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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의 6‧25전쟁영웅, 조관묵 경찰 경감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가 조관묵 경찰 경감을 2019년 5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조관묵 경감(1927.01.06.∼1950.11.03.)은 강원도 양구군에서 태어나 1948년 순경으로 임용되어 강원경찰국 춘천경찰서에 근무하던 중 6·25전쟁이 발발했다. 6·25전쟁 당시 양구전방은 백석산전투, 피의능선전투 등이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조관묵 경감은 춘천경찰서 양구파견대 중대장으로 대원 30여명과 함께 양구지역 치안 업무를 수행했다. 1950년 9월 28일 서울수복과 동시에 춘천이 수복되자 조관묵 경감은 인민군 제10사단 소속 1개 연대 4천 여 명 규모의 패잔병과 대치하며 양구군 소재지를 사수하던 중, 패잔병의 습격을 받아 강원도 춘성군 북산면 내평리까지 후퇴했다. 다시 반격을 시도하여 격전을 벌였으나, 양구·춘천간 도로를 우회 차단한 적의 배면 공격으로 소대와 중대가 통신이 두절되어 적의 맹공격을 받게 되었다. 조 경감은 2천 여 명의 양구 시민들을 안전하게 후방으로 대피시키는 등 최후까지 분투하였으나 적의 총탄에 전사했다. 조관묵 경감과 양구 파견대의 활약은 국군이 반격해 북진하던 시기에 불리한 상황속에서도 2천 여 명의 시민이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등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여 경찰의 귀감이 되었다. 정부는 조관묵 경감의 공훈을 기려 경위에서 경감으로 1계급 특진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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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의 독립운동가, 김규식․김순애 선생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이 공동으로 김규식 선생과 김순애 선생 부부를 2019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김규식 선생(1881.1.29.~1950.12.10.)은 1897년 미국 유학을 떠나 로아노크 대학(Roanoke College)에서 수학하고,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에서 영문학 석사를 받은 후 1904년 귀국했다. 1906년 대한자강회 회원으로 강연을 통한 구국운동을 전개했으며 1913년 11월에 중국 상하이로 망명, 신규식과 함께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하고 한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19년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파견되었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총장 자격으로 5월 12일에 한국독립에 관한 청원서와 한국독립 항고서(抗告書)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였고 「한국독립과 평화」라는 책자를 비롯해 다수의 독립운동 홍보문서를 작성하고 각국 대표들 및 언론인들에게 배포해 한국인의 독립의 열망을 전 세계에 널리 알렸다. 1921년 임시정부 내에 독립운동 노선으로 갈등이 야기되자, 잠시 임시정부를 떠났다가 1923년 1월 국민대표회의에서 국민위원과 외무위원을 맡았다. 1933년 1월 미국을 방문해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운동을 전개하고 수천달러를 모금해 돌아왔으며, 1935년 7월 조선민족혁명당의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으나 건강상의 문제로 사천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일에 힘썼다. 1942년 10월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보선되었고 1944년 부주석에 취임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국독립당을 대표하는 김구 주석과 민족혁명당을 대표하는 김규식 부주석 체제의 양대 정당을 중심으로 독립운동 세력이 연대와 협력을 이루어가며 조국 광복을 이루어내었다. 선생은 1950년 북한군에 납치되어 그 해 12월 10일 평안북도 만포진 부근 별오동에서 70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김순애 선생(1889.5.12~1976.5.17)은 1889년 5월 황해도 장연군에서 출생했다. 1909년 정신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1919년 김규식 선생과 결혼했다. 선생은 1919년 7월 이화숙·이선실·강천복·박인선·오의순 등과 함께 ‘여성의 독립운동 참여와 지원’을 목적으로 상해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임시정부가 자금난으로 곤경을 겪게 되자, 1926년 7월 임시정부경제후원회에 참여하여 임시정부의 재정 지원 활동을 하였다. 또한 간호원양성소를 설립, 다수의 간호원을 양성 배출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독립전쟁에 대비하기도 하였다. 1930년 8월 상해에서 김윤경·박영봉·연충효 등과 함께 한인여자청년동맹을 결성하여 한국독립당과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측면 지원하였다. 1943년 2월 23일 충칭의 각계 각파 부인 50여명과 한국애국부인회 재건대회를 개최하고 조직을 재출범시켰으며 주석으로 추대되었다. 선생은 1945년 11월 환국해, 1946년부터 1962년까지 모교인 정신여자중·고등학교 재단 이사장과 이사 등으로 활약하면서 여성교육에 공헌했다. 