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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윤 육군하사, 국립대전현충원 2018년 7월의 현충인물 ... 6.25전쟁 당시 공비토벌작전 참전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립대전현충원이 ‘김화윤 육군하사’를 2018년 7월의 현충인물로 선정했다.김화윤 육군하사는 부산에서 태어나 6·25전쟁 당시 공비토벌작전 등을 참전해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김 하사가 소속된 수도사단은 북한의 후방까지 맹진했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다 3.8선을 중심으로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전투가 지속된다. 이때 국군의 후방에서 활동하고 있던 공비들이 지리산을 중심으로 백운산과 덕유산 등 험준한 산악지대에 거점을 두고 국군과 유엔군의 보급로 차단, 식량 약탈, 통신망 절단, 살인, 방화, 전투근무지원시설 위협 등 후방교란으로 전후방이 어지러운 상태에 놓이게 됐다. 육군본부는 후방지역 군사시설 보호와 치안질서 유지를 위해 2개 사단 규모의 군단급 특수임무부대 ‘백야전전투사사령부’(백야사)를 창설하여 수도사단과 제8사단 7개 연대를 기동타격대로, 경비부대와 예비 연대 그리고 경찰부대를 저지부대·거점수비대로 편성하고 1951년 말부터 1952년 2월 말까지 호남지역 공비토벌작전을 전면 개시했다. 김 하사는 수도사단 26연대 3중대 3소대 분대장으로 공비토벌작전에 참전, 분대를 진두지휘하여 백운산 지역 위장동굴에서 공비1개 분대를 생포한 후 정밀 수색해 공비참모장을 사살하고 추가로 공비 24명을 생포하는 등 혁혁한 공을 세운다. 정부는 조국수호에 앞장섰던 김 하사의 공로를 기려 1952년 을지무공훈장과 1954년 화랑무공훈장을 수여했으며, 국립대전현충원 사병 제1묘역(122묘판 8924호)에 안장하여 고인의 공훈을 기리고 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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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의 6.25전쟁영웅, 김해수 경찰 경감과 석상익 경찰 경위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가 ‘김해수’ 경찰 경감과 ‘석상익’ 경찰 경위를 7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1950년 7월 1일 적의 대대적 공세에 강원도 경찰은 대부분 남하한 상태에서도, 강원도비상경비사령부는 10만kw 규모의 화력발전소가 있는 영월을 방어하기 위해 전경 제8대대와 홍천·인제의 병력 100여 명으로 영월 방어부대를 편성해 강원도경찰학교장인 김인호 총경을 부대장으로 임명했다. 2일부터 수차례의 공방전 끝에 일시 영월 점유에 성공했으나 적의 반격으로 영월을 포기하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7일 아침, 상동지역 전경 제8대대 제1중대장 김해수 경감을 대장으로 47명의 결사대를 편성해 영월 재공격을 준비했다. 8일 14시경 결사대가 녹전리의 송현고개를 막 넘어섰을 무렵 예상치 못하게 북한군과 조우하자 선제공격으로 북한군 일진을 격퇴시키고 계속 추격하여 백병전까지 벌였다. 그러나 북한군의 대병력이 아군을 포위하여 공격했다. 이에 대항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전투를 진두지휘하던 김해수 경감이 적의 박격포탄에 장렬하게 전사했다. 이어 석상익 경위가 결사대를 지휘하며 용전했으나 석상익 경위마저 전사하여 결국 전투는 24명 전사, 7명 부상, 적 73명 사살의 기록을 남기고 끝이 났다. 전투가 벌어졌던 영월군 녹전리에는 이 분들을 기리는 현충시설 ‘호국경찰전적비’가 세워져 있으며 매년 추념행사가 열리고 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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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의 독립운동가, 연미당(延薇堂) 선생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이 연미당(延薇堂) 선생을 2018년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보도했다. 선생(1908.7.15.~1981.1.1.)은 1908년 7월에 태어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공립학교인 인성학교(人成學校)를 졸업하고 1927년 7월 청년 독립운동가 엄항섭과 결혼했다. 부친 연병환은 북간도 청년들이 1919년 3월 3일 만세운동을 전개하자 배후에서 이를 지원하다 체포되어 2개월간의 옥고를 치른 후 상하이로 망명했다. 선생은 남편 엄항섭을 내조하면서 자녀들의 교육과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역할을 맡았다. 1927년 11월 상해에서 결성된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에 참여하기 시작한 선생은 상해여자청년동맹에서도 활동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사가 상하이 홍구공원 의거 이후 선생은 가족을 이끌고 상하이를 탈출했다. 선생은 임시정부가 중국 가흥 등지로 이동할 때 자신도 돌보기 힘든 상황에서 가흥에서 폐결핵으로 고생하던 이동휘와 장사 남목청에서 피습당한 김구를 간호하는 등 노(老) 독립운동가들을 병간호했다. 