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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의 6.25전쟁영웅, 김해수 경찰 경감과 석상익 경찰 경위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가 ‘김해수’ 경찰 경감과 ‘석상익’ 경찰 경위를 7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1950년 7월 1일 적의 대대적 공세에 강원도 경찰은 대부분 남하한 상태에서도, 강원도비상경비사령부는 10만kw 규모의 화력발전소가 있는 영월을 방어하기 위해 전경 제8대대와 홍천·인제의 병력 100여 명으로 영월 방어부대를 편성해 강원도경찰학교장인 김인호 총경을 부대장으로 임명했다. 2일부터 수차례의 공방전 끝에 일시 영월 점유에 성공했으나 적의 반격으로 영월을 포기하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7일 아침, 상동지역 전경 제8대대 제1중대장 김해수 경감을 대장으로 47명의 결사대를 편성해 영월 재공격을 준비했다. 8일 14시경 결사대가 녹전리의 송현고개를 막 넘어섰을 무렵 예상치 못하게 북한군과 조우하자 선제공격으로 북한군 일진을 격퇴시키고 계속 추격하여 백병전까지 벌였다. 그러나 북한군의 대병력이 아군을 포위하여 공격했다. 이에 대항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전투를 진두지휘하던 김해수 경감이 적의 박격포탄에 장렬하게 전사했다. 이어 석상익 경위가 결사대를 지휘하며 용전했으나 석상익 경위마저 전사하여 결국 전투는 24명 전사, 7명 부상, 적 73명 사살의 기록을 남기고 끝이 났다. 전투가 벌어졌던 영월군 녹전리에는 이 분들을 기리는 현충시설 ‘호국경찰전적비’가 세워져 있으며 매년 추념행사가 열리고 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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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의 6.25전쟁영웅, 임부택 육군 소장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가 임부택 육군 소장을 6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임부택 소장은 제1연대가 창설되는 과정에서 대한민국 국군 최초의 군번 110001번을 부여받았고 1946년에 육군사관학교(국방경비사관학교) 제1기생으로서 소위로 임관했다. 1950년 1월, 제6사단 제7연대장으로 부임한 후 북괴군의 남침 징후를 사전에 인지하고, 춘천 주민과 학도호국단의 지원을 받는 등 민·관·군 협력 하에 방어에 유리한 소양강변과 그 북쪽에 방어진지를 구축하여 사전 전투준비 태세를 확립했다.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 25일 북한군 제2사단이 춘천을 정면공격하자, 7연대는 임부택 연대장의 효과적인 지휘로 병력과 장비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지형의 이점을 이용하여 적의 집요한 공격을 격퇴했다. 북한강과 소양강 북방을 고수하면서, 포병은 화력을 집중해 남진하는 적에게 심한 타격을 입히는 등 강력한 항전으로 막강한 화력의 북한군을 3일 동안 막아냈다. 전쟁초기 3일간 춘천지역에 대한 7연대의 성공적인 방어는 수도권에 집중적으로 투입된 국군 주력부대로 하여금 전열을 재정비하게 하여 한강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갖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또한, 북한군이 6월 25일 개전 당일 춘천을 점령하고 수원으로 진격하여 국군의 증원부대와 한강 이북의 국군을 포위·섬멸하려던 초기 계획을 좌절시켰다. 7연대는 7월 초순, 충북 음성 동락리 전투에서 남진 중인 북한군 15사단 48연대를 매복·기습공격으로 격멸하여, 개전 이래 국군의 가장 통쾌한 승리를 거둠으로써 부대원 전원이 1계급 특진의 영예를 부여받기도 했다. 