 고혼을 영원히 기리고자 1958년 10월 27일 춘천시 봉의동 산 15번지 강원도청 뒤에 충혼탑을 건립하고 전사경찰관 550위를 봉안하였으나 1967년 5월 30일 강원도청 충무시설시공으로 철거됨에 따라 2000년 1월 1일 이곳 박사마을 소양강(북한강 줄기) 호수변에 경찰의 상징인 참수리가 힘차게 날아오르는 모습을 형상화한 조형물을 설치하고 현재 전사 524위, 순직 160위 등 684위를 봉안하였다. 경찰충혼탑 옆에는 이승만대통령 느티나무로 불리우는 느티나무가 한그루 서 있으며 바로 앞 북한강변에는 오미나루터가 남아 있다. 예전에 진두마을로 불리던 이 지역과 강 건너 사농동의 가래목을 연결하던 이곳 오미나루터는 정확한 개설연대는 알 수 없으나 마을이 형성되었던 6세기경으로 추측되며 우마차가 건너던 규모가 큰 나루터였다. 1968년 의암댐이 준공된 후로는 동력선선착장으로 이용되었으나 신매대교(2000년) 개통으로 현재는 이용되지 않고 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
대전·세종·충청지역 ‘3월의 우리고장 현충시설’, 충북 청주시 진재공원 ‘6·25참전유공자기념탑’
【중앙보훈방송=김성훈 기자】 충남동부보훈지청(지청장 임규호)은 대전·세종·충청지역 2020년 3월, 이달의 우리고장 현충시설로 충북 청주시 진재공원 내에 있는 ‘6·25참전유공자기념탑’을 선정되었다고 밝혔다. 보훈지청에 따르면 청주시 ‘6·25참전유공기념탑’은 전쟁에서 산화한 이 고장 출신 참전유공자의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고귀한 정신과 충정을 기리고 숭고한 애국심과 애향심을 후대에 널리 계승시키기 위해 2006년 3월 1일 건립되었다. 보훈지청 관계자는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6·25참전유공자기념탑’을 3월 우리고장 현충시설로 선정함에 따라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이 땅에 평화가 뿌리내리는데 기여한 참전유공자에 대해 다시 한 번 감사의 마음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전했다. [김성훈 기자 mijukim11@naver.com]
-
대전·세종·충청지역 ‘2월의 우리고장 현충시설’, 충남 당진 '현충탑'
【중앙보훈방송=김성훈 기자】 충남동부보훈지청(지청장 임규호)은 대전·세종·충청지역 2020년 2월, 이달의 우리고장 현충시설로 충남 당진시 송악읍에 위치한 나라사랑 공원 내에 있는 ‘현충탑’이 선정되었다고 밝혔다. 보훈지청에 따르면 당진 현충탑은 높이 20m, 폭 21m로 탑신은 부채꼴 모양으로 땅의 기운들이 서시히 주 탑에 모아져 하늘로 상승하는 형태이며 기개가 비상하는 정신을 형상화하여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장렬하게 산화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의 숭고한 넋을 위로하고 그 애국충정을 후세에 길이 계승하여 보훈의식을 함양하고자 2005년 현 위치에 건립하였다. 현충탑에는 당진군 출신으로 한국전쟁 당시 전사한 호국영령들의 각인과 위패가 안치되어 있어 방문객에게 호국영령의 명복을 빌고 참배를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또한, 6,128평 규모의 나라사랑 공원 내에는 참전용사비와 미사일, 전투기 등의 전시무기 등도 전시되어 있어 청소년의 나라사랑과 안보의 산 교육장으로서도 널리 활용되고 있다. [김성훈 기자 mijukim11@naver.com]
-
대전·세종·충청지역 ‘1월의 우리고장 현충시설’, 대전보훈공원
【중앙보훈방송=김성훈 기자】 충남동부보훈지청(지청장 임규호)은 대전·세종·충청지역의 “1월의 우리고장 현충시설”로 대전 중구에 위치한 ‘대전보훈공원’을 선정했다고 밝혔다. 대전보훈공원은 나라를 위해 싸우다 장렬히 산화한 호국영령들의 위훈을 기리고 현충시설을 국민들이 즐겨 찾는 애국정신 함양과 역사교육 현장 체험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영렬탑을 2008년 보문산 공원 내 사정동으로 이전하면서 새롭게 조성한 추모공원이다. 보훈공원의 면적은 3만 7054㎡ 이며 중앙에 우뚝 솟은 30m 높이의 탑이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영렬탑이다. 영렬탑의 앞쪽에는 승리와 개선의 수호상이 뒤쪽에는 6·25전쟁에서 나라를 위해 싸우다 장렬히 산화하신 전몰군경의 위패봉안소가 있다. 위패봉안소 좌·우측에는 호국영령들의 활약상과 오늘날 대전의 모습이 부조로 새겨져 있으며, 추모의 길이 좌측에는 6·25참전기념물이 우측에는 월남참전기념물이 있다. [김성훈 기자 mijukim11@naver.com]