1936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과 재건 한국독립당 당원으로도 활동했고 1940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경에 정착하자 항일과 독립을 위해 여성들을 결집하고자 한국혁명여성창립동맹을 발족하고 애국부인회를 재건했다. 특히, 선생은 중경 방송국에서 일본군 소속 한인 사병들을 광복군으로 전향시키기 위한 반일선전 활동을 전개해 갔다. 해방이후 중국에 있는 한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늦은 1946년 6월 3일 한국으로 환국한 선생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남편이 납북되어 생이별을 해야만 했다. 월북자 가족이라는 오해와 중풍으로 힘겨운 세월을 보냈던 선생은 1981년 1월 1일 순국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연미당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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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은 장군, 국립대전현충원 6월의 현충인물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립대전현충원이 ‘김성은 장군(1924~2007)’을 6월의 현충인물로 선정했다. 김성은 장군은 6.25전쟁 당시 해병대 최초 단독 상륙작전인 통영상륙작전을 성공시킨 인물이다. 김 장군은 경남 창원에서 태어나 1946년 대한민국 해군 참위(현 소위)로 임관하고 1949년 대한민국 해병대사령부 참모장을 거쳐 해병1연대장, 해병학교장과 해병 제1사단장 등을 역임했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8월 당시 중령으로 통영상륙작전을 진두지휘해 성공시켰다. 이 작전은 당초 거제도에서 적을 저지할 계획이었으나 김중령은 현지 정찰을 통해 이를 과감히 변경해 통영으로 진출해 적을 물리치는 전과를 세웠다. 외신도 이 기습적인 상륙작전의 성공에 ‘귀신 잡는 한국 해병’으로 각국에 보도하여 오늘날까지도 대한민국 해병의 살아있는 신화가 되었다. 김 장군은 이외에도 서울탈활작전, 영덕·안동지구 작전, 홍천·가리천·화천지구 전투 등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전쟁이 끝난 후인 1953년 9월 해병학교장에 임명되어 해병교육단장을 겸임하며 정예해병 육성에 주력했으며, 1957년에는 해병 제1사단장에 부임해 오늘 날 해병대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기여했다. 국방부 장관 재임기간 중 한국군 최초로 구축함 도입, 합동참모본부 설치 등 군 전력 향상과 국가방위력 증강에 관심을 기울여 자주국방을 위한 기초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정부는 김성은 장군의 공로를 인정하여 태극무공훈장, 미 은성무공훈장, 미 공로훈장 등 다수의 훈장을 수여했으며,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제1묘역에 안장됐다(자료제공=국립대전현충원).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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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의 6.25전쟁영웅, 임부택 육군 소장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가 임부택 육군 소장을 6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임부택 소장은 제1연대가 창설되는 과정에서 대한민국 국군 최초의 군번 110001번을 부여받았고 1946년에 육군사관학교(국방경비사관학교) 제1기생으로서 소위로 임관했다. 1950년 1월, 제6사단 제7연대장으로 부임한 후 북괴군의 남침 징후를 사전에 인지하고, 춘천 주민과 학도호국단의 지원을 받는 등 민·관·군 협력 하에 방어에 유리한 소양강변과 그 북쪽에 방어진지를 구축하여 사전 전투준비 태세를 확립했다.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 25일 북한군 제2사단이 춘천을 정면공격하자, 7연대는 임부택 연대장의 효과적인 지휘로 병력과 장비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지형의 이점을 이용하여 적의 집요한 공격을 격퇴했다. 북한강과 소양강 북방을 고수하면서, 포병은 화력을 집중해 남진하는 적에게 심한 타격을 입히는 등 강력한 항전으로 막강한 화력의 북한군을 3일 동안 막아냈다. 전쟁초기 3일간 춘천지역에 대한 7연대의 성공적인 방어는 수도권에 집중적으로 투입된 국군 주력부대로 하여금 전열을 재정비하게 하여 한강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갖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또한, 북한군이 6월 25일 개전 당일 춘천을 점령하고 수원으로 진격하여 국군의 증원부대와 한강 이북의 국군을 포위·섬멸하려던 초기 계획을 좌절시켰다. 7연대는 7월 초순, 충북 음성 동락리 전투에서 남진 중인 북한군 15사단 48연대를 매복·기습공격으로 격멸하여, 개전 이래 국군의 가장 통쾌한 승리를 거둠으로써 부대원 전원이 1계급 특진의 영예를 부여받기도 했다. 