동락리 전투의 승리로 국군이 진천-음성으로 이어지는 방어선을 형성하여 전열을 재정비할 수 있는 시간적 여건을 마련했다. 1951년 4월 중공군의 2차 춘계 공세 때에는 용문산에서 중공군 3개 사단의 공격을 받았으나, 임부택 대령이 부사단장이던 제6사단은 반격하여 전멸에 가까운 대승을 거뒀다. 6.25전쟁 사상 최대의 전승을 기록했으며, 제5사단 부사단장으로서 1951년 11월 공방전이 치열했던 동부전선의 351고지를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1953년 7월 11사단장 재임시에는 휴전전투라고 일컫는 삼현지구 반격 작전에서 중공군 4개 사단의 공세를 저지하여 현재의 휴전선을 확보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임부택 소장은 6·25전쟁 기간 내내 연대장, 부사단장, 사단장으로서 최전방에서 대한민국을 수호했으며, 적 지휘관이 임부택을 사로잡으라는 특별지시를 내릴 정도로 탁월한 지휘력과 용맹성을 발휘해 생전에 두 차례의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2001년 11월 향년 83세로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자료제공=국가보훈처).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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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의 6.25 전쟁영웅, 여군창설과 발전의 주역 ‘김현숙 육군 대령’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가 2018년 5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여군창설과 발전의 주역 ‘김현숙 육군 대령’을 선정했다. 김현숙 대령은 1915년 7월 4일 평양에서 출생해 일본 동경체육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평양 강동여자중학교 체육교사로 근무했다. 1949년 예비역 육군 소위로 임관한 김 대령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수많은 어린 남학생들이 군에 입대하는 모습을 보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여자의용군 모집을 건의해 1950년 8월에 여자의용군 모집에 관한 담화를 직접 발표했다. “국민으로서 여자만이 안일하게 국난을 방관하는 태도로 있을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으므로 앞으로 맹렬한 활동을 전개할 것이니 일반의 협조를 바란다. (중략) 남녀를 막론하고 이 시국을 재인식하여 국가총력으로 최후의 평화를 획득할 때까지 싸워야 할 것이다.” (여자의용군 모집 담화문 中) 김 대령은 1950년 9월 육군 제2훈련소 예속으로 여자의용군교육대를 창설하고 초대 교육대장으로 취임해 여자의용군 1, 2기 874명을 양성했다. 여자의용군은 6.25전쟁기간 동안 국군의 일원이 되어 정보 및 첩보수집, 선무활동, 모병업무 등의 현장에서 국가를 구한다는 신념으로 전방위 활약을 펼쳤다. 김현숙은 1953년 3월 한국 여군으로서는 최초로 대령으로 진급했다. 같은 해 9월 여군창설 3주년 기념식에서 최초의 여군기를, 1954년 8월에는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으로부터 공로훈장을 받았으며, 1960년 9월 초대 여군처장으로 전역했다. 여군창설과 발전의 주역 김현숙 대령은 1981년 11월 7일 지병으로 향년 66세에 별세해 동작동 국립현충원 내 국가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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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의 6.25전쟁영웅, ‘타흐신 야즈즈’ 터키 육군 준장
국가보훈처가 ‘타흐신 야즈즈’ 터키 육군 준장을 4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 야즈즈 준장은 터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제1차 세계대전, 터키 독립전쟁에 참전했고 6.25전쟁 당시 준장으로서 터키여단을 지휘했다. 터키여단은 1950년 10월 17일 부산항에 도착해 군우리 전투를 비롯하여 평양철수작전, 장승천 전투, 사기막 전투, 네바다 전초전 등 격전을 치뤘다. 야즈즈 준장이 지휘한 터키여단은 유엔군의 대규모 위력수색작전인 썬더볼트작전에서 김량장리와 151고지전투, 수리산 전투를 승리함으로써 유엔군의 전체 작전에 크게 기여했다. 1951년 1월 25일부터 27일까지 3일간 진행된 용인의 김량장리와 151고지 전투에서는 터키군 장병들이 총검에 의한 백병전으로 적을 무찌름으로써 ‘용감한 터키군’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당시 이 백병전 상황은 미국의 통신사 U.P.I 기자에 의해 생생한 모습으로 전 세계로 타전되었으며, 터키 여단은 이 전공으로 대한민국 정부와 미국 정부로부터 부대표창을 받았다. 