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 출신 2020년 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김삼만님
【중앙보훈방송=오천지창조 기자】 제주특별자치도보훈청이 제주 출신 2020년 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김삼만님’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청에 따르면, 김삼만님(1864.~미상)은 1918년 제주 법정사에서 조직된 의군(義軍)의 후군대장(後軍大將)으로 일본인 관리 축출과 주재소 공격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의군은 1918년 음력 3월경 제주도 한라산 서남(西南) 임록(林鹿)에 소재한 법정사의 승려 김연일이 방동화·강민수·정구룡·김인수·김용충·장임호 등과 제주 내 일본인 관리와 경찰을 추방하기로 결의하면서 조직되었다. 김삼만은 1918년 9월 법정사에서 강창규·김봉화·양남구·최태유·강봉환 등과 함께 의군에 참여하기로 하고, 곤봉과 각 리(里)에 배포할 격문을 준비하였다. 같은 해 10월 김연일은 장임호는 모사(謀師), 강창규는 선봉대장(先鋒隊將), 양남구는 중군대장(中軍大將), 김삼만은 후군대장, 김봉화·최태유는 선봉집사(先鋒執事)에 지명하였다. 김삼만 등 시위대는 수백 명의 참가자를 모집하여 중문리로 집결한 뒤, 경찰관주재소 건물에 불을 놓아 소각하였으나, 서귀포 경찰관주재소 순사들에게 공격을 당하여 흩어졌다. 김삼만은 1919년 2월 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이른바 소요 및 보안법 위반, 방화죄로 징역 4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4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오천지창조 기자 oh-5004-oh@naver.com]
-
전쟁기념관 2020년 1월 호국인물, 이일영 중위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이 2020년 1월 호국인물로 ‘이일영 중위’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전쟁기념관에 따르면 고(故) 이일영 중위(추서 계급)는 1928년 8월 26일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 1943년 3월 예안공립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1945년 3월 구마가야(熊谷) 육군비행학교 조종과정을 졸업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육군 항공부대가 창설되자 같은 해 9월 입대하여 육군항공대에서 근무했다. 1949년 공군 창설과 함께 L-4 연락기 조종사로 근무하던 그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적진 정찰 및 정보 수집 임무를 수행하며 낙동강 방어선 사수에 기여했다. 특히 1950년 9월에는 경북 영천 하양동 일대에 잠복하고 있던 적군 200여 명의 위치 정보를 아군에게 전달하여 섬멸케 하였다. 이듬해 9월 F-51D 무스탕 전투기 기종 전환훈련을 받은 후 공군 소위로 현지 임관 한 그는 제1전투비행단 강릉전진기지에 배속되었다. 이후 우리 공군 최초의 단독 출격작전에도 참여하여 동부전선 적 후방 지역의 보급 및 병력 수송 차단과 지리산지역 공비 소탕작전 지원 임무를 수행했다. 1952년 1월 9일 그는 강원도 원산과 회양 지역의 적 대공포 진지 파괴와 보급로 차단의 명령을 받고 김두만 대위, 김금성 중위와 함께 강릉기지에서 출격했다. 적의 주 보급선인 경원선 철도를 폭격하고 대공포 진지를 공격했으나 회양 남쪽 창도리(昌道里) 지역에서 안타깝게도 적의 대공포에 피탄되었다. 그는 항공기가 비행불능상태에 처하자 적 진지로 돌진, 자폭함으로써 25세의 나이로 장렬히 산화했다. 고(故) 이일영 중위는 6·25전쟁 기간 중 F-51D 무스탕 전투기 조종사로 총 44회의 출격을 기록했다. 그 결과 100여 개소의 철도와 도로 차단, 20여 개소의 대공포와 포진지 파괴, 적군 60여 명 사살 등의 전과를 올렸다. 정부는 이러한 그의 공적을 기려 1계급 특진과 충무무공훈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
제주 출신 2020년 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강붕해(강성건)님
【중앙보훈방송=오천지창조 기자】 제주특별자치도보훈청이 제주 출신 2020년 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강붕해(강성건)님’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청에 따르면, 강붕해(강성건)님(1915.01.23.~2006.01.09.)은 제주(濟州) 사람으로 천주교 신자이던 그는 1938년 겨울 서귀포 천주교회의 아일랜드인 선교사 나 신부(羅神父:본명 토마스 다니엘 라이언)에게, "대정면(大靜面) 모슬포(慕瑟浦)의 해군비행장에서 비행기가 발진하여 중국의 상해(上海) 남경(南京) 방면을 도양폭격(渡洋爆擊)하고 있는데, 아마도 비행장 지하실에 폭탄을 저장해 두고 있는 모양이다"라고 말함으로써 군사시설에 관한 정보에 제공했다. 또한 1939년 9월경에도 나 신부에게 "중국군 비행기가 전라남도 목포(木浦)에 폭격하러 왔다가 일본 해군기에 의해 격추되었다"고 말했고, 1941년 9월경에는 "중국에 출정하고 있는 일본군은 숫자가 적고, 오히려 다수의 군대는 소련 및 영미와 일전을 벌이려고 대기 중이다"라는 내용의 말을 하였다. 