동락리 전투의 승리로 국군이 진천-음성으로 이어지는 방어선을 형성하여 전열을 재정비할 수 있는 시간적 여건을 마련했다. 1951년 4월 중공군의 2차 춘계 공세 때에는 용문산에서 중공군 3개 사단의 공격을 받았으나, 임부택 대령이 부사단장이던 제6사단은 반격하여 전멸에 가까운 대승을 거뒀다. 6.25전쟁 사상 최대의 전승을 기록했으며, 제5사단 부사단장으로서 1951년 11월 공방전이 치열했던 동부전선의 351고지를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1953년 7월 11사단장 재임시에는 휴전전투라고 일컫는 삼현지구 반격 작전에서 중공군 4개 사단의 공세를 저지하여 현재의 휴전선을 확보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임부택 소장은 6·25전쟁 기간 내내 연대장, 부사단장, 사단장으로서 최전방에서 대한민국을 수호했으며, 적 지휘관이 임부택을 사로잡으라는 특별지시를 내릴 정도로 탁월한 지휘력과 용맹성을 발휘해 생전에 두 차례의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2001년 11월 향년 83세로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자료제공=국가보훈처).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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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의 독립운동가, 이대위 선생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이 2018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이대위(李大爲, 1878.12.28.~1928. 6.17.) 선생을 선정했다고 밝혔다. 이대위 선생은 1878년 평남 강서에서 출생해 평양에서 중등과정을 이수하고 1903년 미국으로 유학길에 올라 1908년 포틀랜드중학교를 졸업한 후 교포들의 도움으로 한인으로서는 최초로 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역사학을 전공했다. 선생은 1911년 샌프란시스코 한인감리교회 제3대 전도사가 되었고, 1912년 목사 안수를 받은 후부터 1928년 별세할 때까지 이 교회 목사로 활동했다. 1913년 미주한인단체인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총회장에 취임하여 브라이언 국무장관에게 전보를 보내 미주한인이 한일 강제병합 이전에 미국으로 이주하였음을 이유로 일본인과 국적을 구분해 줄 것을 요구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1914년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를 법인으로 등록하고 중국을 통해 미국에 입국하는 유학생과 동포들의 보증을 서고 정착을 도와주는 영사관 역할을 수행했다. 1915년 ‘신한민보’ 주필로 활동하며 한글식자기를 발명하여 미주한인사회의 출판문화를 향상시켰고, 1918년 말 대한독립선언서에 안창호, 박용만, 이승만과 함께 미주지역 대표로 서명했다. 1919년 3월 22일자 신한민보를 통해 3․1독립만세운동과 그 이후 국내 상황을 미주 동포들에게 알리고 단결하여 독립운동에 나설 것을 호소했다. 같은 해 7월부터 9월까지 임시정부에서 대미외교업무 수행을 위해 워싱턴에 설치한 구미위원부에서 활동했고, 1928년 6월 17일 샌프란시스코 병원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이대위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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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 애국지사, 국립대전현충원 2018년 5월의 현충인물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립대전현충원은 2018년 5월의 현충인물로 ‘김신 애국지사’를 선정했다. 김신 지사는 1922년 중국 상해임시정부의 주석을 지낸 김구(金九)와 최준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학창시절을 중국 상하이에서 보냈다. 지사는 임시정부의 비밀연락과 임정요인들 간의 주요 연락 및 정보수집 임무를 맡아서 수행했다. 1944년 6월 임정내무부원 및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부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했다. 그 후 중국 공군군관학교에 입교하여 운남성(雲南省)과 인도(印度) 펀잡성 라홀시에서 조종사 훈련을 받고 대일 항공전에 참가하는 등의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김신 지사는 8·15해방 후 아버지 김구와 함께 귀국해 조선국방경비대에서 활동했으며 1948년 국군 창설에 참여했다. 6·25전쟁 중에는 제10전투비행전대장으로 재임하면서 미 공군이 북한군 보급로의 가장 중요한 곳인 대동강 승호리 철교를 500차례 출격하고도 폭파하지 못하던 임무를 1952년 1월, ‘저공침투 비행’이라는 새로운 공격전술을 창안하여 ‘승호리 철교 폭파작전’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김 지사는 제6대 공군참모총장을 지내고 예편한 뒤 대만 대사, 교통부 장관, 제9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한 후 독립기념관 초대 이사장, 백범김구기념관 관장과 기념사업협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대한민국 근현대사 전반에 크게 공헌했다. 정부는 김신 애국지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 무공훈장(충무 · 을지 · 화랑), 청조 근정훈장(근정훈장의 제1등급), 수교훈장, 광화장 등을 수여했다. 2016년 5월 19일 노환으로 별세해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제2묘역 377호에 안장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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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의 6.25 전쟁영웅, 여군창설과 발전의 주역 ‘김현숙 육군 대령’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가 2018년 5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여군창설과 발전의 주역 ‘김현숙 육군 대령’을 선정했다. 