터키여단은 연이어 1월 31일부터 2월 6일까지 영등포로 통하는 국도와 안산을 거쳐 소사 또는 인천으로 통하는 도로를 통제할 수 있는 중요한 감제고지인 수리산을 점령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는데 이 전투에서 수리산 점령의 최후 목표인 440고지를 총 4차례에 걸쳐 공격하여 2월 6일 마침내 고지 점령에 성공했다. 이 전투로 중공군은 수원 일대에서 물러났으며, 유엔군은 한강선 진출을 위한 결정적인 교두보를 확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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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4월의 호국인물, 최종봉 공군 소령
전쟁기념관이 4월의 호국인물(護國人物)로 최종봉(崔鍾奉) 공군 소령(1926. 11. 20 ~ 1951. 4. 16)을 선정했다. 최종봉 공군 소령(추서 계급)은 1926년 11월 20일 경상북도 청도면 무등동 280에서 5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나 1940년 3월에 청도공립 심상소학교(초등학교), 1943년 10월에 일본 다치아라이(太刀洗) 육군비행학교를 졸업했다. 광복 이후 일본에서 돌아와 1949년 2월 17일 육군항공사령부 조종하사관으로 입대해 1949년 10월 공군 창설 이후 L-4연락기를 조종했다. 1950년 4월 25일 공군 소위로 임관한 최 소령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L-4연락기 조종사로서 정찰, 전단 살포, 지휘관 및 부상병 수송 그리고 30파운드(약 14kg)의 폭탄과 수류탄으로 남하하는 적 지상군을 공격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최 소령은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방어 작전을 수행할 때 총 65회의 정찰임무를 통해 세밀한 적진 상황을 제공해 아군작전에 크게 기여했다. 1951년 3월 31일 최 소령은 이세영, 오춘목, 이강화 대위와 백구부대로 전속되어 여의도기지(K-16)로 이동해 딘 헤스(Dean E. Hess) 중령과 출격하여 평강(平康) 북쪽 신대리 적 후방보급로 공격을 시작으로 4월 10일까지 북한 서부지역의 주요 보급로 차단, 보급품집적소, 차량·군용시설 등의 군사목표물을 파괴했다. 최종봉 소령은 4월 16일 이세영 대위, 메케프(George N. Metcafe) 대위, 길스파이(James J. Gilliespie) 중위와 함께 강원도 이천(伊川)지구 적 후방보급로 차단을 위해 출격 임무를 수행하던 중 적 지상포화에 피탄되어 적진에서 전사했다. 정부는 최종봉 소령의 공훈을 기려 1계급 특진과 함께 을지무공훈장(1951년 7월 1일)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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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3월의 호국인물(護國人物), 이상득(李相得) 육군 하사
이상득 하사는 1944년 경상북도 포항시 동해면에서 태어나 동해초등학교와 동해중학교를 졸업하고 포항고등학교 2학년을 수료한 후 1965년 6월 육군에 입대했다. 이하사는 제20사단 61연대에 배속되어 근무하다 1966년 5월 베트남전쟁 파병을 지원해 국군 제9사단(백마부대) 소속으로 참전했다. 1966년 제9사단은 베트남의 요충지인 깜란(Cam Ranh)에서 투이호아(Tuy Hoa)에 이르는 1번 국도변에 배치되어 작전을 펼쳤다. 주월한국군사령부는 1967년 3월부터 5월까지 베트남 중부 해안지역의 베트콩 근거지 소탕과 남북으로 이어져 베트남의 대동맥에 해당하는 1번 국도의 개통을 계획하고 남쪽에 주둔한 제9사단과 북쪽 뀌년(Quy Nhon)에 주둔한 수도사단의 작전지역을 확장⦁통합하는 오작교작전을 시행했다. 이상득 하사(당시 병장)는 제9사단 28연대 3대대 11중대 3소대 소속 부분대장으로 오작교작전에 참가했다. 작전 첫날인 1967년 3월 8일 이하사가 소속된 11중대는 다랑(Da Rang) 강변의 가옥을 수색하고 있던 중 가옥 내부에 숨겨진 지하 토굴을 발견한 이 하사가 선두에 서서 토굴 내부로 진입한 순간 적이 수류탄을 투척했다. 이를 발견한 이하사는 자신의 몸으로 수류탄을 덮쳐 동료들의 목숨을 구하고 장렬히 산화했다. 