이 무렵 일제는 제주도를 중국에 대한 도양폭격의 발진기지로 만들면서 도내 반일세력을 색출 제거코자 하여, 우선 적성국(敵性國)인 영국 국적의 아일랜드인 선교사들과 그들이 소속된 천주교회 조직을 탄압 파괴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그 또한 위의 발언들을 통해 군사기밀을 유출하고 유언비어를 유포했다는 이유로 1941년 말에 나 신부 등과 함께 일경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그 후 1942년 10월 24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국방보안법 및 군기(軍機)보호법 위반으로 징역 1년과 육·해군형법 위반으로 금고(禁錮) 10월이 병합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오천지창조 기자 oh-5004-oh@naver.com]
-
2020년 1월의 6‧25 전쟁영웅, 박평길 육군 병장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가 대한민국의 자유를 위해 살신성인 정신을 실천한 ‘박평길 육군 병장’을 2020년 1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처에 따르면 ‘박평길 육군 병장’은 1925년 제주읍 이도리에서 태어났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참전을 결심하고, 부인과 자녀를 남겨두고 9월 1일 육군에 입대했다. 1950년 10월, 보병 제11사단 13연대 3대대 9중대 2소대에 편성되어 전북지역의 북한군 패잔병 주력부대를 분쇄하였으며, 1951년 4월에는 동부전선으로 이동하여 제9중대 2소대 분대장이 되었다. 1951년 6월, 강원도 고성군 수동면 564고지전투에서 적의 토치카(사격진지)에 쓰러지는 아군병사가 속출하자, 박 병장은 적탄을 뚫고 총을 쏘며 돌격하여 대퇴부에 총탄을 맞아 부상을 당했으나 좌절하지 않고, 적의 토치카(사격진지) 근처까지 달려가 수류탄을 던져 적군 10여명을 폭사시키고, 적군과 백병전을 치르는 과정에서 적탄에 맞아 25세라는 젊은 나이에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박평길 병장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1951년 9월 화랑무공훈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
2020년 1월의 독립운동가, 정용기 선생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이 공동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정용기 선생’을 2020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처에 따르면, 정용기(1862.12.13~1907.09.02) 선생은 경북 영천 출신으로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제의 침략 책동이 노골적으로 드러나자 고종은 시종관(侍從官) 정환직을 불러 의병을 일으킬 밀지(密旨)를 내렸고, 부친 정환직은 고종의 밀지를 받들어 그날 관직에서 물러났다. 부친 정환직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가 1906년 1월경 ‘영천창의소’를 설치하고, 권세가(勸世歌)를 지어 일본인들이 들어와 문명과 종사가 무너지는 것이 을사 5적들 때문임을 지탄하고, 충성심 있는 의사들이 의병을 일으켜 역적들과 왜적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 대한독립만세의 기치를 들고 모두 함께 의병으로 나설 것 등을 호소하였다. 1906년 영남지역에서 1,000여 명의 의병이 모였으며 선생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진호를 ‘산남의진(山南義陣)’으로 정하고 부대를 편성하였다. 선생은 신돌석 의진과 연합작전을 펴기 위해 진군하던 중 경주 진위대 간계로 대구감옥에 수감되어 4개월간 고초를 겪고 석방되었다. 그 사이 선생의 구속으로 구심점을 잃은 병사들은 상당수는 떠나버렸고, 남은 군사들도 사기가 크게 떨어져 해산하기에 이르렀다. 4개월 동안의 고초와 시달림으로 몸을 안정시키고 있던 때에 대구에서 대구 광문사 사장 김광제, 부사장 서상돈 등이 국채보상운동을 일으켰다. 이 운동은 순식간에 전국적으로 퍼져나갔고, 경북지역에서도 고령·성주·김천·상주 등 여러 지역에서 여러 관련 단체들이 조직되어 동참하였다. 영천지역에서는 ‘영천군 국채보상단연회’가 조직되었으며 선생은 회장으로 취임하여 영천지역 국채보상운동을 이끌었다. 선생은 1907년 4월 의진을 다시 결성하여, 청하·영천·청송 등지로 진군하면서 일본군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여 적군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후 관동으로의 북상 준비 및 각 지대와의 연락을 위해 각지로 의병들을 파견한 뒤, 본진 병력 150여 명을 이끌고 청하군 죽장으로 이동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다가 1907년 9월 주요 의병들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선생이 전사한 후 부친 정환직이 의진 총수를 맡았으나 일본군 영천수비대에게 잡혀 대구로 압송 중 영천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
