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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전현충원 2020년 11월의 현충인물, 김일곤 선생
【중앙보훈방송=김하늘 기자】 국립대전현충원이 2020년 11월의 현충인물로 ‘김일곤 선생’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국립대전현충원에 따르면, 순국선열 김일곤 선생은 1912년 3월 전남 담양에서 태어나 의열단에서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졸업하고, 중일전쟁 당시 조선의용대에 입대해 대일항쟁에 앞장선 독립운동가다. 김일곤 선생은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비밀연락원으로 활동하다 일경에 붙잡혀 수감되었다. 혹독한 고문에도 비밀을 한마디도 누설하지 않았던 선생은 17세의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반년 남짓 수감되었다가 출감했다. 1933년 여름 중국으로 망명한 김일곤 선생은 의열단에서 설치하였던 조선혁명간부학교에 입학해 군사적 지식과 군사기술을 배우고 1934년에 졸업한 후 중국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의 군관대에서 의열단 제2기생으로 훈련을 받았다. 1936년 7월 민족혁명당에서 학생 특별반을 설치하고 당원들 훈련을 실시할 때 간부로 활동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선생은 중국에서 조직된 조선의용대에 입대해 분대장과 정치간사가 되어 대일항쟁에 앞장섰고, 1942년 9월부터는 진서북 지역 책임자로 일본군과 항전을 벌였다. 선생은 중국 후베이성(호북성) 숭양지구에서 일본군의 탱크 2대를 파괴한 것을 비롯해 전투 중에 적의 기관총을 탈취하고, 일본군의 완전 포위 속에서도 탈출하는 등 맹렬한 활동을 폈다. 그러다 김일곤 선생은 1943년 초 진서북의 새로운 전투지역에서 수십 배가 넘는 일본군과 교전하다 태항산(太行山) 지구에서 전사 순국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순국선열 김일곤 선생에게 독립을 향한 위대한 업적으로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고, 1996년 이국땅 중국에서 순국한 선생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해 김포공항에서 유해 봉영식을 갖고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하여 그 공로를 기리고 있다. 김하늘 기자 hn90071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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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의 독립운동가, 유도발·유신영 선생 부자(父子)···일제의 식민지배에 맞서 대를 이어 자결로 항일정신 일깨워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공동으로 일제의 식민지배에 맞서 대를 이어 자결로 항일정신을 일깨운 ‘유도발·유신영 선생’ 부자를 2020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처(처장 박삼득)에 따르면 유도발(1832.6.~1910.10.음력)·유신영(1853.6.~1919.3.) 선생 부자는 풍산이 본관인 서애 유성룡의 10세, 11세 후손이다. 두 부자는 충효를 가업으로 삼아 경술국치와 광무황제 고종의 서거를 당해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아버지는 나라에 대해 의리를 실천했고 아들은 나라와 아버지에 대해 충효를 실천했다. 두 분의 자결은 일제의 식민지배에 맞선 항일투쟁의 일환으로, 그 죽음은 개인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남은 이들의 항일정신을 일깨워 독립운동에 나서게 만드는 울림이 됐다. 먼저, 부친 유도발 선생은 1910년 8월 29일 일제에 의해 강제병합이 체결되자, 일제의 지배에 놓인 세상을 차마 살아갈 수 없다며 1910년 11월 11일 단식에 돌입했다. “종사가 망해 장차 남의 나라의 백성이 되겠으니 남은 해가 얼마 없는데 구차하게 살기를 도모하는 것은 욕된 일이 아닌가? 이후로는 다시 음식을 나에게 권하지 말라”는 유서와 함께 명정(銘旌)에 ‘대한처사(大韓處士)’로 써 줄 것을 부탁했다. 명정은 죽은 사람의 관직이나 이름을 적은 기(旗)로, 선생이 대한처사로 써 달라고 한 것은 죽어도 영원히 대한제국의 선비임을 천명한 것이다. 1910년 11월 27일 단식 17일째, 선생은 향탕으로 자신의 몸을 깨끗이 씻고 죽음을 맞이했다. 그 죽음은 일제의 강제병합에 대한 강력한 항거로, 사람들에게 항일정신을 일깨웠다. 아들 유신영 선생은 선대의 가업을 철저히 익히고 항일 인사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면서 학문과 사상을 넓혀나갔다. 1895년 유인석 의진과 1896년 권세연 의진에 참여하여 적극적인 의병활동을 전개했으며, 이는 선생의 문집 『하은유고(霞隱遺稿)』의 「행장」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919년 1월 광무황제(고종)가 서거하자 친일파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나는 나이가 많아 일할 수 있는 힘이 없다. 마땅히 목숨을 바쳐 나라의 원수를 갚겠다.”