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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출신 2019년도 6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홍성옥님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제주특별자치도보훈청이 제주 출신 2019년 6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홍성옥님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청에 의하면, 홍성옥님(1913.06.09.~1972.04.23.)이 제주공립농업학교 2학년생이던 1931년 3월에, 3학년생 김원요가 소위 사상 불순을 이유로 졸업 직전에 퇴학처분을 받자 학교 당국에 격렬히 항의했다. 이에 일경은 졸업식장에서 그를 체포했다. 또한 졸업예정자인 신창진·양두옥이 같은 이유로 유급되었다. 홍성옥님은 동료 학생들과 함께 식민지 교육 철폐를 주장하는 격문을 뿌리고 일본인 교장의 관사를 습격하여 집단으로 항의하며 기물을 파손하는 등의 격렬한 항거를 주도했다. 이 일로 피체된 그는 동년 8월 3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동년 10월 22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5년이 확정되기 까지 7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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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의 독립운동가, 김규식․김순애 선생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이 공동으로 김규식 선생과 김순애 선생 부부를 2019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김규식 선생(1881.1.29.~1950.12.10.)은 1897년 미국 유학을 떠나 로아노크 대학(Roanoke College)에서 수학하고,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에서 영문학 석사를 받은 후 1904년 귀국했다. 1906년 대한자강회 회원으로 강연을 통한 구국운동을 전개했으며 1913년 11월에 중국 상하이로 망명, 신규식과 함께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하고 한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19년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파견되었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총장 자격으로 5월 12일에 한국독립에 관한 청원서와 한국독립 항고서(抗告書)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였고 「한국독립과 평화」라는 책자를 비롯해 다수의 독립운동 홍보문서를 작성하고 각국 대표들 및 언론인들에게 배포해 한국인의 독립의 열망을 전 세계에 널리 알렸다. 1921년 임시정부 내에 독립운동 노선으로 갈등이 야기되자, 잠시 임시정부를 떠났다가 1923년 1월 국민대표회의에서 국민위원과 외무위원을 맡았다. 1933년 1월 미국을 방문해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운동을 전개하고 수천달러를 모금해 돌아왔으며, 1935년 7월 조선민족혁명당의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으나 건강상의 문제로 사천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일에 힘썼다. 1942년 10월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보선되었고 1944년 부주석에 취임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국독립당을 대표하는 김구 주석과 민족혁명당을 대표하는 김규식 부주석 체제의 양대 정당을 중심으로 독립운동 세력이 연대와 협력을 이루어가며 조국 광복을 이루어내었다. 선생은 1950년 북한군에 납치되어 그 해 12월 10일 평안북도 만포진 부근 별오동에서 70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김순애 선생(1889.5.12~1976.5.17)은 1889년 5월 황해도 장연군에서 출생했다. 1909년 정신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1919년 김규식 선생과 결혼했다. 선생은 1919년 7월 이화숙·이선실·강천복·박인선·오의순 등과 함께 ‘여성의 독립운동 참여와 지원’을 목적으로 상해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임시정부가 자금난으로 곤경을 겪게 되자, 1926년 7월 임시정부경제후원회에 참여하여 임시정부의 재정 지원 활동을 하였다. 또한 간호원양성소를 설립, 다수의 간호원을 양성 배출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독립전쟁에 대비하기도 하였다. 1930년 8월 상해에서 김윤경·박영봉·연충효 등과 함께 한인여자청년동맹을 결성하여 한국독립당과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측면 지원하였다. 1943년 2월 23일 충칭의 각계 각파 부인 50여명과 한국애국부인회 재건대회를 개최하고 조직을 재출범시켰으며 주석으로 추대되었다. 선생은 1945년 11월 환국해, 1946년부터 1962년까지 모교인 정신여자중·고등학교 재단 이사장과 이사 등으로 활약하면서 여성교육에 공헌했다. 선생은 1976년 5월 17일 87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정부에서는 두 분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김규식 선생에게는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김순애 선생에게는 1977년 독립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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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출신 2019년 5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김형배(김영배)님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제주특별자치도보훈청이 제주 출신 2019년 5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김형배(김영배)님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김형배(김영배)님(1901.10.22.