전쟁기념관 2019년 12월 호국인물, 최병익 중위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이 2019년 12월 호국인물로 ‘최병익 중위’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전쟁기념관에 따르면, 故 최병익 중위(1930.10.03.~1952.09.21.)는 1930년 10월 3일 충청북도 청주에서 태어났다. 6·25전쟁이 한창인 1952년 5월 4일, 갑종간부후보생 제19기로 임관하여 중부전선의 제8사단 10연대 1대대 소대장에 보임되었다. 1952년 9월 21일 밤, 북한군은 포로교환 문제로 교착 상태에 빠져있던 휴전회담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강원도 인제군 서화면 일대에서 대규모 공세를 감행하였다. 당시 제3중대 3소대장 최 소위(당시 계급)는 소대원들과 함께 705고지에서 적 2개 중대를 상대로 격렬한 방어전을 벌였다. 그러나 적의 파상공세가 계속되어 진지가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최 소위는 위급한 지역으로 나아가 직접 백병전을 수행하고 부하들에게 자신의 위치를 소리쳐 알리며 소대의 전투를 독려하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최 소위는 적의 수류탄에 맞아 쓰러졌고, 소대장의 죽음을 목격한 소대원들은 전의를 다져 3시간 동안 이어진 혈투 끝에 적을 격퇴하였다. 이 날의 전투에서 적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퇴각하였고, 아군은 적 사살 319명의 전과를 거두었다. 정부는 故 최 소위의 공적을 기려, 중위 특진과 함께 1952년 11월 15일 충무무공훈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
제주 출신 2019년 1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고영호님
【중앙보훈방송=오천지창조 기자】 제주특별자치도보훈청이 제주 출신 2019년 1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고영호님’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청에 따르면, 고영호님(1920.12.16.~2004.02.24.)은 제주도 북제주 사람이다. 일본 대판(大阪)중학 졸업 후 1943년 동지 윤병윤·김규성 등과 민족의식 고취, 독립국가 건설을 서약하고 「조선독립청년당」을 조직하여 활동했다. 동년 4월 명치(明治)대학 재학 중 이러한 활동내용이 일경에 탐지되어 피체되었으며, 1944년 1월 28일 대판(大阪)지방재판소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했다. [오천지창조 기자 oh-5004-oh@naver.com]
-
2019년 12월의 독립운동가, 윤봉길 의사···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공동으로 ‘윤봉길의사’를 2019년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처에 따르면 윤봉길(1908.6.21.~1932.12.19.) 의사는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서 태어났다. 1927년 〈농민독본(農民讀本)〉 3권을 저술하여 한글교육 등 문맹퇴치와 민족의식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1928년에는 부흥원(復興院)을, 1929년에는 월진회를 설립하여 농촌계몽운동을 실시했다. 1930년 3월 의사는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 生不還, 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이라는 비장한 글을 남긴 채 정든 가족을 뒤로하고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이후, 중국 상해에서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 의열투쟁의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던 중 “1932년 4월 29일 일왕(日王)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을 일본군의 상해사변 전승 축하식과 합동으로 상해 홍구공원(虹口公園)에서 거행할 예정이다”라는 ‘상해 일일신문‘의 보도를 접하고 의거를 결심했다. 의거 3일 전 1932년 4월 26일에, 의거가 개인적 차원의 행동이 아니라 한민족 전체의사를 대변한다는 점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백범 선생이 주도하던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가입했다. 의거 당일 1932년 4월 29일 홍구공원에는 수많은 인파가 운집하였고 경계가 삼엄한 가운데, 단상 위에는 시라카와(白川) 대장과 해군 총사령관인 노무라(野村) 중장, 우에다(植田)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重光),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河端), 상해총영사 무라이(村井) 등 침략의 원흉들이 도열해 있었다. 