김현숙 대령은 1915년 7월 4일 평양에서 출생해 일본 동경체육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평양 강동여자중학교 체육교사로 근무했다. 1949년 예비역 육군 소위로 임관한 김 대령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수많은 어린 남학생들이 군에 입대하는 모습을 보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여자의용군 모집을 건의해 1950년 8월에 여자의용군 모집에 관한 담화를 직접 발표했다. “국민으로서 여자만이 안일하게 국난을 방관하는 태도로 있을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으므로 앞으로 맹렬한 활동을 전개할 것이니 일반의 협조를 바란다. (중략) 남녀를 막론하고 이 시국을 재인식하여 국가총력으로 최후의 평화를 획득할 때까지 싸워야 할 것이다.” (여자의용군 모집 담화문 中) 김 대령은 1950년 9월 육군 제2훈련소 예속으로 여자의용군교육대를 창설하고 초대 교육대장으로 취임해 여자의용군 1, 2기 874명을 양성했다. 여자의용군은 6.25전쟁기간 동안 국군의 일원이 되어 정보 및 첩보수집, 선무활동, 모병업무 등의 현장에서 국가를 구한다는 신념으로 전방위 활약을 펼쳤다. 김현숙은 1953년 3월 한국 여군으로서는 최초로 대령으로 진급했다. 같은 해 9월 여군창설 3주년 기념식에서 최초의 여군기를, 1954년 8월에는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으로부터 공로훈장을 받았으며, 1960년 9월 초대 여군처장으로 전역했다. 여군창설과 발전의 주역 김현숙 대령은 1981년 11월 7일 지병으로 향년 66세에 별세해 동작동 국립현충원 내 국가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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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의 독립운동가, 신건식‧오건해 선생 부부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2018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신건식‧오건해 선생 부부를 선정했다. 신건식 선생(申健植, 1889. 2. 13.~1963. 12. 8)은 충북 청원군에서 출생해 무관학교와 관립한성외국어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1911년 형 신규식을 따라 상하이로 망명한 후 항저우에 있는 의약전문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선생은 1912년 신채호, 신규식 등이 국권회복을 위해 조직한 동제사(同濟社) 활동에 참여하고 1925년 저장성 육군형무소 군의관 및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황포군관학교) 외과주임으로 근무하며 난징에 거주하는 독립운동가와 학생 등의 숙식 경비를 지원했다. 1937년부터 난징에서 광복진선선전부에 소속되어 선전활동에 주력했고 1939년 제31회 의정원회의에서 충청도의원으로 당선되며 임시정부에 본격적으로 참여했다. 1943년 임시정부 재무부 차장과 의정원 분과위원으로 재정, 예산, 결산을 담당하며 재정분야 전문가로 활동했다. 오건해 선생(吳健海, 1894. 2. 29.~1963. 12. 25)은 1926년 경 남편 신건식 선생이 있는 중국으로 건너가 이동녕, 박찬익 등 독립운동가의 뒷바라지에 힘썼다. 1938년에는 ‘남목청사건’으로 총상을 당한 김구 선생을 간호해 소생시켰다. 또한 1940년 한국혁명여성동맹과 1942년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했다. 신건식‧오건해 선생 부부 뿐만 아니라 딸 신순호, 사위 박영준, 형 신규식, 조카 신형호, 사돈 박찬익 등 가족이 모두 독립운동에 나섰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들 부부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77년과 201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과 애족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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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사회공헌자 박영하 박사, 국립대전현충원 4월의 현충인물 ... 을지재단 설립자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립대전현충원이 4월의 현충인물로 국가사회공헌자 박영하 박사를 선정했다. 박영하 박사는 1927년에 태어나 1945년 평양 제3중학교와 1950년 서울대 의대를 졸업했다. 박사는 6.25전쟁에 군의관으로 평양탈환작전에 참전했고 중령으로 예편한 후 서울 을지로에 ‘박영하 산부인과병원’을 개원한 뒤 1967년 병원을 국내 최초로 공익법인으로 전환해 의료의 공익화를 선도적으로 주도했다. 이후 1981년 대전을지병원(현재 을지대병원), 1995년 서울 하계동 을지병원, 2001년 금산을지병원, 2009년 서울 강남을지병원을 차례로 개원해 국내 굴지의 의료원으로 성장시켰다. 