-
전남 영광 현충시설4, 독립운동가 일강 김철선생 숭모비
【중앙보훈방송=김희자 기자】 ‘독립운동가 일강 김철선생 숭모비’는 조국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일강(一江) 김철(金澈)선생의 애국애족 정신의 참 뜻을 기리기 위하여 영광군·함평군과 영산 김씨 문중에서 1975년 8월,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면 우곡리 506-1 자리에 건립했다. 김철 선생(1886~1934)은 1886년 당시는 영광군 관할 행정구역인 전라남도 함평군 구봉마을에서 천석꾼의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은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고, 1915년 일본에서 메이지대학(明治大學)을 졸업한 후 일제강점기에 귀국했다. 선생은 고향으로 돌아오자마자 집안의 농지를 소작인에게 나눠주었고, 노비들에게도 한보따리씩 챙겨주며 자유롭게 살도록 했다. 나머지 재산도 다 정리해서 1917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임시정부의 건물 문제도 선생이 해결했다. 초기 임시정부 청사의 소유권자가 김철 선생이었다. 김철 선생은 1919년 1월 상하이에서 여운영 등과 신안청년당을 결성하고, 2월에는 신한청년당 대표 자격으로 손병희 선생 등과 만나 3·1독립운동 계획을 협의했다. 선생은 서병호, 선우혁 등과 함께 국내에 잠입했다가 그해 4월 다시 상하이로 들어가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고 전라도 대표 의정원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나이 30대 초반이었다. 1926년 12월에는 김구 내각의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냈고, 1927년 8월 이동영 내각 때는 군무부장을 지냈다. 1932년 윤봉길 의거 후 항저우로 옮겨 김구는 군무를 맡고 선생은 재무담당 국무위원이 되었다가 무임소장 국무위원 비서장에 피선되었다. 선생은 김구 선생과 함께 갈수록 심해지는 일제의 폭압에 맞서 한인애국단을 결성하고, 비밀리에 일제 지도부에 대한 암살 계획을 세웠다. 아울러 윤봉길·이봉창 의사의 의거를 통해 독립운동에 활력 불어넣었다. 자신의 젊음과 재산을 모두 독립운동에 바친 선생은 혹독한 고문의 후유증에다 급성폐렴이 겹쳐 1934년 6월 29일 항저우에서 48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김희자 기자 khj-pizza@hanmail.net]
-
전남 영광 현충시설3,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 김철선생 기념비
【중앙보훈방송=김희자 기자】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 김철선생 기념비’는 전남 영광군 불갑면 모악리 산47번지, 불갑사 입구에 1984년 6월 건립했다. 김철(金澈)선생(1886~1934)은 1886년 당시는 영광군 관할 행정구역인 전라남도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1915년 일본 메이지대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 상하이로 망명했다. 선생은 1919년 1월 상하이에서 여운영 등과 신안청년당을 결성하고 서병호, 선우혁 등과 함께 국내에 잠입했다가 그해 4월 다시 상하이로 들어가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고 전라도 대표 의정원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6년 12월에는 김구 내각의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냈고, 1927년 8월 이동영 내각 때는 군무부장을 지냈다. 1932년 윤봉길 의거 후 항저우로 옮겨 김구는 군무를 맡고 선생은 재무담당 국무위원이 되었다가 무임소장 국무위원 비서장에 피선돼 활동 하던 중 급성폐렴으로 1934년 6월 29일 사망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김희자 기자 khj-pizza@hanmail.net]