라고 하면서, 선생이 할 수 있는 투쟁 방법은 죽음 뿐이라며, 1919년 3월 3일 독약을 마시고 자결했다. 그의 죽음은 대를 이어 일제에 투쟁한 것으로, 남은 이들에게 맞서 싸울 것을 촉구하는 항일투쟁의 울림이 됐다. 정부는 두 분 공훈을 기리기 위해 유도발 선생에게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유신영 선생에게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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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의 6·25 전쟁영웅, 로버트 리 티몬스 미국 육군 대위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 이하 보훈처)는 6·25전쟁 당시 낙동강 방어 전선을 확보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로버트 리 티몬스(Robert Lee Timmons, 1919.5.14.~1950.8.23.) 미국 육군 대위를 2020년 11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처에 따르면 로버트 티몬스 대위가 서북산 전투에서 적과 전투 중 전사했고, 아들인 주한 미 제8군 사령관과 손자인 미 육군 대위까지 3대(代)에 걸쳐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헌신했다. 서북산 전투는 경상남도 함안에 위치하며, 6·25전쟁 당시 전라남도를 우회하여 진주를 거쳐 마산으로 향하던 적 6사단을 막기 위해 미군 제25사단과 국군이 고지를 사수했다. 치열한 전투로 인해 19차례나 고지가 바뀌었고, 결국 미군 제25사단 제5연대가 승리함으로써 대구방면에서 적의 압력을 분산시켜 낙동강 방어전선을 확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로버트 티몬스 대위는 하와이에 주둔하던 미군 25사단 5연대 1대대 중대장으로써 활동하다가, 하와이 주둔 부대로는 처음으로 한국에 파병됐다. 6·25전쟁 당시 로버트 티몬스 대위는 격전지였던 서북산 전투에서 중대장으로서 중대원 100여명과 함께 고지를 고수하던 중 적의 습격을 받고 부상을 당했고, 후송 중 북한군 기관총 공격을 받고 장렬히 전사했다. 로버트 티몬스 대위의 시신은 1년 뒤에 발견되어 미 워싱턴의 알링턴국립묘지에 안장됐다. 로버트 티몬스 대위가 전투에서 전사할 당시 미국에 7살 아들이 있었고, 그의 아들인 리처드 티몬스는 아버지의 전사로 군인의 길을 택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리처드 티몬스는 1995년부터 97년까지 주한 미 제8군사령관(중장)으로 한국에 부임하여 대한민국을 수호하며 아버지가 전사한 장소를 찾았다. 그리고 이곳 서북산에 육군 39사단은 1995년 12월에 로버트 티몬스 대위를 기리는 추모비를 세웠다. 그리고 로버트 티몬스의 손자(리처드 티몬스의 아들)도 미 육군 대위로 한국 근무를 자원했고, 1996년부터 97년까지 1년간 판문점 인근 미 2사단 최전방 초소에서 근무하며, 대한민국의 방위를 담당하는 인연을 맺게 됐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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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2020년 10월 호국인물, 김재호 육군 이등중사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은 10월의 호국인물로 ‘김재호 육군 이등중사’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전쟁기념관에 따르면 故 김재호 이등중사는 1926년 1월 5일 전라남도 광양군 진상면에서 태어났다. 1952년 2월 육군에 입대한 그는 신병훈련을 마치고 수도 사단 제26연대 제3중대의 소총수로 배속되어 고지전이 한창이던 강원도 화천의 수도고지에 배치되었다. 수도고지 전투는 1952년 중부전선의 금성돌출부에서 국군 수도사단과 중공군이 군사분계선 설정에 대한 휴선협상의 주도권 장악을 목적으로 전개한 고지 쟁탈전이었다. 두 달 동안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수도고지를 확보하지 못한 중공군은 10월 6일, 수도 사단 전방의 고지들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했다. 10월 6일 저녁, 김재호 일병(당시)이 속한 제26연대 제3중대는 중공군의 포격에 이어 2개 중대규모의 집중적인 공격을 맞았다. 포격에 의해 인접 전우들이 모두 전사하고 홀로 살아남은 김 일병은 진지 앞 20여 미터까지 도달한 적군을 맞아 백병전으로 이들을 격퇴했다. 잠시 뒤 새로운 적 부대가 접근하자 김 일병은 수류탄과 소총으로 이들을 다시 한 번 단신으로 격퇴한 뒤 소총 2정과 기관단총 1정을 노획하여 복귀하였다. 김 일병의 전공을 비롯한 수도사단의 감투정신으로 지난 4개월 간 계속된 수도고지 전투는 국군의 승리로 일단락 될 수 있었다. 정부는 그의 전공을 기려 1953년 1월 13일 을지무공훈장을 수여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정전협정 체결 12일 전인 1953년 7월 15일 금성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전사 후 이등중사로 2계급 추서 특진되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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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전현충원 2020년 10월의 현충인물, 강천구 국가유공자