박사는 우리나라 의학발전을 위해 의료계 인재양성의 필요를 절감하고 1983년 학교법인 을지학원을 설립하여 서울보건대학(현 을지대 성남캠퍼스)을 인수했으며, 1996년에는 대전 용두동에 을지의과대(현 을지대 대전캠퍼스)를 설립했다. 서울보건대학과 을지의과대학이 2007년 통합하면서 국내 유일의 ‘보건·의료 특성화 종합대학’인 을지대학교로 거듭났다 박영하 박사는 을지로 산부인과 개원 당시 "의사는 한시도 환자를 떠날 수 없다"라며 병원 입원실을 가정집으로 개조해 일요일에도 오후2시까지 환자를 돌봤을 정도로 의사로서의 책임과 소명을 다했다. 또한 1994년 일본에서 홀로 투병 중이던 국민영웅 프로레슬러 김일 선생을 2006년 임종 때까지 병원에서 모셨던 일화는 박사의 나눔과 봉사정신이 잘 나타난다. 정부는 박사에게 우리나라 의학발전과 인재양성의 공로로 1999년 27회 보건의 날 국민훈장 ‘모란장’, 2008년 36회 보건의 날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했으며,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 묘역-29호에 안장하여 고인의 공훈을 기리고 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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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의 6.25전쟁영웅, ‘타흐신 야즈즈’ 터키 육군 준장
국가보훈처가 ‘타흐신 야즈즈’ 터키 육군 준장을 4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 야즈즈 준장은 터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제1차 세계대전, 터키 독립전쟁에 참전했고 6.25전쟁 당시 준장으로서 터키여단을 지휘했다. 터키여단은 1950년 10월 17일 부산항에 도착해 군우리 전투를 비롯하여 평양철수작전, 장승천 전투, 사기막 전투, 네바다 전초전 등 격전을 치뤘다. 야즈즈 준장이 지휘한 터키여단은 유엔군의 대규모 위력수색작전인 썬더볼트작전에서 김량장리와 151고지전투, 수리산 전투를 승리함으로써 유엔군의 전체 작전에 크게 기여했다. 1951년 1월 25일부터 27일까지 3일간 진행된 용인의 김량장리와 151고지 전투에서는 터키군 장병들이 총검에 의한 백병전으로 적을 무찌름으로써 ‘용감한 터키군’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당시 이 백병전 상황은 미국의 통신사 U.P.I 기자에 의해 생생한 모습으로 전 세계로 타전되었으며, 터키 여단은 이 전공으로 대한민국 정부와 미국 정부로부터 부대표창을 받았다. 터키여단은 연이어 1월 31일부터 2월 6일까지 영등포로 통하는 국도와 안산을 거쳐 소사 또는 인천으로 통하는 도로를 통제할 수 있는 중요한 감제고지인 수리산을 점령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는데 이 전투에서 수리산 점령의 최후 목표인 440고지를 총 4차례에 걸쳐 공격하여 2월 6일 마침내 고지 점령에 성공했다. 이 전투로 중공군은 수원 일대에서 물러났으며, 유엔군은 한강선 진출을 위한 결정적인 교두보를 확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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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4월의 호국인물, 최종봉 공군 소령
전쟁기념관이 4월의 호국인물(護國人物)로 최종봉(崔鍾奉) 공군 소령(1926. 11. 20 ~ 1951. 4. 16)을 선정했다. 최종봉 공군 소령(추서 계급)은 1926년 11월 20일 경상북도 청도면 무등동 280에서 5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나 1940년 3월에 청도공립 심상소학교(초등학교), 1943년 10월에 일본 다치아라이(太刀洗) 육군비행학교를 졸업했다. 광복 이후 일본에서 돌아와 1949년 2월 17일 육군항공사령부 조종하사관으로 입대해 1949년 10월 공군 창설 이후 L-4연락기를 조종했다. 1950년 4월 25일 공군 소위로 임관한 최 소령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L-4연락기 조종사로서 정찰, 전단 살포, 지휘관 및 부상병 수송 그리고 30파운드(약 14kg)의 폭탄과 수류탄으로 남하하는 적 지상군을 공격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최 소령은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방어 작전을 수행할 때 총 65회의 정찰임무를 통해 세밀한 적진 상황을 제공해 아군작전에 크게 기여했다. 1951년 3월 31일 최 소령은 이세영, 오춘목, 이강화 대위와 백구부대로 전속되어 여의도기지(K-16)로 이동해 딘 헤스(Dean E. Hess) 중령과 출격하여 평강(平康) 북쪽 신대리 적 후방보급로 공격을 시작으로 4월 10일까지 북한 서부지역의 주요 보급로 차단, 보급품집적소, 차량·군용시설 등의 군사목표물을 파괴했다. 최종봉 소령은 4월 16일 이세영 대위, 메케프(George N. Metcafe) 대위, 길스파이(James J. Gilliespie) 중위와 함께 강원도 이천(伊川)지구 적 후방보급로 차단을 위해 출격 임무를 수행하던 중 적 지상포화에 피탄되어 적진에서 전사했다. 정부는 최종봉 소령의 공훈을 기려 1계급 특진과 함께 을지무공훈장(1951년 7월 1일)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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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의 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윤현진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살림꾼
