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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07-05 13:12:46
  • 수정 2018-07-05 13: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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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보훈방송=오재욱, 박정미 기자“(일본)대학생이었는데, 지금은 자료가 없어졌지만 그 당시에 오야마 레이지목사님을 중심으로 해서 제암리소타사건 사죄위원회을 만들어서 민간단체에서 사죄를 하겠다며 모금운동도 벌이고 이곳을 주기적으로 방문도 하기도 했는데, 그러한 자료들을 보고 우는 거예요. (일본)학생이. 그래서 왜 우느냐고 했더니, 너무 미안하고 너무 충격적이고 놀랍다고”(서영주 화성시 문화관광해설사

 

191931, 전국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은 일제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려는 독립운동이자 자유·민주·평등의 가치를 추구하는 비폭력 운동이었다.


그러나 화성지역에서 일어난 3.1운동은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불태우고 순사 2명을 처단하는 등 무력항쟁으로 전개되었다.


1919415, 수원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헌병 제78연대소속 아리타(11田俊夫) 중위는 보병 11명을 이끌고 제암리로 들어와 마을의 15세 이상 남자들을 제암리 교회로 모은 뒤, 창문과 출입문을 모두 봉쇄하고서 석유를 뿌린 후 불을 지르고 건물 안을 총으로 난사하며 학살했다.


남편을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여인 2명을 살해하고 제암리 마을 33가구 중 빈집 1가구만 남기고 모두 불을 질렀는데 멀리 오산에서도 이 불길이 보였다고 한다.


일본군은 인근 고주리로 건너가 독립운동가 김흥렬 일가 6명을 참살하고 방화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사건 후에도 일본군의 심한 감시로 희생자의 장례조차 치르지 못했으며, 417일 의료선교사 스코필드가 유골들을 향남면 도이리 공동묘지 입구에 안장했다. 언더우드는 참사현장을 보고서로 작성해 미국으로 보냈으며, 스코필드는 몰래 현장사진을 찍어 일제의 야만행위를 국제사회에 알렸다.


제암·고주리 사건은 일제가 화성지역 독립운동의 근거지에 대한 전복과 3.1운동의 확산을 저지하고자 자행한 반인도적인 학살사건이다(취재 : 오재욱, 박정미 기자 / 촬영편집 : 오재욱 기자).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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