오전 11시 40분경 축하식 중 일본 국가 연주가 거의 끝날 무렵, 의사는 앞사람을 헤치고 나아가 단상 위로 수통형 폭탄을 던졌고, 폭탄은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을 내고 식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 의거로 시라카와 대장과 가와바타 거류민단장은 사망하고 노무라 중장은 실명, 우에다 중장 등은 중상을 입었다. 그 결과로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특히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일개 조선 청년이 해냈다”고 감격해 하며, 임시정부에 대한 중국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이어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다시 독립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체포된 의사는 가혹한 고문 끝에 1932년 5월 25일 상해 파견 일본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이후 일본 오사카로 호송된 뒤 1932년 12월 19일 가나자와(金澤) 육군형무소 공병 작업장에서 십자가 형틀에 매어 총살, 25세의 젊디젊은 나이로 순국했다. 의사의 유해는 일제에 의해 버려졌고, 광복 후인 1946년에야 조국에 봉환,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
2019년 12월의 6‧25 전쟁영웅, 전병익 해군 중사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가 ‘전병익 해군 중사’를 2019년 12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처에 따르면, 전병익 중사는 1929년 6월 충청북도 음성에서 출생했다. 1947년 7월 해군에 입대하여 1950년 4월 대한민국 해군 최초의 전투함인 PC-701함(백두산)에 배치되었다. 6·25전쟁 발발 직후에 1,000톤급 북한군 무장수송선이 병력 600여명을 태우고 부산 동북방 30마일 해상으로 남하했다. 이때 전병익 중사는 대한해협 해전에 ‘3인치 포 장전수’로 참전하여, 험상궂은 날씨에 시야확보가 어려운 밤이라는 악조건 속에서 치열한 교전 끝에 6월 26일 부산 동남방 해상에서 북한군 무장수송선을 격침하여 승리를 거두었으나, 안타깝게도 전 중사는 적선에서 발사한 포탄을 맞고 장렬히 전사했다. 대한해협 해전은 해상교통로 출입항의 중심지역인 부산을 공격하려던 북한의 기도를 무산시키며 6·25전쟁 중 첫 승리를 거둔 전투였으며, 유엔군은 수많은 병력과 군수물품, 유류 등 전쟁 물자를 부산항으로 수송할 수 있었고, 이는 6·25전쟁을 승리로 이끈 계기가 되었다. 한편, 정부는 전병익 중사의 공훈을 기려 1952년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
전쟁기념관 2019년 11월 호국인물, 이광악 장군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이 2019년 11월 호국인물로 ‘이광악 장군’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전쟁기념관에 따르면, 이광악(李光岳) 조선 장군(1557~1608)은 조선 중기의 장군으로 본관은 광주(廣州)이며, 자는 진지(鎭之)이다. 장군은 1557년(명종 12), 충북 충주 유동리에서 아버지 정선군수 이호약과 어머니 경주김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목소리가 크고 맑아서 대인의 풍모가 있었다. 학문과 수신에 힘쓰기보다는 말을 타고 전장을 누비는 것을 즐겨 무관으로 출사하는 데 그 뜻을 두었다. 1584년(선조 17) 무과 별시에서 을과 16위로 급제하여 선전관에 제수되었으며, 이후 연일(延日)현감·이성(利城)현감·경주(慶州)판관을 거쳐 곤양(昆陽)군수에 임명되었다. 1592년 10월 초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제해권을 상실한 왜군은 남해안 지방의 거점 확보가 어려워지자 불리해진 전세 회복을 위해 대대적으로 진주성을 공격해왔다. 당시 곤양군수로 재직하고 있던 이광악 장군은 초유사 김성일의 명령으로 병력을 이끌고 진주성으로 들어가 진주목사 김시민과 함께 적에 맞섰다. 왜군의 선봉이 진주성의 동쪽을 공격함으로써 시작된 치열한 전투 속에서 진주목사 김시민이 부상을 입자 그를 대신하여 전투를 진두지휘했다. 이때 돌진해 온 적장을 이광악 장군이 화살로 쏘아 죽이니 전의를 잃은 적군은 물러나기 시작했고, 조선군은 사기가 충천하여 퇴각하는 적을 물리쳐 크게 승리하였다. 정유재란 때에는 남원전투에서 순국한 이복남을 대신하여 전라병사에 임명되어 순천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부대와 전투를 벌였다. 그 결과 순천·광양전투에서 승리하였으며, 이어 순천 예교성전투에서는 조·명연합군의 선봉군으로 활약하였다. 이광악 장군은 임진왜란 3대첩에 빛나는 진주성전투 승리의 주역으로서 그 공을 인정받아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에 녹훈되었다. 이후 수원(水原)부사·경기방어사·영흥(永興)부사를 거쳐 1606년(선조 39)에는 함경남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다. 장군은 1608년 52세 나이로 별세했으며, 1711년(숙종 37) 충장(忠壯)의 시호를 받았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