정부는 이상득 하사의 투철한 군인정신과 희생정신을 높이 평가하여 1계급 특진과 함께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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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의 6.25전쟁영웅, ‘마리누스 덴 오우덴’ 네덜란드 육군 중령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가 2월의 6.25전쟁영웅에 ‘마리누스 덴 오우덴’ 네덜란드 육군 중령을 선정했다. 마리누스 덴 오우덴 중령은 네덜란드 왕립 육군사관학교 졸업 후 1932년 7월 31일 네덜란드 왕립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수많은 전투를 치른 후, 1950년 6월 한국전에 참전하기 위해 조직된 유엔군의 네덜란드 대대에 자원했다. 1950년 10월 21일 오우덴 중령은 당시 소령으로 네덜란드 대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1950년 10월 26일 한국으로 출발, 1950년 11월 23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1척의 구축함과 함께 총 5,322명 파병) 오우덴 중령과 그의 대대는 전선의 급박한 상황으로 인하여 부산에 도착한지 1주일 만에 전선으로 파견되었으며, 12월 중순의 혹한 속에서 미2사단(인디언헤드 사단) 38연대에 배속되어 전선 후방으로 공격하는 북한군과 중공군을 방어하는 작전을 수행했다. 오우덴 중령의 대대는 1951년 2월 5일 북한군과 중공군을 북쪽으로 밀어내기 위한 ‘라운드업 작전’에 참여했다. 2월 11일 북한군과 중공군은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하였으며, 홍천-횡성간 도로에서 벌어진 혹한과 어둠속에서 밀고 밀리는 전투 끝에 오우덴 중령의 부대는 큰 피해를 입으며 후퇴하는 국군을 엄호했다. 이 전투에서 오우덴 중령을 포함하여 15명이 전사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공세를 저지하고 유엔군은 반격의 기회를 갖게 됨으로써 이후 전쟁의 양상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오우덴 중령이 참전한 주요전투는 인제 전투, 대우산 전투, 평강-별고지 전투, 횡성전투 등이다. [자료제공 :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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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의 전쟁영웅, 김 신 공군 중장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가 백범 김구 선생의 차남이자 제6대 공군참모총장을 역임한 김신 공군 중장(1922.9.21 ~ 2016.5.19)을 2018년 1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자 다음날인 6월 26일에 이근석 대령 등 10명과 함께 미군으로부터 F-51 무스탕(Mustang) 전투기를 인수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당시 미측이 제의한 F-51 전투기 인수 조종사 선발조건은 ‘훈련 없이도 전투기를 탈 수 있는 조종사’였다. 김 신 중령은 인수에 참여한 10명 중 유일하게 미 공군에서 F-51로 훈련받은 경험을 보유하고 있어 통역과 함께 비행기에 대한 기초적인 설명을 맡아 비행훈련 진행과 전투기 인수에 크게 기여했다. F-51 인수는 대한민국 공군의 본격적인 전투 임무 수행의 결정적 출발점이었다. 단 한 번의 비행훈련 끝에 F-51 전투기를 인수해 7월 2일 귀국한 김 신 중령 등은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은 위급상황에서 이튿날인 7월 3일부터 전투 출격하여 묵호, 삼척 지구와 영등포, 노량진 지구전투 등에서 적 부대와 탄약저장소 등을 공격했다. 이후에도 지리산 공비토벌작전(’51년 8월), 대한민국 공군 단독출격작전(’51년 10월) 등 전쟁기간 중 총 19회 출격했다. 특히, 제10전투비행 전대장으로 재임할 때 미 공군이 수차례 출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한 승호리철교 폭파임무를 맡았다. 승호리 철교는 평양 동쪽 10km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평남 중앙선이 지나는 대동강 지류인 남강에 설치된 철교로 군수물자를 중·동부 전선으로 수송하는 적 후방보급로의 요충지였다. 