선생은 1976년 5월 17일 87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정부에서는 두 분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김규식 선생에게는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김순애 선생에게는 1977년 독립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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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출신 2019년 5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김형배(김영배)님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제주특별자치도보훈청이 제주 출신 2019년 5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김형배(김영배)님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김형배(김영배)님(1901.10.22.~1944.02.09.)은 제주(濟州) 사람으로, 1919년 3월 21일 제주도 신좌면(新左面) 조천리(朝天里)에서 김시범(金時範)·김시은(金時殷) 등이 주도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하기로 결의하고 김시범의 의뢰로 태극기 4매를 만들고 이들과 함께 장터에 모인 군중을 규합해 100여 명의 군중과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벌이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 해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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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2019년 4월 호국인물, 최경회 조선장군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이 2019년 4월 호국인물로 최경회 조선장군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최경회 장군(1532~1593)은 고려 명재상 최충의 후손으로 1532년 전라남도 화순읍 삼천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선우(善遇), 호는 삼계(三溪), 일휴당(日休堂)이다. 고봉 기대승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1561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567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했다. 사헌부 감찰, 형조 좌랑을 역임 했고 장수(長水), 무장(茂長) 등의 현감을 거쳐 영암 군수, 담양 부사 등을 지냈다. 장군이 모친상으로 화순 향제(鄕制)에 기거 중이던 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전라좌도 의병 진영의 권유를 받은 그는 상복 차림으로 단상에 올라 의병장이 되었다. 각 고을에 격문을 보내자 화순과 능주 등에서 8백여 명의 의병이 모여들었으며 장군의 일가(형제, 조카, 아들 등)도 의병에 동참했다. 장군의 의병부대는 담양과 순창, 남원을 거치며 군세가 불어나 전부장, 후부장, 좌우부장을 임명하는 등 의병진영체계를 갖추게 되어 ‘우의병(右義兵)’이라는 부대명도 얻게 되었다. 전라 우의병은 금산전투, 무주대첩 등에서 대승하며 공을 세웠다. 최경회 장군은 왜군들이 호남을 점령하기 위해 진주성으로 집결하자 우의병을 이끌고 진주 살천에 주둔하면서 진주 목사 김시민과 함께 1차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1593년 6월 가토 기요마사가 10만 왜군을 이끌고 다시 진주성을 침략하자, 최경회 장군은 병사 700여 명을 이끌고 창의사 김천일 등과 함께 진주성 사수에 나섰다. 10만 대군의 공격에 맞서 열세에도 불구하고 무려 9일 동안이나 진주성 방어에 성공했지만, 진주성은 결국 무너졌다. 장군은 김천일, 고종후와 함께 촉석루에 올라 임금의 처소인 북쪽을 향해 4배(四拜)를 한 후 스스로 남강에 투신하여 순절(殉節)했다. “최경회는 동서로 적을 초토하느라 1년 넘게 노숙했으나 뜻이 조금도 태만해지지 않았다. 우병사로 승진되어서는 처사가 정밀하고 민첩했으며, 호령이 엄하고 분명했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믿고 의지했다.” 1593년 6월 〈선조수정실록〉에 실린 내용이다. 최경회 장군은 후에 좌찬성(左贊成)이 추증되었고 진주 창렬사(彰烈祠), 능주 포충사(褒忠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자료제공=전쟁기념관).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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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출신 2019년 4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강규언님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제주특별자치도보훈청이 제주 출신 2019년 4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강규언님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강규언님(1898.04.17.~1927.04.15.)은 제주(濟州) 사람으로, 1919년 3월 5일 당시 그는 전북 옥구군 개정면 구암리에 있는 영명중학교 학생으로 같은 학교 교사인 이두열·박연세 등이 주도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여했다. 이들은 3월 1일부터 학교 내에서 약 7,000매의 독립선언서를 복사하는 등 거사를 준비했으나 주동 인물들이 사전에 검거되자 양기철·전세종 등과 함께 3월 6일 군산 장날을 이용하여 합세한 주민 500여 명과 함께 군산경찰서 등 시내 각 지역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행진을 벌이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 해 3월 31일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공소하여 4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6월을 받아 상고하였으나 6월 12일 고등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그는 고향인 제주로 돌아와서 모슬포에 광선학교를 설립해 민족 교육을 실시하면서 인재 양성에 힘쓰는 등 활동을 이어나갔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자료제공=제주특별자치도보훈청).