국립대전현충원 2019년 11월의 현충인물, 김해인 애국지사
【중앙보훈방송=김하늘 기자】 국립대전현충원이 2019년 11월의 현충인물로 ‘김해인 애국지사’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국립대전현충원에 따르면, 김해인 애국지사는 1918년 9월 22일 충남 대덕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 조국 광복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다. 선생은 공주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이던 1936년 3월 같은 학교 학생들과 항일결사 조직 명랑클럽을 조직해 일어 사용 금지와 신사참배 거부, 악질 일본인과의 교유를 배척하는 등 일제 식민통치에 대한 항거에 앞장서는 한편, 무궁화 식수를 장려하고 미신을 타파하는 등 민족의식 고양에도 힘을 쏟았다. 1942년 6월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연계해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이어가려던 명랑클럽은 동료 천영관 선생이 일제의 패망을 언급한 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며 비밀결사가 드러나 김해인 선생을 포함한 회원들도 체포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김해인 선생은 같은 해 9월 대전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혹독한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김해인 지사에게 독립을 향한 위대한 업적으로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고, 2006년 서거로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3묘역에 안장하여 그 공훈을 기리고 있다. [김하늘 기자 hn900711@naver.com]
-
2019년 11월의 6·25 전쟁영웅, 김금성 공군준장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는 ‘김금성 공군 준장’을 2019년 11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처에 따르면, 김금성 준장(1927.11.27.~1961.08.19.)은 1927년 11월 충청북도 충주 출생으로, 1950년 10월에 공군 소위에 임관하여 공군비행단 비행대에서 정찰을 비롯한 비행 임무를 수행했다. 1951년 10월부터는 강릉기지에서 F-51 전투기로 출격을 시작하여 1952년 1월 북한군의 후방보급로 차단을 위해 꼭 필요한 평양 근교 ‘승호리철교 차단작전’을 완수했고, 1952년 3월 ‘송림제철소 폭격작전’, 1953년 3월 351고지탈환을 위한 ‘근접항공지원작전’ 등 한국 공군이 출격한 거의 모든 주요작전에 참가하여 획기적인 전공을 세웠다. 6·25전쟁 중 전투비행대대장, 작전과장 등을 역임하여 비행단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면서 전투조종사로서는 두 번째로 많은 195회 출격을 기록했다. 특히, 작전 중에 여덟 번이나 적의 대공 포화에 전투기가 피탄되었으나, 우수한 조종기량을 발휘해 위기를 극복하여 모든 출격 조종사의 표상이 되었다. 전쟁 후에는 공군사관학교 생도대장, 제10전투비행단장으로 근무하여 우리 공군의 전력증강 및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정부는 김금성 준장의 공훈을 기려 1961년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
2019년 11월의 독립운동가, 박은식 선생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공동으로 ‘박은식 선생‘을 ’2019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처에 따르면, 박은식 선생(1859.09.30.~1925.11.01.)은 1859년 9월 30일 황해도 황주군 남면에서 태어나, 1898년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에서 문교 분야의 간부로 활동했으며, 독립협회가 강제해산당한 후에 경학원의 강사, 한성사범학교의 교사 및 서북협성학교와 오성학교 교장을 맡아 교육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활동하면서 많은 논설을 쓰면서 국권회복과 애국계몽운동을 벌여 나갔다. 선생은 일제의 무단탄압으로 1911년 중국 만주로 망명하여 국혼을 발흥시킬 역사서의 저술에 진력했다. 1912년에는 상해에서 독립운동단체인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여 중국의 국민혁명 세력과 연대를 모색했고,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등 한국 독립운동의 기반 조성에 주력했다. 1915년에 「한국통사(韓國痛史)」를 간행해 대외적으로는 일본제국주의 침략의 잔학성과 간교성을 폭로규탄하고, 대내적으로 민족적 통분과 적개심을 유발하면서 동포들의 각성과 반성을 촉구했다. 또한, 북경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인 신한혁명당의 결성에 참여했다. 