~1944.02.09.)은 제주(濟州) 사람으로, 1919년 3월 21일 제주도 신좌면(新左面) 조천리(朝天里)에서 김시범(金時範)·김시은(金時殷) 등이 주도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하기로 결의하고 김시범의 의뢰로 태극기 4매를 만들고 이들과 함께 장터에 모인 군중을 규합해 100여 명의 군중과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벌이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 해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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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출신 2019년 4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강규언님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제주특별자치도보훈청이 제주 출신 2019년 4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강규언님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강규언님(1898.04.17.~1927.04.15.)은 제주(濟州) 사람으로, 1919년 3월 5일 당시 그는 전북 옥구군 개정면 구암리에 있는 영명중학교 학생으로 같은 학교 교사인 이두열·박연세 등이 주도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여했다. 이들은 3월 1일부터 학교 내에서 약 7,000매의 독립선언서를 복사하는 등 거사를 준비했으나 주동 인물들이 사전에 검거되자 양기철·전세종 등과 함께 3월 6일 군산 장날을 이용하여 합세한 주민 500여 명과 함께 군산경찰서 등 시내 각 지역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행진을 벌이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 해 3월 31일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공소하여 4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6월을 받아 상고하였으나 6월 12일 고등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그는 고향인 제주로 돌아와서 모슬포에 광선학교를 설립해 민족 교육을 실시하면서 인재 양성에 힘쓰는 등 활동을 이어나갔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자료제공=제주특별자치도보훈청).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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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의 독립운동가, 안창호 선생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광복회·독립기념관이 공동으로 안창호(1878.11.09.~1938.03.10.) 선생을 2019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선생은 1878년 11월 9일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 칠리 봉상도(鳳翔島, 일명 도롱섬)에서 태어나, 1896년 18세 되던 해에 구세학당 보통부를 졸업하고 조교를 맡아 학생을 지도했다. 이후 독립협회에 가입한 선생은 귀향해 독립협회 관서지부를 설립해 민권운동에 뛰어들었다. 1902년 결혼 직후 미국으로 건너간 선생은 리버사이드 일대의 한인지도자로 부상했다. 1905년 4월에는 동지들과 함께 조국 광복을 목표로 삼는 미주 한인단체인 공립협회를 창립했다. 1907년 5월 공립협회 제3대 회장으로 선출된 선생은 언론활동과 교육진흥, 실업진흥 등 여러 가지 구국사업을 전개했다. 이후 공립협회는 1909년에 하와이 한인합성협회와, 1910년에 대동보국회와 통합되어 1910년 5월 10일 미주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대한인국민회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선생은 조국 독립을 추구한 국내 비밀결사인 신민회 활동에도 참여했다. 1913년 5월 13일, 8도 대표를 선정해 민족을 지도해 나갈 수 있는 중견 인물을 배출하기 위한 동맹수련단체로서 흥사단이 출범했다. 선생의 주도로 조직된 흥사단은 무실역행, 충의용감, 건전인격, 단결훈련, 국민개업(國民皆業) 등을 목표로 독립운동을 위한 조직적 재정후원과 일꾼양성을 통한 민족독립의 사명 완수에 매진했다. 1919년 3·1운동 소식이 미국에 전달되자 3월 13일에 대한인국민회는 긴급위원회를 개최했다. 이때 선생은 ‘삼일운동을 계승하자’라는 연설을 통해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민족자결주의의 공포, 그리고 파리평화회의 개최와 같은 외부적 요인보다 민족의 실력을 보여준 3.1운동이 훨씬 중대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선포했다. 3·1운동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이라는 결실을 맺자 선생은 1919년 5월 25일에 상하이에 도착해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로 취임했다. 이후 임시정부의 체계를 갖추고 조직적으로 사업을 전개해 나갔다. 정부에는 국민이 있어야 하므로 먼저 인구조사에 착수하였고 정부 운영에 소요되는 재정 확보를 위한 국채 발행을 비롯해 인두세 징수, 구국재정단 조직 등 여러 정책을 고민했다. 1932년 4월 29일에 윤봉길 의사가 일본인들의 천장절 행사장인 홍구공원에 폭탄을 투척하자, 같은 날 상해 이유필의 집을 방문했던 선생은 민단장으로 오인되어 일본 경찰에 의해 연행되었다. 이후 국내로 압송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대전감옥으로 이송되는 2년 6개월간의 옥고를 치른 끝에 1935년 2월 10일 가출옥했다. 곧이어 일제는 국내의 민족운동 일체를 말살하기 위해 1937년 6월, ‘동우회사건’을 일으켰다. 