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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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전현충원 2019년 4월의 현충인물, 김종식 해군대령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립대전현충원이 2019년 4월의 현충인물로 ‘김종식 해군대령’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김종식 대령은 1926년 1월 중국 하얼빈에서 태어나 하얼빈 대도관 상업학교와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공부했다. 그는 광복이 되자 중국에서 단신으로 조국에 돌아와 1948년 3월 해군사관학교 후보생 특별교육대 2기생으로 입대한 후 같은 해 9월 해군소위로 임관하고 이듬해인 1949년 2월 해병대 창설요원으로 1949년 4월 15일 해병대 창설 기념식이 거행될 때까지 선발대 요원으로 활약했다. 해병대 초창기 온갖 고난과 역경을 헤쳐 나가며 초석을 다지던 김 대령은 창설된 지 불과 1년 뒤인 6·25전쟁이 발발한다. 김 대령을 포함한 해병대는 낙동강 최후 방어선 진동리 지구에서 수류탄전을 전개하는 과감한 공격을 펼치며 적 정찰대대를 기습 타격했다. 대한민국이 진동리지구 전투에서 승리하며 마산을 거쳐 부산을 점령하려는 북한군 최정예 사단의 공격을 완전히 격퇴하고 북한의 침공을 저지했을 뿐만 아니라 북한군의 예봉을 꺾어 총반격전의 기틀을 만들었다. 6·25전쟁사 중 처음으로 전 장병이 1계급 특진하는 영예도 안았다. 귀신 잡는 해병대의 신화를 쓴 김 대령은 대한민국 해병대 최초의 상륙작전인 통영상륙작전, 6·25전쟁의 운명을 바꾼 인천상륙작전, 서울탈환 등 수많은 전투에 참전하며 연전연승을 거뒀다. 1952년 3월 서울의 관문인 장단지구를 지키는 해병대 전투단 1대대장으로서 대원들을 삭발시켜 비장한 결의로 중공군과 결전을 벌였으며, 전선으로 출동하기 전 ‘중공군과 북한군에게 원수를 갚지 못하면 차라리 죽어서 돌아오겠다’는 결의로 묘지에 「고(故) 해군(海軍) 소령(少領) 김종식(金鍾植) 지묘(之墓)」라고 팻말을 꽂아 놓고 출전하기도 했다. 그는 6·25전쟁기간 동안 해병대가 수행한 거의 모든 전투에 참전했고, 휴전 이후에는 해병대 1연대장, 헌병감을 역임하며 ‘무적해병’의 전통을 수립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정부는 김종식 대령에게 구국·애국·호국의 위대한 업적으로 무공훈장(을지·충무)을 수여하고 국립대전현충원 장교 제1묘역에 안장하여 고인의 공훈을 기리고 있다(자료제공=국립대전현충원).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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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의 6‧25전쟁영웅, '콘라도 디 얍' 필리핀 육군 대위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가 ‘콘라도 디 얍(Conrado D. Yap)’ 필리핀 육군 대위를 2019년 4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콘라도 디 얍(Conrado D. Yap) 대위는 필리핀 제10대대전투단 특수중대 중대장으로 1951년 4월 경기도 연천 북방의 율동전투에 참가했다. 율동전투는 중공군의 제5차 공세에 맞서 1951년 4월 22일부터 23일까지 연천 북방의 율동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저지한 방어전투이다. 필리핀 제10대대전투단은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강인한 정신력으로 중공군의 공격을 저지하여 인접 부대들이 철수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해 주었으며, 중공군 2명을 생포하고 500여 명을 사살하거나 부상을 입히는 전과를 거두었다. 얍 대위는 퇴로 차단의 위기에서 방어전을 전개하던 중 대대장으로부터 즉각 철수할 것을 지시받았으나 생존자를 구출하고 전우들의 시체를 수습한 후 철수하겠다고 보고한 후 역습을 감행했다. 얍 대위의 진두지휘 하에 특수중대는 부상을 입은 동료 2명을 구출하고 전사한 부대원들의 시체를 수습해 고지 탈환에 성공했으나 이 과정에서 얍 대위는 적의 저격탄에 맞아 전사했다. 율동전투에서 그가 발휘한 탁월한 용기와 책임감, 그리고 부하를 구출하고자 자신의 생명을 바친 공적을 인정받아 필리핀 정부는 그에게 최고훈장인 ‘Medal of Valor'를 추서했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얍 대위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했다.(자료제공=국가보훈처).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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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의 독립운동가, 안창호 선생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광복회·독립기념관이 공동으로 안창호(1878.11.09.~1938.03.10.) 선생을 2019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선생은 1878년 11월 9일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 칠리 봉상도(鳳翔島, 일명 도롱섬)에서 태어나, 1896년 18세 되던 해에 구세학당 보통부를 졸업하고 조교를 맡아 학생을 지도했다. 이후 독립협회에 가입한 선생은 귀향해 독립협회 관서지부를 설립해 민권운동에 뛰어들었다. 