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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12-31 11:15:36
  • 수정 2018-12-31 11: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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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이 공동으로 유관순(1902. 12. 16. ~ 1920. 9. 28.) 선생을 2019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선생은 19021216일 충남 목천(현재 천안)에서 5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19184월 이화학당의 고등과 1학년에 진학한 선생은 31운동이 발발하기 바로 전날 고등과 1학년 학생들과 시위 결사대를 조직해 만세시위에 참가할 것을 맹세했다.


31일 탑골공원을 나온 만세 시위대가 학교 앞을 지나자 선생은 5명의 시위 결사대 동지들과 함께 시위운동에 동참했다. 35, 선생은 5명의 시위 결사대 동지들과 함께 서울에서 전개된 최대의 시위운동인 남대문역 만세 시위운동에도 참여했다.


▲ [좌측사진-수형자기록표 사진, 우측사진-이화학당 시절(뒷쪽 오른쪽 끝) / 사진제공=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이 공동으로 유관순 선생을 2019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학교가 문을 닫게 되자 선생은 서울의 독립운동 소식을 고향에 전하고, 또 거기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고서 선생은 313일 사촌 언니인 유예도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몰래 숨겨 귀향하여 본격적으로 고향에서의 만세 시위운동을 추진했다.


41일 병천면 아우내 장날, 선생은 장터 어귀에서 밤새 만든 태극기를 나누어 주면서 만세 시위운동에 참여하러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시위 대열이 아우내 장터 곳곳을 누비자 병천 헌병주재소의 헌병들이 달려와 총검을 휘두르며 만세 시위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 때 선생의 아버지 유중권이 왜 사람을 함부로 죽이느냐고 항의하다가 일본 헌병의 총검에 찔려 순국하였고, 이를 보고 남편의 원수를 갚으려고 달려들다가 선생의 모친마저도 일본 헌병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이에 선생은 군중들을 이끌고, 아버지의 시신을 둘러메고 병천 헌병주재소로 쇄도하여 항의 시위를 계속했다. 그 날 저녁, 선생과 유중무, 조인원·조병호 부자 등 시위 주동자들은 체포되어 천안헌병대로 압송되었다.


선생은 천안헌병대에서 갖은 고문을 받으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시위 주동자라고 말하면서 죄 없는 다른 사람들을 석방하라고 호통을 쳤다. 선생은 서대문 감옥에서의 온갖 탄압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옥중 만세를 불렀다. 특히 192031, 31운동 1주년을 맞이하여 수감 중인 동지들과 함께 대대적인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선생은 지하 감방에 감금되어 야만적이고 무자비한 고문을 당하게 되었다. 선생은 고문으로 인해 방광이 터지는 중상을 입었으나 치료하지 못한 채 고문의 후유증과 영양실조로 1920928일 오전 8시경, 서대문감옥에서 18살의 꽃다운 나이로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자료제공=국가보훈처).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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