그로인해 선생을 비롯한 180여명의 동우회 회원들은 종로경찰서로 넘겨져 135일간 집중조사를 받고 8월 15일 예심종결을 거쳐 ‘치안유지법 위반’ 판결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선생은 지병이 악화되어 병보석으로 출소했다. 병마를 이기지 못한 선생은 1938년 3월 10일, 0시 5분에 만 59년 4개월의 일기로 서거했다. 해방 후 1973년에 정부는 선생 탄신 95주년을 맞이해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도산공원을 조성하고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힌 선생의 유해와 그의 아내 이혜련의 유해를 이장하여 도산공원 묘지에 합장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자료제공=국가보훈처).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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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출신 2019년 3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김순탁님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제주특별자치도보훈청이 제주 출신 2019년 3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김순탁님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김순탁(1895.03.07.~ 1938. 3. 12.)님은 제주(濟州) 사람으로 1919년 3월 제주 조천(朝川) 3·1운동에 참가했으며, 1928년에는 제주청년동맹지부(濟州靑年同盟支部) 신좌소비조합(新左消費組合) 간부로 활동하며 야학(夜學)을 통해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도내의 유지인 김시우는 김장환과 함께 여러 동지들을 규합해 나가며, 미모치(味毛峙:일명 미밑 동산, 혹은 만세동산이라 일컫음) 동산에서 3월 21일 만세운동을 벌일 것을 계획하고, 인근 부락과 서당 학생들에게도 동참할 것을 권유했다. 거사일인 3월 21일 오후 3시경, 김순탁을 비롯한 600여 명의 시위군중이 미모치에 모였다. 김시우가 큰 태극기를 미모치에 세우고 목메인 음성으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니 모든 사람들이 감격하였다. 선언이 끝나고 김장환이 나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했다. 그리고 각기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연창하며 큰 길로 시위행진을 벌였다. 그런데 이때 긴급 출동한 수십명의 일본 무장병에 의해 저지당하고 김순탁은 피체되어, 1919년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출옥 후 그는 1928년 제주청년동맹지부 신좌소비조합 간부로 활동하며 야학을 통해 민족교육을 실시하다가 체포되어 4개월 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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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의 독립운동가, 손병희 선생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이 공동으로 손병희(1861.4.8.~1922.5.19.) 선생을 2019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선생은 1861년 충북 청원(청주)에서 출생해 1882년 동학에 입문한 후 1894년 호서지방 중심의 북접(北接) 사령관인 통령(統領)에 임명되어 남접의 전봉준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의 기수로서 활약했다. 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국권을 수호하고, 또 회복하기 위해 민족을 계몽하는 운동에 관심을 기울인 선생은 보성학교와 동덕여학교를 비롯한 수십개의 남녀학교를 인수 또는 신설해 운영함으로써 민족의 동량을 육성했다. 선생은 1919년 1월 동경유학생의 2․8독립선언계획과 신한청년당 및 기독교계의 독립운동 계획을 듣고 독립선언 방식의 운동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시위를 전개함으로써 독립에 대한 열망을 알리고, 일본의 정부와 귀족원·중의원, 조선총독부 파리강화회의의 열국의 대표에게 한국의 독립에 대한 의견서와 청원서를 보내기로 작정했다. 선생은 권동진, 오세창, 최린과 3․1독립운동의 골간이 된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화의 3대원칙에 합의하고 각 교계의 중심인사들을 규합해 갔다. 이윽고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와 청원서 등이 완성되자 선생은 직접 이를 검토했다. 그리고 천도교계와 기독교계의 검토가 이루어진 후, 천도교의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가 인쇄되었다. 1919년 2월 27일, 민족대표가 독립선언서에 날인했고 2월 28일 자신의 집에 천도교, 기독교, 불교의 민족대표를 불러 협의하여 독립선언서의 발표 장소를 탑골공원에서 태화관으로 변경했다.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거나 배포하면 소동이 일어날까 우려한 것이다. 거사일인 3월 1일, 선생은 태화관에 모인 28인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그리고 선언식을 마친 후 일경에 연락하여 자진 체포되었다. 그렇지만 선생과 다른 민족대표가 점화한 3․1운동은 이후 요원의 불길처럼 국내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중국, 러시아, 미국 등 한국인이 살고 있는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선생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고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뇌출혈로 가출옥하였으나 1922년 5월 19일 생을 마감했다. 선생의 유해는 서울 우이동 언덕에 안장되었고 1966년 민족의 얼이 깃든 탑골공원에 선생의 동상이 세워졌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자료제공=국가보훈처).