국가보훈처와 독립기념관이 독립운동가 윤현진을 2018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독립기념관은 윤현진의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를 독립기념관 야외 특별기획전시장(제5․6관 통로)에서 4월 1일부터 30일까지 개최한다. 윤현진은 경남 양산에서 태어나 신학문 교육을 받기 위해 구포 구명학교에 입학했다. 1909년 중국을 둘러보며 여러 독립지사들과 만나 체계적인 근대학문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일본 유학을 결심했다. 1914년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과에 입학하여 조선유학생학우회의 임원으로 활동했고 이후 반제국주의 비밀결사조직인 신아동맹당에 가입해 집회와 연설, 서적 배포와 같은 다양한 형태의 반일운동을 전개했다. 1916년 고국으로 돌아와서 약 3년 동안 대동청년단, 백산무역주식회사, 의춘상행(宜春商行), 기미육영회 등과 관계를 맺고 비밀결사운동, 경제적 자립운동, 교육운동에 앞장섰다.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내무위원으로 선정되어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경상도위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국내의 항일세력과 연락을 위한 의용단을 조직하고, 『독립신문』을 발간하기 위한 독립신문사 발기인 등을 맡았다. 1921년 2월 임시정부의 중책인 재무차장으로 선임되어 임시정부의 살림살이를 책임지게 된다. 1921년 9월 독립운동에 혼신을 다했던 윤현진은 29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윤현진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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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3월의 호국인물(護國人物), 이상득(李相得) 육군 하사
이상득 하사는 1944년 경상북도 포항시 동해면에서 태어나 동해초등학교와 동해중학교를 졸업하고 포항고등학교 2학년을 수료한 후 1965년 6월 육군에 입대했다. 이하사는 제20사단 61연대에 배속되어 근무하다 1966년 5월 베트남전쟁 파병을 지원해 국군 제9사단(백마부대) 소속으로 참전했다. 1966년 제9사단은 베트남의 요충지인 깜란(Cam Ranh)에서 투이호아(Tuy Hoa)에 이르는 1번 국도변에 배치되어 작전을 펼쳤다. 주월한국군사령부는 1967년 3월부터 5월까지 베트남 중부 해안지역의 베트콩 근거지 소탕과 남북으로 이어져 베트남의 대동맥에 해당하는 1번 국도의 개통을 계획하고 남쪽에 주둔한 제9사단과 북쪽 뀌년(Quy Nhon)에 주둔한 수도사단의 작전지역을 확장⦁통합하는 오작교작전을 시행했다. 이상득 하사(당시 병장)는 제9사단 28연대 3대대 11중대 3소대 소속 부분대장으로 오작교작전에 참가했다. 작전 첫날인 1967년 3월 8일 이하사가 소속된 11중대는 다랑(Da Rang) 강변의 가옥을 수색하고 있던 중 가옥 내부에 숨겨진 지하 토굴을 발견한 이 하사가 선두에 서서 토굴 내부로 진입한 순간 적이 수류탄을 투척했다. 이를 발견한 이하사는 자신의 몸으로 수류탄을 덮쳐 동료들의 목숨을 구하고 장렬히 산화했다. 정부는 이상득 하사의 투철한 군인정신과 희생정신을 높이 평가하여 1계급 특진과 함께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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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우 하사·문광욱 일병, 국립대전현충원 3월의 현충인물
국립대전현충원이 3월의 현충인물로 연평도 포격전의 영웅 서정우 하사와 문광욱 일병을 선정했다. 해병대원 서정우 하사와 문광욱 일병은 북한군의 기습 연평도 포격도발에 대응해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여 추가도발을 막아내는 혁혁한 공을 세우고 전사했다. 연평도 포격전은 2010년 11월 23일 연평부대의 K-9자주포 해상사격 훈련도중 북한군이 기습적으로 방사포 170여발을 연평도 민간시설과 군부대에 발사하여 해병 장병 2명 전사 및 16명 부상, 민간인 2명 사망 및 3명 중경상 등의 인명피해와 각종 시설과 가옥 파괴 등의 재산 피해를 입은 사건이다. 서정우 하사는 광주에서 태어나 2009년 2월 해병대에 입대하여 같은 해 4월 25일부터 연평부대 중화기중대에서 81mm 박격포 사수로 복무하던 중 마지막 병장휴가를 받고 귀가하다 포탄이 떨어지는 것을 목격하고 자신의 임무수행을 위해 휴가를 포기, 부대로 자진 복귀 하던 중 적의 2차 폭격에 의해 가슴 부위 파편상을 입고 전사했다. 문광욱 일병은 전북 군산에서 태어나 2010년 8월 해병대에 입대하여 같은 해 11월부터 연평부대 본부중대에 전입하여 포병 사격훈련장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중 연평도 포격도발에 의해 흉부 관통상 등을 입고 현장에서 전사했다. 정부는 서정우 하사와 문광욱 일병의 공로를 기려 2010년 11월 30일 화랑무공훈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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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의 독립운동가, 김원벽 선생