-
전남 영광 현충시설2, 순국선열 황덕환 선생 추모비
【중앙보훈방송=김희자 기자】 순국선열 황덕환 선생 추모비는 독립유공자 황덕환선생의 항일 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1985년 11월, 전남 영광군 영광읍 우산공원 내에 건립한 비이다. 황덕환(1895~1932)선생은 신민주에서 친일파 제거에 기여한 독립운동가로 1916년 중국 상해로 망명해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그 후 1919년 국내로 잠입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왜경에 체포되어 3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다시 서울에서 청년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다 만주로 망명하여 신민주에서 군사위원장 김좌진 휘하에서 별동대장에 임명되어 맹렬한 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친일단체인 하얼빈 조선인민회 토벌과 악명 높았던 해림시 조선인민회장 배두산(裵斗山) 제거에 큰 공을 세웠다. 그 후 체포되어 여순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일인이 한국인에 대하여 매일같이 모욕적인 언사를 하므로 적개심에 불타 일인을 칼로 찔러 죽였다. 이 사건으로 선생은 사형을 언도 받아 1929년 9월 20일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희자 기자 khj-pizza@hanmail.net]
-
전남 영광 현충시설1, 의병장 이화삼 선생 추모비
【중앙보훈방송=김희자 기자】 의병장 이화삼 선생 추모비는 1987년 8월 29일, 이화삼 의병장의 후손과 영광향교 및 사회단체가 이화삼의병장의 애국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전남 영광군 영광읍 우산공원 내에 세웠다. 의병장 이화삼선생(1866~1910)은 1890년대 동학혁명운동에 참여했으며, 그 후 후진양성에 힘을 기울이던 중 1906년 봄 의병장인 이대극이 영광에서 기병하자 그의 후군장으로 법성포, 무장, 장성 등지에서 활동했다. 선생은 1908년 4월 18일 무장, 고산 등지에서 일본 기병을 쳐부수고 동년 5월 8일에는 불갑산 연실봉 전투에 참여했다. 선생은 1909년 4월 이대극이 전사하자 부대를 수습하여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1910년 1월 영광과 백양산 등지에서 전투성과를 거두었으며 본 진영과 합류하여 대혈전을 벌이던 중 1910년 1월 28일 일본군의 총탄에 맞아 순국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에게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여 그 업적을 후세에 기리고 있다. [김희자 기자 khj-pizza@hanmail.net]
-
[영상] 동두천시 보훈탐방 2, 자유수호평화박물관···경기도 동두천시 상봉암동 소요산 내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경기도 동두천시 ‘자유수호평화박물관’은 부지 40,000㎡, 야외전시장 3,747㎡, 지상 4층 3,331㎡(1층 로비, 2층 전시실, 3층 영상·전시실, 4층 기획실) 규모로, 동두천시 상봉암동 소요산 내에 자리잡고 있다. 2002년 5월 20일에 개관한 박물관은 잊혀져가는 6.25전쟁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희생하신 분들의 뜻을 기리며 유엔 참전국과의 우호 증진을 위해 건립되었다. 야외전시장에는 6.25전쟁부터 최근까지 군에서 사용하던 T33A항공기, C123 수송기, M48A2C 전차, M577 지휘용 장갑차, 5인치 2연장 함포, 3인치 단연장 함포 등 총 15점의 대형 장비를 전시하고 있다. 그 외에 베트남전 참전기념탑과 노르웨이 참전비가 있다. 1층 전시장은 로비 및 기획전시, 아카이브와 체험행사를 운영한다. 2층 전시장은 주 전시관으로 유엔 참전 21개국의 유물 및 자료를 전시·소개한다. 3층은 영상관으로 6.25전쟁 기록물과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 포로수용소에 관한 자료를 영상으로 소개한다. (영상취재 : 오재욱, 박정미 기자 / 편집 : 오재욱 기자)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