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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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의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선생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이 공동으로 김마리아 선생을 2019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김마리아(1892. 6. 18. ~ 1944. 3. 13.) 선생은 1892년 6월 18일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마리아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던 아버지가 지어주신 세례명이다. 1918년 1월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발표되고, 이듬해 1월부터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알려지게 되자, 재일 동경 유학생들은 이를 한국 독립의 절호의 기회로 이용하고자 독립선언을 준비했다. 이것이 바로 동경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 계획이었는데, 여기에 김마리아라 선생을 비롯한 여자 유학생들도 참여하여 활동했다. 이후 선생은 2·8독립선언문 10여 장을 미농지에 복사하여 옷 속에 감추고는 현해탄을 건너 부산에 도착했다. 이어 교육계·기독교계·천도교계의 지도자들을 만나 재일 동경 남녀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에 대해 보고하면서 국내에서의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촉구했다. 3·1운동이 일어난 날에도 선생은 여성들에게 독립운동 참여를 촉구했고 선생은 그 배후 지도자로 지목되어 학생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출감 후 선생은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면서도 조국 독립의 꿈과 희망을 잃지 않았고 정신여학교 동창과 교사들이 중심이 된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조직과 활동 상황을 알게 되었다. 선생과 임원들은 애국부인회의 조직 확대와 여성 독립운동의 활성화 방안을 논의한 뒤, 그를 위한 선행 조치로 선생을 회장으로 선임했다. 이후 중국 남경대학에 입학하여 일본에서 못 다한 공부를 계속하는 한편,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에서 황해도 대의원으로 선출되어 활약했다. 이후 미국 유학을 위해 상해를 떠나게 되었고, 고학 생활 중에도 조국 독립의 염원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선생은 1928년 2월 미국에 유학 중인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여성 독립운동 단체인 근화회를 조직했다. 1932년 7월 귀국한 선생은 종교 모임과 강론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등 지속적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선생은 고문 후유증이 재발함에 따라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던 중, 1944년 3월 13일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자료제공=국가보훈처).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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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출신 2019년 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최정숙님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제주특별자치도보훈청이 제주 출신 2019년 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최정숙님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최정숙님(1902. 2. 10.~ 1977. 2. 22.)은 제주(濟州) 사람으로 1919년 당시 경성여자보통학교 학생으로 3월 1일 서울 탑동(塔洞) 공원에서 독립선언문이 발표되자 수천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행진을 벌이다가 일경의 무력탄압으로 시위가 강제로 해산되고 다른 동지들과 함께 피체되었다. 최정숙님은 같은 해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받기까지 8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교사로 민족교육 및 인재양성에 힘쓰는 등 활동을 계속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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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출신 2019년 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부춘화님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제주특별자치도보훈청이 제주 출신 2019년 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부춘화님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부춘화님(1908. 4. 6.~ 1995. 2. 24.)은 제주도 북제주(北濟州) 사람으로 1932년 1월 제주도 구좌면(舊左面)에서 해녀들이 권익침탈에 항거하는 시위를 전개했다. 1931년 일본 관리들이 해녀들을 가혹하게 대우하고 제주도 해녀조합을 어용화하려 하자, 해녀들은 1931년 12월 20일 요구조건과 투쟁방침을 결의했다. 부춘화님은 1932년 1월 7일과 12일 제주도 구좌면에서 해녀조합의 부당한 침탈행위를 규탄하는 시위운동을 주도하고, 해녀들의 권익을 위해 김옥련(金玉連) 등과 함께 도사(島司) 전구정희(田口禎熹)와 담판을 벌여 요구조건을 관철시켰다. 1월 26일 경에는 제주도 민족운동가의 검거를 저지하려다 피체되어 3개월 정도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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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월의 독립운동가, 유관순 열사 ··· 조국독립을 위해 꽃다운 청춘과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이 공동으로 유관순(1902. 