김원벽 선생은 황해도 은율에서 장로교 목사 김태석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1914년 서울로 올라와 경신학교를 졸업하고 숭실전문학교를 거쳐 연희전문학교로 진학했다. 1919년 1월 경성 시내 학생대표 회동에 참석하며 국제 정세와 시국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선생은 1919년 2월 박희도(朴熙道)·이갑성(李甲成) 등과 모임을 가지면서 3·1운동에 참여하게 됐다. 김원벽 선생은 만세운동을 추진할 학생 조직의 필요성을 느껴 각 중등학교 대표를 뽑아 학생들을 결속시켰고, 2월 25일, 학생대표들과 정동교회 이필주(李弼柱) 목사의 사무실에 모여 만세운동의 추진계획을 논의했다. 이때 3월 1일에 중등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진행하고 전문학교 학생대표들은 제2차 만세시위를 준비하기로 결의했다. 2월 28일, 승동교회에 다시 모인 학생대표들은 이갑성에게 받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가졌다. 그리고 전문학교 학생들은 3월 5일 남대문역에서 제2차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1919년 3월 1일, 김원벽과 학생대표들은 오후 2시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 낭독이 있을 것임을 학생들에게 전하고 제2차 만세운동의 계획을 말하면서 3월 1일 시위에 가급적 참가를 자제해달라고 요청했다. 3월 1일, 수천 명의 학생과 일반인이 탑골공원에 모였으나, 민족대표들은 유혈충돌을 우려하여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했다. 이에 김원벽 선생을 비롯한 학생대표는 자체적으로 독립선언을 하고서 남대문과 대한문 양쪽으로 행진하며 만세운동을 시작했다. 급보를 받고 출동한 경찰과 헌병이 탄압을 시작했으나 오후 늦게까지 시위를 계속 진행했다. 3월 4일 김원벽은 학생대표들과 배재고등학교 기숙사에 모여 3월 5일 오전 9시 남대문역(현 서울역)으로 집결하기로 결정하고 5일 오전 9시 김원벽은 인력거를 타고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흔들며 남대문역으로 나아갔다. 김원벽의 만세소리를 듣고 모여든 군중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남대문을 거쳐 대한문, 종로 보신각으로 나아갔다. 선생은 일제 경찰이 행사한 폭력에 쇄골이 부러지는 부상을 입어 일생동안 고통을 받았다. 그후 2년간 옥고를 치르고 잡지 ‘신생활’과 일간지 시대일보 창간에 힘썼으나 일제에 의하여 폐간되는 등 실패로 돌아갔다. 선생은 낙향해 살다 1928년 35세의 나이로 별세했다.정부는 1962년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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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상 국가사회공헌자, 국립대전현충원 2월의 현충인물
국립대전현충원(원장 권율정)이 대한민국 건국 1세대 경제개발의 주역 송인상(1914.03.06∼2015.03.22) 국가사회공헌자를 2월의 현충인물로 선정했다. 송인상 국가사회공헌자는 강원도 회양 출신으로 재무부 이재국장과 한국은행 부총재를 거쳐 1957년 부흥부(전 경제기획원) 장관과 1959년 재무부 장관 등 주요 경제부처의 수장을 지냈다. 특히 재임 중 국가 최초의 장기경제개발계획인 ‘경제개발 3개년 계획’을 수립하는 등 한국경제 근대화에 기여했다. 이후 유럽공동체(EC, European Community) 대사, 초대 한국수출입은행장을 역임했으며 한미협회 회장, 동양나이론 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태평양경제협의회(PBEC) 한국위원장, 국제로타리 이사 등을 거쳤다. 산업발전과 민간외교에 앞장섰던 송인상 국가사회공헌자는 1986년부터는 20여년간 한국능률협회를 이끌며 기업가 정신 함양과 산업인재 육성을 위해 헌신했다. 정부는 송인상 국가사회공헌자의 공훈을 기려 수교훈장 광화장(1991), 국민훈장 무궁화장(2007)을 수여했으며,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묘역 33호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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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의 독립운동가, 김규면 선생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김규면(金圭冕, 1880. 3. 12.~1969. 2. 2.) 선생을 2018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1880년 함경북도 경흥에서 태어난 선생은 시대의 전환기인 20세기 초 대한제국이 운영하는 육군무관학교 속성과에 입학했다. 1904년 일본은 강제로 체결한 한일의정서에 근거하여 육군무관학교를 통제했다. 무관이 되어 조국 부강을 염원했던 선생의 꿈은 일제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 1907년 훈춘(琿春)으로 망명한 선생은 민족종교 단체인 대한성리교(大韓聖理敎)를 만들었다. 조선총독부가 1915년에 포교규칙(布敎規則)을 공포하자, 이에 반발하며 항일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만들었던 것이다. 스스로 무관이 되지는 못했지만, 청년들을 독립전사로 양성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대표적인 것으로 1914년 이동휘와 함께 중국에서 설립한 동림무관학교를 들 수 있다. 