1, 2차 출격에도 임무에 실패하자 김 신 대령은 휘하 지휘관 참모와 전술적 문제를 논의해 적의 극심한 대공포화의 위협을 감수하고라도 고도를 강하하여 폭탄을 투하하는 새로운 공격전술을 창안했으며, 1952년 1월 15일에 마침내 승호리철교 폭파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자료제공 : 국가보훈처 / 사진자료 : 네이버블로그-킷캣(hano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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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의 전쟁영웅, 감봉룡 경찰 경감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가 12월의 전쟁영웅으로 ‘감봉룡’ 경찰 경감을 선정했다. 감봉룡 경감은 6·25전쟁 발발 당시 황해도 개성지역 철도경찰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개성은 서울과 평양을 잇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북한군의 공세가 시작되었고, 적 정예 제1사단, 제6사단과 13대의 T-34전차의 집중 공세를 막아내지 못한 국군 제12연대는 김포반도로 철수해야 했다. 개성경찰서 병력도 연대와 함께 철수했다. 그러나 이때 감봉룡 경감이 지휘하는 철도경찰대는 50명 전 대원 모두 본부를 사수하기로 결의하고 본부 주변의 요충지를 점거해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철도경찰대의 저항이 워낙 완강한데다 개전 후 처음으로 조직적인 저항을 받은 북한군은, 다른 통로로 진출하던 5대의 전차까지 동원해 본부 건물을 포격하기 시작했다. 포위망은 좁혀져 왔다. 총탄이 부족하고 통신마저 두절된 상태에서 감봉룡 경감과 대원들은 굴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끝까지 돌격하여 장렬히 산화하였다. 우월한 자동화기와 대규모 병력, 게다가 전차까지 가세한 적을 막아내기에는 애초 역부족이었지만, 이들의 분전은 전쟁초기 북한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히면서 그들의 사기를 저하시킨 숭고한 희생이었다. 정부는 감봉룡 경감의 고귀한 뜻과 희생정신을 높이 평가하여 2014년 충무무공훈장을 추서했다. [자료출처 :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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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영웅 고태문 명예도로 표지석 제막식 열어
제주특별자치도보훈청(청장 황승임)이 호국영웅 고태문 대위 명예도로 표지석 제막식을 개최했다. ‘명예도로 고태문로’는 강원도 인제지구 펀치볼 동북부 884고지에서 중대장으로 적과 백병전까지 전개하며 고지 사수전을 벌여 전쟁을 승리로 이끈 고태문 대위의 희생정신을 후세대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지정했다. 고태문로는 고 대위의 출신지역인 구좌읍 한동리 해안도로 2.4km 구간이다. 11월 8일 오전 11시 열린 이날 제막식에는 故 고태문 대위 유가족과, 전성태 행정부지사, 김경학, 부공남 의원을 비롯하여 보훈·안보단체장, 지역주민 등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막식, 축사, 헌시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표지석은 앞면이 길이 3.5m, 폭 0.46m, 높이 2.5m로 강승우 중위 연혁과 공적이 명각되어 있으며, 후면은 길이 2.04m, 폭0.46m, 높이 2m로 헌시를 명각하여, 호국영웅의 숭고한 희생과 공훈을 기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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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영웅 강승우 명예도로 표지석 제막식
제주특별자치도보훈청(청장 황승임)이 호국영웅 강승우 중위 명예도로 표지석 제막식을 개최했다. 11월 6일 오전 11시에 열린 이날 제막식에는 故 강승우 중위 유가족과, 전성태 행정부지사, 도의회 강성균 교육위원장 등 도의원, 이상순 서귀포시장을 비롯하여 보훈·안보단체장, 지역주민 등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막식, 축사, 헌시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명예도로 강승우로’는 6․25한국전쟁에서 최대 격전지였던 백마고지 전투에서 육탄으로 적 기관총 진지로 돌격, 격파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끈 강승우 중위의 희생정신을 후세대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지정한 것이다. 