12. 16. ~ 1920. 9. 28.) 선생을 2019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선생은 1902년 12월 16일 충남 목천(현재 천안)에서 5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1918년 4월 이화학당의 고등과 1학년에 진학한 선생은 3․1운동이 발발하기 바로 전날 고등과 1학년 학생들과 시위 결사대를 조직해 만세시위에 참가할 것을 맹세했다. 3월 1일 탑골공원을 나온 만세 시위대가 학교 앞을 지나자 선생은 5명의 시위 결사대 동지들과 함께 시위운동에 동참했다. 3월 5일, 선생은 5명의 시위 결사대 동지들과 함께 서울에서 전개된 최대의 시위운동인 남대문역 만세 시위운동에도 참여했다. 학교가 문을 닫게 되자 선생은 서울의 독립운동 소식을 고향에 전하고, 또 거기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고서 선생은 3월 13일 사촌 언니인 유예도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몰래 숨겨 귀향하여 본격적으로 고향에서의 만세 시위운동을 추진했다. 4월 1일 병천면 아우내 장날, 선생은 장터 어귀에서 밤새 만든 태극기를 나누어 주면서 만세 시위운동에 참여하러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시위 대열이 아우내 장터 곳곳을 누비자 병천 헌병주재소의 헌병들이 달려와 총검을 휘두르며 만세 시위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 때 선생의 아버지 유중권이 “왜 사람을 함부로 죽이느냐”고 항의하다가 일본 헌병의 총검에 찔려 순국하였고, 이를 보고 남편의 원수를 갚으려고 달려들다가 선생의 모친마저도 일본 헌병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이에 선생은 군중들을 이끌고, 아버지의 시신을 둘러메고 병천 헌병주재소로 쇄도하여 항의 시위를 계속했다. 그 날 저녁, 선생과 유중무, 조인원·조병호 부자 등 시위 주동자들은 체포되어 천안헌병대로 압송되었다. 선생은 천안헌병대에서 갖은 고문을 받으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시위 주동자라고 말하면서 죄 없는 다른 사람들을 석방하라고 호통을 쳤다. 선생은 서대문 감옥에서의 온갖 탄압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옥중 만세를 불렀다. 특히 1920년 3월 1일, 3․1운동 1주년을 맞이하여 수감 중인 동지들과 함께 대대적인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선생은 지하 감방에 감금되어 야만적이고 무자비한 고문을 당하게 되었다. 선생은 고문으로 인해 방광이 터지는 중상을 입었으나 치료하지 못한 채 고문의 후유증과 영양실조로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경, 서대문감옥에서 18살의 꽃다운 나이로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자료제공=국가보훈처).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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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의 독립운동가, 한인애국단원 유상근 선생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이 공동으로 2018년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일본군 고위관료 처단 계획을 실행하려다 붙잡혀 광복을 하루 앞두고 옥중 순국한 한인애국단원 유상근(柳相根, 미상~1945. 8. 14.) 선생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선생은 강원도 통천에서 태어나 한학을 공부하다 10세 되던 해 통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집안 사정으로 북간도 연길현 2도구로 이주했고, 봉밀구(峰密溝) 필산촌(畢山村)을 거쳐 용정촌으로 가 동흥중학교에서 1년간 수학했다. 재차 화룡현으로 이주한 뒤 19세 되던 해 이모부인 이종익이 있는 하얼빈으로 갔다. 하얼빈에서 생활하던 선생은 1930년경 상하이로 갔다. 상하이에서 김구를 만났고, 그의 도움으로 영국인이 운영하는 버스회사의 검표원으로 취직했지만 궁핍한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홍콩과 광둥지방을 오가며 인삼장사를 했다. 중국정부는 1931년 9월 18일 만주를 침략한 일본을 국제연맹에 제소했다. 국제연맹은 릿튼(Lytton)을 위원장으로 하는 조사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했고, 조사단은 이듬해인 1932년 5월 26일부터 다롄(大連)에 오게 되었다. 김구는 일본군 고위관료가 조사단 환영식에 참가하면 이들을 처단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1932년 1~2월경 김구의 부름으로 상하이로 돌아온 선생은 2월 24일 한인애국단에 가입했고, 4월 27일 윤봉길의사가 홍커우공원에서 사용한 것과 같은 폭탄을 들고 다롄으로 갔다. 선생은 의거를 위해 미리 가있던 최홍식을 다롄에서 만났고, 이성원․이성발 형제의 협조를 받아 거사를 준비했다. 그러나 거사 이틀 전인 5월 24일 최홍식이 상하이로 보냈던 전보가 추적당해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선생은 다롄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살인예비, 폭발물취체규칙 위반’으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광복을 하루 앞둔 1945년 8월 14일 뤼순감옥에서 순국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유상근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자료제공=국가보훈처).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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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의 독립운동가, 조경환 선생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조경환(曺京煥, 1876. 