1902년 결혼 직후 미국으로 건너간 선생은 리버사이드 일대의 한인지도자로 부상했다. 1905년 4월에는 동지들과 함께 조국 광복을 목표로 삼는 미주 한인단체인 공립협회를 창립했다. 1907년 5월 공립협회 제3대 회장으로 선출된 선생은 언론활동과 교육진흥, 실업진흥 등 여러 가지 구국사업을 전개했다. 이후 공립협회는 1909년에 하와이 한인합성협회와, 1910년에 대동보국회와 통합되어 1910년 5월 10일 미주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대한인국민회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선생은 조국 독립을 추구한 국내 비밀결사인 신민회 활동에도 참여했다. 1913년 5월 13일, 8도 대표를 선정해 민족을 지도해 나갈 수 있는 중견 인물을 배출하기 위한 동맹수련단체로서 흥사단이 출범했다. 선생의 주도로 조직된 흥사단은 무실역행, 충의용감, 건전인격, 단결훈련, 국민개업(國民皆業) 등을 목표로 독립운동을 위한 조직적 재정후원과 일꾼양성을 통한 민족독립의 사명 완수에 매진했다. 1919년 3·1운동 소식이 미국에 전달되자 3월 13일에 대한인국민회는 긴급위원회를 개최했다. 이때 선생은 ‘삼일운동을 계승하자’라는 연설을 통해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민족자결주의의 공포, 그리고 파리평화회의 개최와 같은 외부적 요인보다 민족의 실력을 보여준 3.1운동이 훨씬 중대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선포했다. 3·1운동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이라는 결실을 맺자 선생은 1919년 5월 25일에 상하이에 도착해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로 취임했다. 이후 임시정부의 체계를 갖추고 조직적으로 사업을 전개해 나갔다. 정부에는 국민이 있어야 하므로 먼저 인구조사에 착수하였고 정부 운영에 소요되는 재정 확보를 위한 국채 발행을 비롯해 인두세 징수, 구국재정단 조직 등 여러 정책을 고민했다. 1932년 4월 29일에 윤봉길 의사가 일본인들의 천장절 행사장인 홍구공원에 폭탄을 투척하자, 같은 날 상해 이유필의 집을 방문했던 선생은 민단장으로 오인되어 일본 경찰에 의해 연행되었다. 이후 국내로 압송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대전감옥으로 이송되는 2년 6개월간의 옥고를 치른 끝에 1935년 2월 10일 가출옥했다. 곧이어 일제는 국내의 민족운동 일체를 말살하기 위해 1937년 6월, ‘동우회사건’을 일으켰다. 그로인해 선생을 비롯한 180여명의 동우회 회원들은 종로경찰서로 넘겨져 135일간 집중조사를 받고 8월 15일 예심종결을 거쳐 ‘치안유지법 위반’ 판결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선생은 지병이 악화되어 병보석으로 출소했다. 병마를 이기지 못한 선생은 1938년 3월 10일, 0시 5분에 만 59년 4개월의 일기로 서거했다. 해방 후 1973년에 정부는 선생 탄신 95주년을 맞이해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도산공원을 조성하고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힌 선생의 유해와 그의 아내 이혜련의 유해를 이장하여 도산공원 묘지에 합장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자료제공=국가보훈처).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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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2019년 3월 호국인물, 강우규 의사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이 2019년 3월 호국인물로 ‘강우규 의사’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강우규 선생(1855.07.14~1920.11.29)은 1855년 7월 평안남도 덕천군에서 가난한 농가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 호는 왈우(曰愚)이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한학과 한의학을 공부해 한의사로 활동했다. 이후 함경남도 일대에서 한약방을 운영하며 상당한 재산이 모이자 사립학교와 교회 등을 세워 민족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선생은 50대 초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1911년 북간도 두도구(頭道溝)로 이주해 독립운동에 여생을 바칠 것을 결심한다. 이 시기에 박은식, 이동휘, 계봉우 등 많은 애국지사들과 만나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차 세계대전 발발 후 연해주 일대에서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이 어렵게 되자 선생은 길림성 요하현으로 이주해 터를 잡고 이곳을 ‘신흥동(新興洞)’이라 명명했다. 선생의 노력으로 신흥동은 불과 1년여 만에 100여 호가 넘는 한인마을로 성장했고 만주 각지의 독립운동을 연결하는 거점이 되었다. 1919년, 3·1운동은 선생이 만세시위에 호응하며 본격적인 항일 투쟁에 뛰어들게 하는 계기가 됐다. 선생은 대한국민노인동맹단에 가입해 요하현 지부장을 역임하는 등 활발히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중 일제가 새로운 총독을 임명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총독 처단을 결심한다. 9월 2일, 환영행사에 참석한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齊藤實)의 마차에 폭탄을 투척했으나 아쉽게도 피살에 실패하고 만다.선생은 재차 거사를 계획하다, 의거 16일 만인 9월 17일 체포되어 1920년 2월 사형선고를 받았다. 강우규 의사의 모습이 신문을 통해 알려지자 일제와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고 한다. 의거의 주인공이 64세 백발노인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1920년 11월 강우규 의사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되기 전 아들 중건에게 남긴 유언이다. 