[영상] 도산공원 및 도산안창호기념관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도산공원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애국정신과 교육정신을 기리고자 1973년 11월 10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개장한 공원이다. 공원 주요 시설은 도산안창호기념관, 도산 안창호 선생과 부인 이혜련 여사의 묘소, 안창호 선생의 동상 1기, 어록비 4기, 비문 해설 1기, 체육시설, 산책로 등이 있다. 2008년에는 도산안창호기념관 및 도산 안창호 동상이 국가보훈처지정 현충시설로 지정되었다. 1998년 11월 9일 건립한 도산안창호기념관은 지상1층, 지하2층 규모로 지상1층(도산홀)에는 전시관, 영상실, 사무국이, 지하1층(대성홀)에는 도산학회, 회의실, 임원실, 지하2층(점진홀)은 강당, 수당고, 창고가 있다. 기념관에는 도산의 생애와 사상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문서·사진·서적 및 잡지·유물 등 17,000여점의 자료가 있다. 이 중 임시정부 시절 및 캘리포니아 오렌지 농장에서 찍은 사진 등 도산 선생과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모습을 담은 사진 80여점과 이동휘 선생 및 독립운동을 함께 했던 동지와의 편지 등 당시 시대상을 알 수 있는 서한 19점, 대한민국임시정부 사료집, 도산일기, 유품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도산어록, 연보와 사진은 터치스크린으로 볼 수 있다[참조자료 : 강남구향토문화전자대전, 위키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
[영상] 2·28기념중앙공원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2·28기념중앙공원은 대구광역시 중구 동성로 2길 80에 위치한 공원으로 2·28 학생민주의거를 기념해 2003년 12월 조성되었다. 면적은 14,279㎡(4319평)으로 비교적 작은 편이나, 대구 최대 번화가인 동성로에 위치해있어 유동 인구가 많다(영상촬영·편집 : 오재욱 기자). 공원조성연혁 이 터는 옛 중앙초등학교 자리로서 대구를 빛낸 많은 인물들을 길러낸 요람이자 우리나라 민주화의 진원이 된 2.28 민주운동의 거룩한 자취가 서린 곳이다. 대구시가 만촌동으로 옮겨간 이 학교 자리에 2.28기념중앙공원을 조성한 것은 그 같은 뜻을 길이 전하기 위함이다. 1960년 2월 28일 자유당 독재와 불의에 맞서 들고 일어선 대구학생의거는 들불처럼 번져 3.15 마산의거를 촉발하였고 위대한 4.19혁명을 성취시켰다. 이곳에 민주화를 선구한 대구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간직하고 시민 모두의 영원한 삶의 터전으로 가꾸게 하리라 서기 2003년 12월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
[영상] 국채보상운동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기념비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채보상운동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기념비’는 국채보상운동기념관 정문 앞마당에 세워져 있다. 기념비는 2017년 10월 31일에 총 수기, 언론, 정부기록물 등 2,475건의 국채보상운동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것을 기념하고 알리기 위해 조성됐다. 기념비 제막식은 2019년 2월 21일 권영진 대구시장, 김혜정 대구시의회 부의장, 박신한 대구지방보훈청장 등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은 국가가 진 빚을 국민이 갚기 위해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일어난 국채보상운동 전 과정을 보여주는 기록물이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은 유네스코가 사회·문화적으로 가치가 높은 인류의 소중한 기록유산을 보존하고 활용하려는 목적으로 1997년부터 2년마다 지정하는 세계문화유산이다(영상촬영·편집 : 오재욱 기자).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