명예도로는 강 중위의 생가터를 중심으로 성산읍 시흥리 해안(올레1코스 일부 해당) 1.6km 구간이다. 표지석은 앞면이 길이 3.5m, 폭 0.46m, 높이 2.5m로 강승우 중위 연혁과 공적이 명각되어 있으며, 후면은 길이 2.04m, 폭0.46m, 높이 2m로 헌시를 명각하여, 호국영웅의 숭고한 희생과 공훈을 기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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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의 전쟁영웅, ‘앙리 모로 드 믈랑’ 벨기에 육군 소령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2017년 11월의 전쟁영웅으로 ‘앙리 모로 드 믈랑’ 벨기에 육군 소령을 선정했다. 벨기에 상원의원이자 국방부장관으로 재직 중이던 앙리 모로 드 믈랑은 1950년 6‧25전쟁 지원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국무회의에서 장비만 지원하자는 다수의 제안을 일축하고 파병을 주도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1951년 5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국방부장관직을 내려놓고 통신장교로 6‧25전쟁에 참전했다. 그때 그의 계급은 놀랍게도 소령에 불과했다. 앙리 모로 드 믈랑의 6‧25전쟁 참전을 위해 상원의원이 해외 참전을 금지한 당시 벨기에 법률을 개정하기까지 했다. 앙리 모로 드 믈랑은 1951년 2월 임진강 북쪽의 금굴산 진지를 방어하여 중공군의 진출을 저지하였고 이를 통해 영국 제29여단의 철수를 지원하였다. 1992년 영면한 앙리 모로 드 믈랑은 1988년 펴낸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벨기에도 한국처럼 열강에 둘러싸인 소국이기 때문에 같은 처지의 한국을 도와야 했다. 전쟁은 끔찍한 일이다. 하지만 인간은 전쟁 한가운데서 전우를 위해 목숨을 희생할 수 있는 위대한 창조물이다.” 그는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내려놓은 채 더 큰 가치인 인류애를 행동으로 보여주었고,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여 세계인의 귀감이 되었다.[자료출처 :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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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의 전쟁영웅, 김경진 육군 중령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김경진’ 육군 중령을 10월의 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김경진 중령은 1920년 9월 8일 경북 의성에서 태어나 1949년 5월 육군사관학교를 8기로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했다. 그는 국군 제9사단 소속으로 1950년 11월 전북 대둔산과 경북 김천·상주지구 공비토벌작전, 12월 강원도 설악산·오대산지구 전투, 1952년 7월 김화지구 전투에 참가해 큰 전공을 세웠다. 1952년 10월 김경진 소령(당시)은 제29연대 2대대장으로서 백마고지 전투에 참가하게 된다. 당시 백마고지는 철원평야 서북단에 위치한 396m 독립고지로서 작전상 요지 중의 요지였다. 전쟁 중 고지의 주인이 무려 스물네 번이나 바뀌고 하루 평균 5만발에 가까운 포탄이 쏟아져 세계 전사에 유례없는 치열한 고지공방전으로 불릴만큼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던 것이다. 1950년 10월 11일, 백마고지의 정상탈환 역습명령을 받은 김경진 대대장은 고지를 확보한 중공군이 진지를 강화하기 전 신속히 역습을 감행하기 위해 5중대를 주공으로 투입했다. 그러나 정상을 100m 가량 앞둔 지점에서 적의 박격포와 직사화기 공격에 막혀 진격이 중단되자 대대장 자신이 포복으로 최전방인 5중대로 나아가 전투를 독려했다. 정상 20m 앞까지 진격한 김경진 소령은 최후의 돌격사격을 감행하던 중 적의 박격포탄에 의해 현장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고인의 살신성인에 힘입어 10월 14일 9사단은 마침내 백마고지 일대를 완전히 탈환, 확보했으며 철의 삼각지의 좌측인 철원지역을 계속 장악하게 되었다. 1954년 6월 25일 정부는 김경진 소령에게 1계급 특진과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했다.[자료출처 : 국가보훈처, 인천보훈지청 현충시설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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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의 전쟁영웅, 김용식 육군 일등병