정부는 독립운동의 큰 줄기를 이루는 구국 의열 투쟁의 효시가 된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자료출처=전쟁기념관).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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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전현충원 2019년 3월의 현충인물, 박경수 해군 상사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립대전현충원이 2019년 3월의 현충인물로 박경수 해군 상사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박경수 해군 상사는 1981년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나 2001년 해군 부사관 188기로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2002년 6월 29일 북한 경비정의 선제 기습 포격으로 시작된 제2연평해전은 25분간의 치열한 교전 끝에 우리군은 참수리호(357호정)가 침몰하고 6명의 용사가 전사, 19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는 제2연평해전 당시 북한함정과 마주보고 있던 동료 사수가 총탄에 쓰러지자 본인 또한 총탄을 맞아 중상이었으나 동료를 대신해 기관총을 부여잡고 조국을 지켜냈다. 그러나 그는 배만 보면 머리에 총을 맞아 쓰러진 동료가 생각났고 악몽으로 수년 동안 항해에 나서지 못했다. 그러던 박경수 상사는 강한 정신력으로 이를 극복하고 2009년 6월 5일 해군 2함대 22전대 천안함 보수사로 다시 바다로 돌아왔다. 하지만 2010년 3월 26일 백령도 서남방 2.5km 해상에서 경계 임무를 수행하던 중 북한 잠수정의 기습 어뢰공격을 받고 전사하게 된다. 정부는 박경수 상사에게 살신보국 정신의 공로를 기려 1계급 특진과 화랑무공훈장을 추서하고 국립대전현충원 사병 제3묘역에 안장하여 고인의 공훈을 기리고 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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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출신 2019년 3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김순탁님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제주특별자치도보훈청이 제주 출신 2019년 3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김순탁님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김순탁(1895.03.07.~ 1938. 3. 12.)님은 제주(濟州) 사람으로 1919년 3월 제주 조천(朝川) 3·1운동에 참가했으며, 1928년에는 제주청년동맹지부(濟州靑年同盟支部) 신좌소비조합(新左消費組合) 간부로 활동하며 야학(夜學)을 통해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도내의 유지인 김시우는 김장환과 함께 여러 동지들을 규합해 나가며, 미모치(味毛峙:일명 미밑 동산, 혹은 만세동산이라 일컫음) 동산에서 3월 21일 만세운동을 벌일 것을 계획하고, 인근 부락과 서당 학생들에게도 동참할 것을 권유했다. 거사일인 3월 21일 오후 3시경, 김순탁을 비롯한 600여 명의 시위군중이 미모치에 모였다. 김시우가 큰 태극기를 미모치에 세우고 목메인 음성으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니 모든 사람들이 감격하였다. 선언이 끝나고 김장환이 나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했다. 그리고 각기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연창하며 큰 길로 시위행진을 벌였다. 그런데 이때 긴급 출동한 수십명의 일본 무장병에 의해 저지당하고 김순탁은 피체되어, 1919년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출옥 후 그는 1928년 제주청년동맹지부 신좌소비조합 간부로 활동하며 야학을 통해 민족교육을 실시하다가 체포되어 4개월 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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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의 6‧25전쟁영웅, 케네스 뮤어(Kenneth Muir) 영국 육군 소령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가 ‘케네스 뮤어(Kenneth Muir)’ 영국 육군 소령을 2019년 3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케네스 뮤어 소령(1912.3.6.∼ 1950.9.23.)은 1950년 8월 아길 엔 서들랜드 하이랜더스(Argyll and Sutherland Highlanders)연대 제1대대(이하 아길대대) 부대대장으로 부산항에 상륙해 6‧25전쟁에 참전했다. 뮤어 소령은 대구시 일대의 낙동강방어선에 배치되어 임무를 수행하던 중,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을 거둠에 따라 영국군 제27여단과 함께 반격으로 전환해 성주 동남쪽 신부리 일대의 282고지와 389고지를 공격하게 되었다. 북한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아길대대 B‧C중대가 위기에 처하자 뮤어 소령은 탄약과 들것반을 인솔해 전투현장에 도착했다. 중대를 그대로 방치할 경우 상황이 더욱 악화될 것이 예상됨에 따라 뮤어 소령은 2개 중대의 통합지휘를 자청하여 전투부대를 재편성하고 직접 지휘했다. 사기가 오른 B‧C 중대는 북한군을 격파하며 고지를 장악했지만 북한군의 역습이 시작되자 병사의 기관총을 자신이 직접 발사했다. 고갈되자 60mm 박격포로 응전했으나 안타깝게도 북한군의 탄환에 전사했다. 영국 정부는 뮤어 소령의 공적을 인정해 최고훈장인 ‘Victoria Cross’를 추서했다(자료제공=국가보훈처).