노령의 블라디보스톡에서 1919년 3․1운동을 맞이한 선생은 육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대한국민노인동맹단을 조직하여 국내외 거족적인 독립운동에 호응했다. 그해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노령의 대한국민의회정부, 그리고 서울의 한성임시정부의 통일을 추진하여 통합 임시정부가 발족하는데 기여했다. 특히, 1920년에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간행했는데, 이는 1884년 갑신정변부터 1920년 독립군의 항일무장 투쟁까지의 일제침략에 대한 한국민족의 독립투쟁사를 3․1운동을 중심으로 기술하여 민족적 자부심과 독립투쟁정신을 크게 고취했다. 1925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그 해 8월 만주 독립군 단체인 정의부의 지도자 이상룡을 국무령으로 추천하고 스스로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1925년 11월 1일, 동포들에게 독립 쟁취를 위해 반드시 단결하라는 말을 남기고 66세를 일기로 상해에서 서거했다. 그의 유해는 1993년 8월 고국으로 봉환되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
제주 출신 2019년 1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박규훈님
【중앙보훈방송=오천지창조 기자】 제주특별자치도보훈청이 제주 출신 2019년 1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박규훈님’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청에 따르면, 박규훈님(1900.07.23.~1975.08.20.)은 제주 출생으로 1919년 3월 1일 당시 경성고등보통학교 4년생으로 서울 탑동공원에서 진행된 독립선언 행사에 참가하여 다수의 시위군중과 함께 파고다 공원을 뛰쳐나와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내를 행진하며 일군헌병과 일경의 무차별 총격에도 굴하지 않고 만세시위를 벌이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같은 해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오천지창조 기자 oh-5004-oh@naver.com]
-
전쟁기념관 2019년 10월 호국인물, 김영환 공군준장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이 2019년 10월 호국인물로 ‘김영환 공군준장’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전쟁기념관에 의하면, 김영환 공군준장(1921.01.08.~1954.03.05.)은 1921년 1월 서울 서대문에서 출생했다. 광복 이후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하여 1946년 1월 참위(현 소위)로 임관했다. 임관 후에는 국방경비대 중대장과 통위부 정보국장(대리)으로 근무하면서 공군 창설에 크게 기여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한국 공군 최초로 10명의 동료와 함께 미 극동공군으로부터 F-51전투기를 인수하여 전투기 조종사로서 수많은 공을 세웠다. 전쟁 기간 동안 그는 국군과 유엔군에 대한 근접항공지원과 후방지역 차단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 휴전 시까지 중동부 전선의 적 전력을 타격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특히 1951년 8월, 제10전투비행전대장으로 재직할 당시 그는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을 수행하면서 해인사 폭격을 요청받았지만 끝내 폭격하지 않아 팔만대장경과 해인사의 숱한 국보급 문화재를 지키기도 했다. 이에 정부는 2010년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을 지킨 그의 공적을 기려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또한 같은 해 10월에는 강릉전진기지 사령관으로서 우리 공군 최초의 단독 출격작전을 지휘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을지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미 비행훈장과 미 공로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는 대한민국 공군 조종사의 영광과 명예의 상징인 ‘빨간 마후라’를 최초로 착용하여 이를 제도화시킨 주인공이다. 휴전 이후에도 전투비행단 운영체계 수립, 전투조종사 양성 등 공군 전력 향상을 위해 헌신했으나 안타깝게도 1954년 3월 5일 임무 수행 중 악천후로 인해 34세 일기로 순직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