[영상] 국채보상운동기념비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채보상운동기념비는 대구시 중구 태평로 141, 대구콘서트하우스 오른쪽 끝 앞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북후정이라는 정자가 있던 곳으로, 1907년 2월 21일 국채보상운동의 시작을 세상에 알리는 대구 군민대회가 열린 역사적인 장소이다. 형상은 높이 420㎝, 가로 360㎝, 세로 360㎝의 규모로 남녀노소 온 백성이 엽전을 모아 의연(義捐)하는 모습을 담았다. 기념비는 1997년 2월 21일, 대구상공회의소가 창립 90주년 기념사업으로 국채보상운동을 주창한 대구민의소(지금의 대구상공회의소) 서상동, 김광제 회장 등 선각자들의 높은 뜻을 받들고자 건립했다. 찬사 겨레 바탕 뛰어나나 갈기갈기 갈라지자힘 모자라 억울하고 가난하여 서럽더라 이웃이라 도우는 척 덮어씌운 빚 덩어리벗어 보자 횃불 든 곳 우리 대구 여기더라 삼천리 방방 곡곡 남녀 노소 가슴가슴그 불길 활활 타서 광복으로 이어졌네 국채보상기념비 1907년 1월29일 김광제, 서상돈 등이 중심이 되어 국채보상운동을 발기하였으며, 동년 2월21일 대구민의소(현 대구상공회의소 전신)가 북후정에서 국채보상 모금을 위한 대구군민대회를 개최하여 국채보상취지서를 낭독하였는데, 국채보상기념비는 이 뜻을 기리고자 건립되었다. 대구 북후정에서 군민대회가 개최되고 국채보상발기문과 국채보상취지서가 신문에 게재되자 이 운동은 실로 신분과 성별과 직업과 지역을 초월한 거국적 민족운동으로 확산되어 나가게 되고, 재외동포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 운동은 의연금의 출연은 말할 것도 없고, 단연·패물의연·땔감나무기부·식생활절약 등을 통해 외채를 갚는 경제주권회복운동이었다. 또한 일반평민이 주동이 된 한국최초의 시민운동이었으며, 부녀자들이 대거 참여한 한국최초의 여성운동이고, 나아가 전국민적 시민기부운동이기도 하였다(영상촬영 / 편집 : 오재욱 기자).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
충남서부보훈지청, 2018년 12월 우리고장 현충시설 ‘나라사랑기념탑’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충남서부보훈지청이 2018년 12월 우리고장 현충시설로 충남 서산시 동문동 161번지에 위치한 ‘나라사랑기념탑’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나라사랑기념탑은 독립유공자, 참전유공자 등 나라를 위해 공헌한 국가유공자분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후세를 위한 역사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건립된 현충시설이다. 충남서부보훈지청 관계자는 “매달 이종일선생생가, 윤봉길의사기념관(충의사), 홍주(읍)성, 현충탑 등 관내 의미 있는 현충시설을 소개하였는데, 관내 현충시설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더 많아지길 바라며 앞으로도 현충시설에 대한 인식 제고를 위해 힘쓰겠다.”고 전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
충남서부보훈지청, 2018년 11월 우리고장 현충시설 ‘김한종 의사 생가지’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충남서부보훈지청이 2018년 11월 이달의 우리고장 현충시설에 충남 예산군 광시면 소재 ‘김한종 의사 생가지’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충남 예산 출신인 일우 김한종 의사는 1906년 홍주의병에 종군해 항일활동을 펼쳤다. 1917~18년에는 대한광복회 충청지부장으로 친일부호 처단 등 의열투쟁을 전개하다가 일제에 붙잡혀 옥고를 치르던 1921년 8월,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했다. 한편, 김한종 의사의 애족·애국정신을 기리고 미래세대에게 올바른 역사를 전하기 위해 2000년 7월에 김한종 의사 기념관 및 생가지를 조성하여 해설사 운영, 문예대회 개최 등의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자료제공=충남서부보훈지청).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