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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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의 독립운동가, 손병희 선생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이 공동으로 손병희(1861.4.8.~1922.5.19.) 선생을 2019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선생은 1861년 충북 청원(청주)에서 출생해 1882년 동학에 입문한 후 1894년 호서지방 중심의 북접(北接) 사령관인 통령(統領)에 임명되어 남접의 전봉준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의 기수로서 활약했다. 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국권을 수호하고, 또 회복하기 위해 민족을 계몽하는 운동에 관심을 기울인 선생은 보성학교와 동덕여학교를 비롯한 수십개의 남녀학교를 인수 또는 신설해 운영함으로써 민족의 동량을 육성했다. 선생은 1919년 1월 동경유학생의 2․8독립선언계획과 신한청년당 및 기독교계의 독립운동 계획을 듣고 독립선언 방식의 운동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시위를 전개함으로써 독립에 대한 열망을 알리고, 일본의 정부와 귀족원·중의원, 조선총독부 파리강화회의의 열국의 대표에게 한국의 독립에 대한 의견서와 청원서를 보내기로 작정했다. 선생은 권동진, 오세창, 최린과 3․1독립운동의 골간이 된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화의 3대원칙에 합의하고 각 교계의 중심인사들을 규합해 갔다. 이윽고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와 청원서 등이 완성되자 선생은 직접 이를 검토했다. 그리고 천도교계와 기독교계의 검토가 이루어진 후, 천도교의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가 인쇄되었다. 1919년 2월 27일, 민족대표가 독립선언서에 날인했고 2월 28일 자신의 집에 천도교, 기독교, 불교의 민족대표를 불러 협의하여 독립선언서의 발표 장소를 탑골공원에서 태화관으로 변경했다.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거나 배포하면 소동이 일어날까 우려한 것이다. 거사일인 3월 1일, 선생은 태화관에 모인 28인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그리고 선언식을 마친 후 일경에 연락하여 자진 체포되었다. 그렇지만 선생과 다른 민족대표가 점화한 3․1운동은 이후 요원의 불길처럼 국내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중국, 러시아, 미국 등 한국인이 살고 있는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선생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고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뇌출혈로 가출옥하였으나 1922년 5월 19일 생을 마감했다. 선생의 유해는 서울 우이동 언덕에 안장되었고 1966년 민족의 얼이 깃든 탑골공원에 선생의 동상이 세워졌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자료제공=국가보훈처).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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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2019년 2월 호국인물, 최범섭 육군 중령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이 2019년 2월 호국인물로 최범섭(崔範燮) 육군 중령을 선정했다고 밝혔다. 최범섭(1933. 4. 18 ~ 1968. 2. 6) 육군 중령은 1933년 경기도 평택군에서 태어났다. 고려대 법학과 2학년이던 그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학교를 중퇴한 뒤, 1951년 육군보병학교 갑종간부후보생 4기로 입교했다. 육군 소위로 임관한 뒤 소대장 및 참모장교 등을 거쳤으며, 휴전 후엔 보병학교 전술학교와 지휘참모학처 교관, 1군사령부 작전처 기획 장교 등을 역임했다. 최 중령(당시 소령)은 1966년 주월사령부 건설지원단(비둘기부대) 소속으로 월남군 4군단 태권도 지구대장 및 교관을 맡아, 2만 4천여 명의 관원을 지도하는 등 베트남 현지에서 태권도보급에 앞장섰다. 1968년 2월 1일, 월맹군과 베트콩은 베트남의 최대 명절인 구정을 이용해 이른바 ‘뗏(Tet, 구정) 공세’를 감행했고, 최 소령이 근무하던 껀터(Can Tho)시에도 침입,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당시 껀터시에는 40여 명의 한국 민간인 기술자들이 체류하고 있었다. 일대에 주둔한 한국군은 태권도 지구대뿐이었기에 그는 열세의 상황을 무릅쓰고 이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자임했다. 2월 6일, 최 소령은 시내에 체류하던 우리 민간인 기술자 20여 명을 우선 월남군 영내로 안전하게 대피시키고 남은 기술자들을 수색하기 위해 재차 시내에 진입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월맹군의 기습으로 적탄에 다리 관통상을 입었고, 이를 끝까지 견디며 소지한 권총으로 월맹군 2명을 사살했으나, 결국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에서는 월남에 파견된 기술자를 보호하고 국민의 생명을 지킨 최범섭 육군 소령에게 1계급 특진과 함께, 1968년 6월 12일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하여 군인으로서 희생정신과 책임감을 완수한 고인의 공을 기렸다(자료출처=전쟁기념관).