국립대전현충원 2019년 10월의 현충인물, 조일문 애국지사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립대전현충원이 2019년 10월의 현충인물로 ‘조일문 애국지사’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국립대전현충원에 따르면, 조일문 애국지사는 1917년 12월 17일 함경남도 영흥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 광복군 제2지대 제3구대 강남분대에서 전방공작과 적 후방 공작활동을 펼치며 조국광복을 위해 투신한 독립운동가다. 조일문 지사는 중국 난징 중앙대학 법상학원 정경과 재학 시 비밀결사 ‘한족동맹’을 조직하고 애국청년 규합과 일본군의 동태를 감시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다 1944년 난징에서 지하공작을 펼치던 임정특파원 김병호가 일경에게 체포된 직후 난징 중앙대학 학생들에 대한 일경의 일대 검거가 시작되자 이일범 선생 등 10여 명과 함께 제3전구 지역인 무림으로 활동지역을 옮겼다. 이때 난징 주둔 일본군이 보관하던 기밀작전문서인 일본군 병력배치 상황, 연합군의 기습상륙 작전을 방어하기 위한 작전계획, 중국 연해안탐측량, 군용지도, 기타 기밀문서 등을 대량 탈취하는 등 항일 작전수행에 크게 기여했다. 광복 이후 조일문 지사는 건국대 교수로 재직하며 법정대학장, 행정대학원장 등을 거쳐 제8대 건국대 총장을 역임하고, 제12대 국회의원, 민족통일중앙협의회 의장과 영남학원 이사장, 한중문화협회 이사장 그리고 독립기념관 이사장으로 활동하며 평생을 대한민국에 헌신하셨다. 선생의 교수 시절 ‘정당론’ 강의는 다른 대학 청강생까지 강의실에 넘칠 정도로 명강의로 통했다고 전해진다. 대한민국정부는 조일문 지사에게 독립을 향한 위대한 업적으로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수여하고, 2016년 서거로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1묘역에 안장하여 그 공훈을 기리고 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
2019년 10월의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이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바쳐라!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이 공동으로 ‘안중근 의사’를 ‘2019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처에 따르면 안중근 의사(1879.9.2~1910.3.26)는 1879년 9월 2일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1905년 을사늑약의 소식을 듣고 중국 상해로 건너가 산동 지방의 한인들을 모아 구국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일제의 침략 실상을 널리 알리는 외교 방책으로 국권회복을 도모했으나 1906년 부친의 별세로 귀국했다. 이후 평안남도 진남포에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설립해 교육계몽운동을 전개했고, 삼합의(三合義)라는 광산회사를 평양에서 설립해 산업 진흥운동에도 매진했다. 의사는 국외에서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독립전쟁전략을 구사하기 위해 1907년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했으며 1908년 연추(煙秋)에서 동의회라는 의병부대를 조직하고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했다. 1909년에는 동지 11명과 함께 동의단지회를 조직, 단지를 하고 구국에 헌신할 것을 맹세했다. 그러던 중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를 시찰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 침략의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파괴자인 이토를 처단할 결심을 하였다.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에게 총탄을 명중시켜 사망에 이르게 하였으며 현장에서 체포되어 여순에 있던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 송치되었다.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에 이르기까지 6회에 걸쳐 재판을 받았으나 재판은 일본인들만에 의해 형식적으로 진행되었고, 2월 14일 공판에서 일제의 각본대로 사형을 언도 받았다. 의사는 "사형이 되거든 당당하게 죽음을 택해서 속히 하느님 앞으로 가라"는 모친의 말에 따라 공소도 포기한 채, 여순감옥에서 「안응칠역사」 저술을 끝내고 「동양평화론」의 저술을 시작하면서 이것이 끝날 때까지 만이라도 사형 집행을 연기해 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일제는 이 작은 소망조차도 무시하고 사형을 집행하였고,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여순감옥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의사는 「동양평화론」에서 이토의 처단은 사사로운 감정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한국 국권의 회복과 동양평화의 회복을 위한 부득이한 조치임을 주장했다. 정부는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