2.14.~1909. 1.10.) 선생을 2018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1876년 현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난 선생은 시대의 전환기에 유학(儒學)을 공부했다. 20세기 초반 노골적인 일제의 침략이 자행되던 시기에 전국을 순회하며 조국의 현실을 목도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서당을 차려 후학을 육성했다. 선생은 1906년 태인에서 을사늑약에 반발해 최익현과 임병찬 등 순창 12의사가 의병을 일으켰으나 서울로 압송되고 최익현은 대마도에서 순국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1907년 후반 재차 호남지방에서 기삼연과 김준 등이 고창읍성을 점령하는 등 맹활약을 떨치자 선생은 그 해 12월 중순 김준 의진에 합류하여 좌익장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선생은 김준 의진에서 좌익장을 맡아 함평읍, 창평 무동촌(茂洞村), 장성 낭월산(浪月山), 영광 월암산(月岩山), 광주 어등산(魚登山) 등 수많은 전투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했다. 1908년 음력 3월 어등산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의병장 김준이 순국하고, 일본군이 추격해오자 함평 당산촌 나평집(羅平集)으로 후퇴하여 후일을 도모했다. 일본군의 진압작전이 종료되고 감시망이 느슨해지자 흩어진 의병들을 다시 모아 전열을 정비하기 시작했고, 이때 전북 이석용(李錫庸)의진에서 활동하던 전수용과 연합하여 용진산(聳珍山)에서 200여 명 규모로 의진을 재편하고 의병장이 되었다. 의병장이 된 선생은 어등산에서 김준 의병장의 장례를 치르고 결사항전의 의지를 다졌다. 곧 용진산에서 군사들에게 음식을 베풀어 위로하고 광주 흑석(黑石)에 있는 일본군 순사대를 공격하며 의병장으로서 본격적인 전투를 시작했다. 조경환 의진은 1~200명 내외의 군세를 형성하여 전남 광주, 함평, 영광, 장성, 담양 등지를 무대로 활동했다. 의진은 일본제 30년식 보병총과 기병총 4정, 한병총(韓兵銃) 12정, 천보포(千步砲) 8문, 개조 화승총 약 60정 등의 열악한 무기로 일본군경과 맞서 싸웠다. 1909년 1월 혹한기를 맞아 대부분의 부하를 일시 귀향시키고, 귀가하지 않은 50여 명과 함께 어등산에 주둔했다. 그러나 의진은 일본군 광주수비군에 의해 주둔 사실을 탐지 당했다. 1909년 1월 10일(음력 1908년 12월 19일) 조경환 의진은 야마다 소위가 이끄는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전사 20명, 체포 10명의 피해를 입었다. 선생은 총탄을 맞고서도 부하들의 명단을 불사르고 어등산 전장에서 순국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조경환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자료제공=국가보훈처).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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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의 독립운동가, 현천묵 선생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2018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현천묵 (玄天黙, 1862.4.9.∼1928) 선생을 선정했다고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이 밝혔다. 현천묵 선생은 함경북도 경성군 출신으로 40대 중반이었던 1906년 보성학교 학감으로 학교의 주요 업무와 학생들을 관리·감독하며 본격적인 교육활동을 시작했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된 이후 계몽단체인 대한협회 경성지회에 참여했고, 이후 지회장을 맡아 경성지회의 활동을 공고히 시키고 교육 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선생은 대한협회 경성지회를 이끄는 수장으로 교육과 자강을 통해 구국의 방법을 모색했으며, 경성의병을 지원하는 한편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등 항일전선에 앞장섰다. 1909년 선생은 우리겨레, 우리민족을 중심으로 하는 단군교(대종교)에 입교했고, 1910~11년 사이 북간도로 망명했다. 북간도 망명 이후 선생은 서일과 함께 중광단을 조직해 대종교 포교에 앞장섰고, 대종교에서 설립한 교육기관의 교장을 맡아 민족교육을 이어가며 이주한인 자녀들에게 교육받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고, 이들이 독립군으로 성장하도록 이끌었다. 또한 1919년 대한군정서의 부총재를 맡아 총재 서일을 보좌하며 단체를 이끌었고, 청산리 전투 이후 조직된 대한의용군 총사령부(후에 대한독립단)의 부총재를 맡았다. 1921년 자유시참변의 충격으로 서일이 자결한 후에는 대한군정서의 총재를 맡아 조직의 재정비를 담당했다. 대한군정서 총재로서 선생은 단체를 재정비하며, 대종교 포교 및 한인들의 교육,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에 힘썼다. 그리고 신민부의 중앙집행위원과 검사원장 등의 직책을 맡으며 적극적인 활동을 이어나갔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현천묵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자료제공=국가보훈처).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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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9월의 독립운동가, 최용덕 선생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이 최용덕(崔用德, 1898.9.19.~1969.8.15.) 선생을 2018년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선생은 1898년 9월 19일 서울 성북동에서 태어나 경술국치 이후 중국 북경으로 건너가 새로운 사상을 익혔고, 1916년 원세개가 설립한 중국 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단기서 군의 제2사단에서 복무했다. 1919년 중국에서 3.1만세운동 소식을 접한 선생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해 다수의 한인독립운동가들과 유학생들이 거주하던 중국 북경지역을 중심으로 대한독립청년단 단원 모집을 위해 활동했다. 1921년 4월 이후 의열단에 참여해 단장 김원봉과 함께 1922년 의열단의 국내거사를 준비하여 김상옥 의사의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 의거를 지원했다. 