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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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전현충원 2019년 2월의 현충인물, 오충현 대령·어민혁 소령·최보람 대위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립대전현충원이 조국의 하늘을 지키다 산화한 F-5전투기 순직조종사 ‘오충현 대령, 어민혁 소령, 최보람 대위’를 2월의 현충인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F-5전투기 순직공군 3인은 2010년 3월 2일 유사시 대비 전투능력 신장을 위한 비행작전 전투태세연습 훈련 임무를 수행하던 중 기지 서쪽 약 12마일 상공에서 원인미상으로 통신이 두절된 뒤 산악지대에 추락하여 순직했다. 오충현 대령은 1990년 3월 공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한 뒤 20년 동안 2,792 시간의 비행경력을 기록한 베테랑 조종사로 주요 작전에 헌신적으로 임무를 수행하였고, 탁월한 리더쉽과 역량을 바탕으로 전투력 향상과 후배조종사 양성에 크게 기여했다. 어민혁 소령은 2005년 3월 소위로 임관하여 투철한 희생정신과 사명감으로 최우수 조종사로서의 능력을 겸비하기 위해 441 시간을 비행했으며, 뛰어난 운동실력과 사격실력으로 대대사격을 전담할 정도였다. 최보람 대위는 2007년 7월 사관후보생 교육과정을 수료 후 소위로 임관하여 비행시간 301 시간을 기록했고, 남다른 성실함으로 기본비행훈련과정에서 단장상과 고등비행훈련과정에서 남부전투사령관상, 작전가능과정 교육에서 작전사령관상을 받기도 했다. 정부는 F-5전투기 순직조종사 3인의 공로를 인정하여 1계급 특진과 보국훈장을 추서했으며, 국립대전현충원 장교 제3묘역에 안장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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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의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선생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이 공동으로 김마리아 선생을 2019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김마리아(1892. 6. 18. ~ 1944. 3. 13.) 선생은 1892년 6월 18일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마리아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던 아버지가 지어주신 세례명이다. 1918년 1월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발표되고, 이듬해 1월부터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알려지게 되자, 재일 동경 유학생들은 이를 한국 독립의 절호의 기회로 이용하고자 독립선언을 준비했다. 이것이 바로 동경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 계획이었는데, 여기에 김마리아라 선생을 비롯한 여자 유학생들도 참여하여 활동했다. 이후 선생은 2·8독립선언문 10여 장을 미농지에 복사하여 옷 속에 감추고는 현해탄을 건너 부산에 도착했다. 이어 교육계·기독교계·천도교계의 지도자들을 만나 재일 동경 남녀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에 대해 보고하면서 국내에서의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촉구했다. 3·1운동이 일어난 날에도 선생은 여성들에게 독립운동 참여를 촉구했고 선생은 그 배후 지도자로 지목되어 학생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출감 후 선생은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면서도 조국 독립의 꿈과 희망을 잃지 않았고 정신여학교 동창과 교사들이 중심이 된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조직과 활동 상황을 알게 되었다. 선생과 임원들은 애국부인회의 조직 확대와 여성 독립운동의 활성화 방안을 논의한 뒤, 그를 위한 선행 조치로 선생을 회장으로 선임했다. 이후 중국 남경대학에 입학하여 일본에서 못 다한 공부를 계속하는 한편,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에서 황해도 대의원으로 선출되어 활약했다. 이후 미국 유학을 위해 상해를 떠나게 되었고, 고학 생활 중에도 조국 독립의 염원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선생은 1928년 2월 미국에 유학 중인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여성 독립운동 단체인 근화회를 조직했다. 1932년 7월 귀국한 선생은 종교 모임과 강론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등 지속적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선생은 고문 후유증이 재발함에 따라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던 중, 1944년 3월 13일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자료제공=국가보훈처).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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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의 6‧25전쟁영웅, 김한준 육군 대위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가 ‘김한준’ 육군 대위를 2019년 2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김한준 대위는 19세가 되던 1947년 4월 국방경비대에서 모병을 시작하자 지원 입대했다. 이후 6‧25전쟁이 발발하자 제7사단 제8연대 소속으로 평양탈환작전에 참여한 후 압록강을 향해 북진했으며, 풍부한 전투경험과 지휘 능력을 인정받아 육군 소위로 현지 임관되었다. 6‧25전쟁의 전 기간을 전장에서 보낸 김한준 대위는 “전투는 상하 간의 신뢰로 이루어진다. 지휘관이 부하를 믿고 신뢰해야 자신을 사지(死地)로 몰아가는 명령이라 해도 부하는 따르게 된다”는 전투철학을 신조로 삼았으며 지휘관으로서 서로에 대한 신뢰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휴전협상이 막바지에 달했던 1953년 7월 13일, 중공군은 전략적 요충지인 강원도 금성천 부근을 장악하기 위해 5개 군 15개 사단을 투입해 이른바 ‘7‧13공세’로 불리는 최후공세를 취했다. 