2019년 10월의 6·25 전쟁영웅, 이성가 육군소장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가 ‘이성가 육군 소장’을 2019년 ‘10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처에 따르면 이성가 소장은 1922년 만주에서 출생해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중위로 임관하여 1949년 10월 태백지구 전투사령관으로서 공비토벌작전을 수행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북한군 제5사단은 양양과 강릉을 잇는 해안도로를 확보하기 위해 국군 제8사단을 공격했다. 당시 제8사단장이었던 이성가 소장은 북한군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며 북한군의 진격을 지연시켰다. 이어 영천전투에서는 뛰어난 작전지휘로 북한군 제15사단을 역습하여 빼앗긴 영천을 탈환하는 등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반격의 기반을 마련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지리적으로 영천은 대구와 포항의 중간에 위치한 교통의 중심지로서 북한군이 점령할 경우, 낙동강 방어선 전체가 붕괴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 후에도 이성가 소장은 1951년 제7사단을 지휘하여 전술적 요충지인 백석산 및 크리스마스 고지 전투 등 많은 전선에서 작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정부는 이성가 육군 소장의 공훈을 기려 1953년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
제주 출신 2019년 10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한철영(한석용)님
【중앙보훈방송=오천지창조 기자】 제주특별자치도보훈청이 제주 출신 2019년 10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한철영(한석용)님’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청에 따르면, 한철영(한석용)님(1897.02.17.~1964.10.18.)은 제주 출생으로, 1919년 3월 이래로 서울 및 전국 각지에서 독립을 절규하는 함성이 울려 퍼지자 제주군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했다. 3월 15∼16일의 양일간에 걸쳐 김시은·김시범·송정왕·한백흥·김재일 등과 함께 신좌면 조천리, 함덕리 등지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벌이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같은 해 4월 26일 제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오천지창조 기자 oh-5004-oh@naver.com]
-
2019년 9월의 독립운동가, 지청천 장군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이 공동으로 ‘지청천 장군’을 2019년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처에 따르면, 지청천 장군은 1888년 1월 25일(양력 3월 7일) 서울 삼청동에서 태어났다. 장군은 1907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으나 1909년 폐교되어 일본 사관학교에 유학하여 1912년 5월 졸업할 때까지 군사학 등을 공부했다. 이후 신흥무관학교 교성대장으로 독립군 간부 및 병사 양성에 크게 기여했다. 신흥무관학교는 서간도 일대에 거주하고 있던 교포사회를 기반으로 성립한 중학과정의 독립군 양성 학교였다. 장군은 1921년 3월 한인 무장세력이 세운 ‘대한의용군 총사령부’의 참모부원으로 선출되었고 ‘대한독립단’으로 개편된 후 군사고문으로 추대되었다. 같은 해 6월 하순 홍범도·안무(安武) 등의 부대와 함께 장군 휘하 부대는 고려혁명군정의회 제3연대로 편성되었는데, 장군은 이 부대의 주요 간부 직책을 맡게 되었다. 1925년에는 남만주의 통합 독립운동 조직이자 교민 자치조직인 정의부(正義府) 군사위원장과 사령관을 겸했고, 1928년에는 만주의 유력조직인 정의부·참의부·신민부 등 3부(府) 통합운동에 노력했다. 1930년 한국독립군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중국의용군과 합세하여 주로 하얼빈(哈爾濱) 부근의 북만주 일대에서 독립전쟁을 전개했다. 특히, 1933년 6월 30일에 중국 연변의 나자구(羅子溝)에서 조선 회령으로 철수하는 일본군을 기습하여 거둔 ‘대전자대첩(大甸子大捷)’이 유명하다. 1938년 임시정부 군사학편수위원회 위원장이 되고, 1939년 10월에는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선출된 뒤 군무부장을 겸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임시정부에서는 군사부문 독립운동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는데, 장군은 그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1940년 임시정부의 정규군으로 한국광복군이 창건되어 장군은 총사령에 취임하여 해방 직후까지 한국광복군을 총지휘했으며, 환국할 때까지 중국대륙에서 중국, 미국 등과 힘을 합쳐 일제 타도와 조국광복을 위해 맹렬히 활동했다. 해방 이후에 정계에서 활약하던 장군은 1957년 1월 15일 69세로 별세했다. 정부는 장군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