2017년 9월의 전쟁영웅으로 선정된 인물은 기계-안강지구전투와 안강 시가지전투에서 용감하게 북한군에 맞서 싸웠던 김용식 육군 일등병입니다. 1950년 8월부터 9월까지 전개되었던 기계-안강지구전투는,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던 기계와 안강 등지에서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한 전투입니다. 1950년 6.25전쟁 발발 이후, 국군은 상대적인 전력의 열세로 북한군에 밀려 낙동강선까지 후퇴하였습니다. 이에 국군과 유엔군은 8월 초부터 마산-왜관-영덕에 이르는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하여 방어태세에 임했는데요. 당시 군 지휘부는 기계-안강지구전투 과정에서 군사적 요충지인 비학산을 탈환하고자 김용식 육군 일등병이 소속되어 있던 부대에 습격 임무를 내렸습니다. 당시 김용식 일등병은 국군 수도사단 17연대 소속으로 부대에 배치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병이었지만, 고참병들도 두려워하는 돌격작전에 자원하였습니다. 비록 전투 경험은 거의 없었으나, 그는 조국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용기로 침투대열의 선봉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습니다. 김용식 일등병은 적 경계병을 신속히 처치하고 기습사격과 과감한 수류탄 투척으로 적 진지를 초토화시켰으며, 적 군관 1명을 포함한 15명을 생포하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치명적인 타격을 받은 북한군 제766 유격부대는 해체되었습니다. 이후에도 김용식 일등병의 활약은 이어졌습니다. 그는 1950년 9월 19일, 안강 시가지전투에서 적에 관한 첩보를 수집하는 척후병 임무를 맡아 정찰하던 중, 북한군의 만행을 목격하게 됩니다. 의분과 정의감에 불탄 김용식 일등병은 소대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북한군 6명과 교전을 벌여 모두 사살하였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교전 도중, 김용식 일등병은 적의 탄환에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국군은 김용식 육군 일등병의 용기와 활약에 힘입어 낙동강 방어선 전투를 기점으로 반격을 개시할 수 있었습니다. 정부는 국가 수호에 혁혁한 공을 세우고 꽃다운 청춘을 바친 김용식 일등병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하였습니다. 불굴의 의지로 적과 싸우며 활약했던 김용식 육군 일등병. 우리는 그를 포함하여 낙동강 방어선에서 산화한 호국영령의 투혼을 결코 잊어선 안 될 것입니다. [자료출처 : 국가보훈처 공식 블로그 - 훈터, http://mpva.tistory.com/4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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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참전용사 故안재범 일병 '6.25화랑무공훈장' 받아
国防部将“6.25花郎功绩勋章”授予已故的二等兵安在范,他参加了63月6日战争并立下了功绩,这是25年来的第一次。 国防部的“寻找6月25日战争退伍军人功绩勋章”姗姗来迟地确认了这枚勋章的授予。 6月25日 ,已故的PFC Ahn Jae-beom的“9.12花郎功绩勋章”被交付给他的妹妹Ahn Myung-ja,一个失去亲人的家庭成员,代表京畿道龙仁市基兴区国防部长Singal-dong。 已故的 PFC Ahn Jae-beom 在 6.25 战争期间是僧侣师军队的一名二等兵,并在歼灭战线上立下了功绩。 “花郎功绩勋章”是授予在战时或同等紧急状态下参加战斗的人的勋章,根据《国家功勋者表彰和扶持法》等,获得者被指定为国家功勋者,并可以获得各种福利,例如在国家公墓安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