이후 북경에서 민족유일당운동에 참여하여 1926월 10월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 결성에 기여했다. 선생은 독립운동과 더불어 중국 국민혁명군에서 복무했으며, 중화민국 공군 창설에 참여하여 중국 공군 대령으로 활약했다. 1940년 9월 임시정부의 국군인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비서처장에 임명되어 총사령 이청천을 보좌했고, 1942년과 1943년 총사령부의 편제가 개편되면서 각각 총무처장과 참모처장에 임명되어 한국광복군의 운영과 실무를 총괄했다. 그리고 1943년 임시정부 국무위원회에 비행대 창설을 건의해 공군설계위원회의 설계위원 및 부주임을 맡아 임시정부의 공군 창설 준비를 추진했다. 해방 후에는 화북지역의 한교선무단의 군사조장으로 군무를 총괄하고, 북평잠편지대의 지대장으로 한국광복군 확군 활동에 기여했으며, 1946년 7월 귀국하여 줄곧 군인으로서 공군 창설에 노력했다. 대한민국 정부 초대 국방부 차관, 공군사관학교 교장, 제2대 공군참모총장을 지내고 1956년 공군 중장으로 예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최용덕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자료제공=국가보훈처).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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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지방보훈청, 2018년 9월의 우리지역 독립운동가 ‘이종건’ 선생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대전지방보훈청이 9월의 우리지역 독립운동가로 ‘이종건’ 선생을 선정한다고 밝혔다. 이종건(李鍾乾, 1906.5.14~1960.6.19) 선생은 1906년 5월 14일 충청남도 천안군 수신면 속창리에서 태어나 1928년 휘문고보를 졸업했다. 선생은 중국으로 망명한 후 1931년 북경(北京)에서 한족동맹회(韓族同盟會)에 가입하고, 일경의 밀정 신 모(申某)를 주살한 뒤 상해로 피신했다. 그해 10월 대한교민단 의경대원(義警隊員)에 임명되어 출입국자들의 신상파악과 독립운동가들의 신변보호에 전념했다. 같은 해 12월 24일 임시의정원 충청도 대표의원에 선출되어 1933년 3월 6일까지 의정활동에 참여했고 1933년 박찬익(朴贊翊) 등과 한국독립당 남경지부 간부로 활동했다. 1935년 4월에는 중국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를 졸업하고 남경에 머물면서 민족혁명당 창당에 참가했고 1936년 봄에는 동당 훈련단에서 훈련을 받기도 했다. 1942년에 광복군 제1지대에 편입되었고 1944년 3월에는 민족혁명당 감찰위원에 선임되기도 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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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지방보훈청 2018년 8월의 우리지역 독립운동가, ‘문양목 선생’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대전지방보훈청이 2018년 8월의 우리지역 독립운동가로 ‘문양목 선생’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문양목 선생은 1894년 동학혁명에 참여했다가 실패하고 1903년 하와이로 망명했다. 1906년 미국 본토 샌프란시스코로 도항하여 1907년 3월 대동보국회를 결성하고 회장등으로 활동하면서 1909년 1월 경까지 대동공보사(大同公報社) 사장, 대동공보(大同公報) 주필 등으로 활동했다. 선생은 1908년 일본인의 한국침략을 정당화시키는 스티븐의 발언을 비판하고 시정을 요구했으며 이승만 저술 「국민개병설」과 「군인수지(軍人須知)」를 발간해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1909년경 박용만이 네브라스카에 ‘소년병학교’를 개설하자 학생들을 권유하여 입교시켰으며 1911년에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총회장(總會長), 1912년에는 신한민보(新韓民報) 주필로 활동했고 1918년까지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의 회원으로 활동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자료제공=대전지방보훈청).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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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의 독립운동가, 김교헌 선생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이 김교헌(金敎獻, 1867.07.05.~1923.11.18.) 선생을 2018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김교헌 선생은 1867년 경기도 수원군 구포리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18세가 되던 1885년에 정시문과(庭試文科) 병과(丙科)에 급제했다. 1898년부터 독립협회에서 몸담기 시작한 선생은 독립협회 간부진들이 개혁내각 수립과 의회개설을 요구하다가 구속되자, 독립협회의 대표위원으로 만민공동회 운동을 전개하는 등 민중계몽에 앞장섰다. 1906년 동래부사에 임명된 선생은 부산에서 통감부의 비호 아래 일본인들이 한인들을 대상으로 경제적 침탈과 만행을 자행하는 것을 목격하고 일본인들의 횡포를 제지하다가 통감부의 압력과 친일파 송병준의 모함을 받고 해직됐다. 선생은 1910년 한국이 일본에 강제병합 당하자 대종교에 입교하고 1914년 「신단실기(神壇實記)」와 「신단민사(神壇民史)」를 저술했다. 이 책은 단군을 중심으로 한 민족서사로서 망국이후 한국 국민들의 애국혼을 고취했다. 