당시 김한준 대위는 중대장으로 425고지를 사수하는 임무를 받고 직접 중대원들을 진두지휘하여 중공군을 물리치고 추격전을 전개하여 큰 전과를 거두었다. 425고지 전투의 승리는 사단의 주보급로를 확보하고 전력공급원인 화천댐을 사수하는데 일조했으며, 연대 주저항선의 한 축을 지키고 금성천 방어선의 안정적 유지에 크게 기여했다. 정부는 김한준 대위의 공적에 대해 1953년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했으며, 2012년 4월 29일 향년 83세로 별세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자료제공=국가보훈처).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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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출신 2019년 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최정숙님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제주특별자치도보훈청이 제주 출신 2019년 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최정숙님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최정숙님(1902. 2. 10.~ 1977. 2. 22.)은 제주(濟州) 사람으로 1919년 당시 경성여자보통학교 학생으로 3월 1일 서울 탑동(塔洞) 공원에서 독립선언문이 발표되자 수천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행진을 벌이다가 일경의 무력탄압으로 시위가 강제로 해산되고 다른 동지들과 함께 피체되었다. 최정숙님은 같은 해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받기까지 8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교사로 민족교육 및 인재양성에 힘쓰는 등 활동을 계속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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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출신 2019년 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부춘화님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제주특별자치도보훈청이 제주 출신 2019년 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부춘화님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부춘화님(1908. 4. 6.~ 1995. 2. 24.)은 제주도 북제주(北濟州) 사람으로 1932년 1월 제주도 구좌면(舊左面)에서 해녀들이 권익침탈에 항거하는 시위를 전개했다. 1931년 일본 관리들이 해녀들을 가혹하게 대우하고 제주도 해녀조합을 어용화하려 하자, 해녀들은 1931년 12월 20일 요구조건과 투쟁방침을 결의했다. 부춘화님은 1932년 1월 7일과 12일 제주도 구좌면에서 해녀조합의 부당한 침탈행위를 규탄하는 시위운동을 주도하고, 해녀들의 권익을 위해 김옥련(金玉連) 등과 함께 도사(島司) 전구정희(田口禎熹)와 담판을 벌여 요구조건을 관철시켰다. 1월 26일 경에는 제주도 민족운동가의 검거를 저지하려다 피체되어 3개월 정도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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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2019년 1월의 호국인물, 연제근(延濟根) 상사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이 2019년 1월의 호국인물로 연제근(延濟根) 상사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연제근(1930.01.14~1950.09.17) 상사는 1930년 1월 14일 충청북도 증평군 도안면에서 태어났다. 연 상사는 1948년 국방경비대에 입대해 7연대 조교로 근무하다가 1949년 국군 3사단 22연대 1대대 분대장으로서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에 참가했다. 1950년 6·25전쟁 발발 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유엔군은 일제히 낙동강선에서 반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낙동강선 방어작전을 수행 중이던 국군 3사단은 형산강 북쪽을 점령하고 있던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포항 남쪽 형산강 일대까지 밀리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며 고전을 면치 못했다. 특히 형산강 북쪽 달전리에 있던 적 진지에서 퍼붓는 맹렬한 기관총 사격으로 진출이 불가능하게 되자 당시 22연대 1대대의 분대장이었던 연 상사는 12명의 특공대원을 결성해 9월 17일 새벽 4시경, 선봉에 서서 기관총진지를 파괴하기 위해 돌격에 나섰다. 대원들은 수류탄을 몸에 매달고 수중포복으로 형산강을 건너던 중 적의 공격으로 9명은 전사했고 연 상사도 어깨를 관통하는 치명상을 입었다. 그러나 이를 견디며 연 상사를 비롯해 남은 3명은 끝까지 돌진하여 3발의 수류탄을 적의 기관총진지에 투척해 완전히 제압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과정에서 연 상사 역시 장렬히 전사했다. 당시 그의 나이 21세였다. 고인의 목숨 건 희생과 전공에 힘입어 22연대는 형산강을 도하하여 포항지구를 수복했으며 국군 3사단은 동부전선에서 반격작전 수행의 계기를 마련했다. 정부는 고인의 전공을 기려 2계급 특진과 함께 을지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무공포장을 추서했다(자료제공=전쟁기념관)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