독립전쟁을 통해서 독립을 달성하려는 선생의 노력은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 결성으로 이어졌다. 3·1운동에 호응하여 결성된 대한신민단에서 단장으로 활동했으며, 여기서 보여준 그의 헌신은 1920년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다. 1924년 윤자영과 함께 상해에서 조직한 상해청년동맹(上海靑年同盟)을 통해서 중국 학생계와 연대를 구축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피습을 당하여 부상을 입게 되었다. 중국에서 독립운동 활동 전개에 한계를 절감한 선생은 연해주로 갔다. 1933년 빨찌산위원회에서 항일운동을 하였지만, 소비에트 연해주위원회의 탄압대상이 되었다. 모스크바로 피신한 후 더 이상의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가 없었다. 선생은 러시아에서 해방을 맞이하고 귀국을 하지 못한 채 1969년 88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2년 김규면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자료제공 :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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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의 6.25전쟁영웅, ‘마리누스 덴 오우덴’ 네덜란드 육군 중령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가 2월의 6.25전쟁영웅에 ‘마리누스 덴 오우덴’ 네덜란드 육군 중령을 선정했다. 마리누스 덴 오우덴 중령은 네덜란드 왕립 육군사관학교 졸업 후 1932년 7월 31일 네덜란드 왕립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수많은 전투를 치른 후, 1950년 6월 한국전에 참전하기 위해 조직된 유엔군의 네덜란드 대대에 자원했다. 1950년 10월 21일 오우덴 중령은 당시 소령으로 네덜란드 대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1950년 10월 26일 한국으로 출발, 1950년 11월 23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1척의 구축함과 함께 총 5,322명 파병) 오우덴 중령과 그의 대대는 전선의 급박한 상황으로 인하여 부산에 도착한지 1주일 만에 전선으로 파견되었으며, 12월 중순의 혹한 속에서 미2사단(인디언헤드 사단) 38연대에 배속되어 전선 후방으로 공격하는 북한군과 중공군을 방어하는 작전을 수행했다. 오우덴 중령의 대대는 1951년 2월 5일 북한군과 중공군을 북쪽으로 밀어내기 위한 ‘라운드업 작전’에 참여했다. 2월 11일 북한군과 중공군은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하였으며, 홍천-횡성간 도로에서 벌어진 혹한과 어둠속에서 밀고 밀리는 전투 끝에 오우덴 중령의 부대는 큰 피해를 입으며 후퇴하는 국군을 엄호했다. 이 전투에서 오우덴 중령을 포함하여 15명이 전사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공세를 저지하고 유엔군은 반격의 기회를 갖게 됨으로써 이후 전쟁의 양상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오우덴 중령이 참전한 주요전투는 인제 전투, 대우산 전투, 평강-별고지 전투, 횡성전투 등이다. [자료제공 :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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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창공의 아버지, 계원 노백린 장군
계원 노백린 장군(1875. 1. 10.~1926. 1. 22.)은 황해도 송화에서 태어나 한문을 배우다가 1895년에 관비(官費)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으로 유학했다. 1899년에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1900년에 귀국하여 육군 참위로 임관되고 한국무관학교 교관이 되어 후진 양성에 전념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1907년 군대가 해산되자 안창호, 이갑, 이동녕, 신채호 등과 신민회를 조직하고 만주에 독립운동 전초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으며, 고향인 송화에 민립학교 광무학당을 설립하는 등 구국교육운동을 전개했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이 침탈되자 미국으로 망명하여 박용만 등과 하와이 오아후 가할루지방에서 국민군단(國民軍團)을 창설하여 김성옥, 허용과 함께 별동대 주임으로서 300여 명의 독립군을 양성하는 등 구국운동에 전념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군무부 총장으로 임명되어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선발되기도 하였으며, 그 후 제2대 군무총장으로 선임되어 미국에 머물면서 1920년 2월 20일 캘리포니아주 윌로우스에서 교포인 김종림(金宗林)의 적극적인 재정 지원으로 비행사양성소를 설립하여 1923년까지 77명의 졸업생을 배출시켰다. 1922년 6월 임시정부 이승만 대통령의 지명으로 국무총리 서리에, 1923년 1월에 정식 국무총리로 추대되었다. 1925년 3월에는 박은식 대통령의 지명으로 국무총리에 임명되었고 교통과 군무총장직을 겸직하면서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노심초사하던 장군은 상해에서 병을 얻어 1926년 1월 22일 순국했다. 정부는 장군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