조선총독부는 1915년 10월 포교규칙을 발표하고 대종교를 항일독립운동단체로 규정하여 탄압을 가하는 가운데 1916년 9월 대종교 2대 교주로 취임한 선생은 대종교 본사를 만주 화룡현(和龍縣)으로 옮기고, 항일무장투쟁 역량을 강화하고자 46개의 시교당을 각 지역에 설치하여 민족교육을 전개했다. 1919년 2월 대종교 교주로서 대종교 주요 인사 및 해외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와 함께 뜻을 모아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해 세계 각국에 ‘한일합방’은 무효임을 선언하고, 향후 수립될 국가는 자주·독립적인 민주공화제에 기반을 둘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또한, 1919년 3월 24일 만주 안도현(安圖縣)에서 대종교인, 학생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전개하며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했으며 1919년 10월 서일, 현천묵 등 대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에 참여해 1920년 10월 홍범도, 김좌진이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끄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청산리대첩에서 패배한 일본은 만주거주 한인들을 대상으로 학살을 자행했다. 그 상황에서 대종교의 지도자중 한명이었던 서일이 순국했다. 이에 선생은 한인들을 보호하고 대종교를 지키고자 본사를 영안현(寧安縣)으로 옮겼다. 서일의 죽음과 일본의 한인 학살에 충격을 받은 선생은 1923년 11월 18일 본사 수도실에서 순국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김교헌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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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의 독립운동가, 연미당(延薇堂) 선생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이 연미당(延薇堂) 선생을 2018년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보도했다. 선생(1908.7.15.~1981.1.1.)은 1908년 7월에 태어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공립학교인 인성학교(人成學校)를 졸업하고 1927년 7월 청년 독립운동가 엄항섭과 결혼했다. 부친 연병환은 북간도 청년들이 1919년 3월 3일 만세운동을 전개하자 배후에서 이를 지원하다 체포되어 2개월간의 옥고를 치른 후 상하이로 망명했다. 선생은 남편 엄항섭을 내조하면서 자녀들의 교육과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역할을 맡았다. 1927년 11월 상해에서 결성된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에 참여하기 시작한 선생은 상해여자청년동맹에서도 활동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사가 상하이 홍구공원 의거 이후 선생은 가족을 이끌고 상하이를 탈출했다. 선생은 임시정부가 중국 가흥 등지로 이동할 때 자신도 돌보기 힘든 상황에서 가흥에서 폐결핵으로 고생하던 이동휘와 장사 남목청에서 피습당한 김구를 간호하는 등 노(老) 독립운동가들을 병간호했다. 1936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과 재건 한국독립당 당원으로도 활동했고 1940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경에 정착하자 항일과 독립을 위해 여성들을 결집하고자 한국혁명여성창립동맹을 발족하고 애국부인회를 재건했다. 특히, 선생은 중경 방송국에서 일본군 소속 한인 사병들을 광복군으로 전향시키기 위한 반일선전 활동을 전개해 갔다. 해방이후 중국에 있는 한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늦은 1946년 6월 3일 한국으로 환국한 선생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남편이 납북되어 생이별을 해야만 했다. 월북자 가족이라는 오해와 중풍으로 힘겨운 세월을 보냈던 선생은 1981년 1월 1일 순국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연미당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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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의 독립운동가, 이대위 선생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이 2018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이대위(李大爲, 1878.12.28.~1928. 6.17.) 선생을 선정했다고 밝혔다. 이대위 선생은 1878년 평남 강서에서 출생해 평양에서 중등과정을 이수하고 1903년 미국으로 유학길에 올라 1908년 포틀랜드중학교를 졸업한 후 교포들의 도움으로 한인으로서는 최초로 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역사학을 전공했다. 선생은 1911년 샌프란시스코 한인감리교회 제3대 전도사가 되었고, 1912년 목사 안수를 받은 후부터 1928년 별세할 때까지 이 교회 목사로 활동했다. 1913년 미주한인단체인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총회장에 취임하여 브라이언 국무장관에게 전보를 보내 미주한인이 한일 강제병합 이전에 미국으로 이주하였음을 이유로 일본인과 국적을 구분해 줄 것을 요구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1914년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를 법인으로 등록하고 중국을 통해 미국에 입국하는 유학생과 동포들의 보증을 서고 정착을 도와주는 영사관 역할을 수행했다. 1915년 ‘신한민보’ 주필로 활동하며 한글식자기를 발명하여 미주한인사회의 출판문화를 향상시켰고, 1918년 말 대한독립선언서에 안창호, 박용만, 이승만과 함께 미주지역 대표로 서명했다. 1919년 3월 22일자 신한민보를 통해 3․1독립만세운동과 그 이후 국내 상황을 미주 동포들에게 알리고 단결하여 독립운동에 나설 것을 호소했다. 같은 해 7월부터 9월까지 임시정부에서 대미외교업무 수행을 위해 워싱턴에 설치한 구미위원부에서 활동했고, 1928년 6월 17일 샌프란시스코 병원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이대위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