【중앙보훈방송=김하늘 기자】 국립대전현충원이 2020년 10월의 현충인물로 ‘강천구 국가유공자’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국립대전현충원에 따르면, 강천구(1968~2011) 경위는 1968년 4월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1998년 경남지방경찰청 순경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시민의 곁에서 국가와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임무를 맡은 그는 중요 범인 검거 및 근무실적 우수 공적으로 경남지방경찰청장 표창을 수상하는 등 확고한 국가관과 투철한 사명감을 가진 경찰관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이 맡은 일에는 책임을 다하는 성실한 경찰관이기도 했다. 경찰관 직무집행법에서 ‘경찰의 존재 이유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고, 사회공공의 질서 유지에 있다.’라고 했다. 경찰관은 국민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범죄 예방부터 수사, 교통, 경비, 대테러 등 다양한 현장의 최일선에서 근무하다 보니 늘 위험에 노출된다. 2011년 2월 마산동부경찰서 산호파출소에서 근무를 시작한 강천구 경위는 2011년 3월 16일 새벽 1시부터 순찰 근무 중이었다. 2시 20분경 관할구역 소재 주점에서 신고가 접수되어, 현장으로 출동한 그는 술값 사기 혐의 현행범을 격렬한 몸싸움 끝에 파출소로 연행해 사건 처리를 진행했다. 현행범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강력하게 항의하는 피의자를 제지하며 자신의 몸은 돌보지 않았던 강천구 경위는 사건 처리 도중 얼굴색이 창백해지고 가슴 통증을 호소하다 쓰러져 병원으로 긴급 후송하였으나 안타깝게도 후송 도중 순직해 사랑하는 가족은 그를 떠나보내야만 했다. 정부는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국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한 강천구 경위에게 1계급 특진을 추서하였고, 국립대전현충원 경찰관 묘역에 안장하여 그 숭고하고 아름다운 희생과 공로를 기리고 있다. 김하늘 기자 hn90071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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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의 6·25 전쟁영웅, 박양규 순경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 이하 보훈처)는 6·25전쟁 당시 죽음을 무릅쓰고 시민의 안전을 사수한 ‘박양규 순경’을 ’2020년 10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29일 보훈처에 따르면 1924년 2월 15일에 태어난 박양규 순경은 전라남도 나주경찰서에서 순경으로 근무 중 6‧25전쟁이 발발하자 나주지역 방어를 위한 위수대로 활동했다. 박양규 순경은 1950년 9월 10일 나주시 교동에 있는 나주중학교에서 적을 탐지하기 위해 매복 근무 중 혈혈단신으로 적과 교전하여 적 7명을 사살하고 5명에게 중상을 입힌 뒤 장렬하게 전사했다. 보훈처에서는 박양규 순경의 호국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지난 2016년 4월에 나주시 죽림길 20 나주역사공원 내에 위치한 ‘박양규 공 충혼비’를 현충시설로 지정했다. 한편, 전라남도 나주경찰서에서도 고인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을 계승하기 위해 충혼비 앞에서 매년 10월 21일 ‘경찰의 날’을 계기로 참배를 진행하고 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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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의 독립운동가, 박영희 선생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공동으로 ‘박영희 선생’을 ’2020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29일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 이하 보훈처)에 따르면 박영희(1896.12~1930) 선생은 신흥무관학교 교관, 북로군정서 학도단장 등을 역임하면서 독립전쟁의 영웅들을 배출했으며, 김좌진 장군의 부관으로 청산리전투에 참여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끈 숨은 주역으로 민족의 교관·군사 전략가이다. 선생은 충청남도 부여군 출신으로 1913년 휘문의숙에서 신학문을 배우던 중 은사인 이세영을 따라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에 입교하여 군사 지식을 배웠으며, 졸업과 동시에 교관으로 임명되어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1920년에는 북로군정서의 사관연성소 학도단장과 김좌진 장군의 부관으로 일하면서 독립전쟁의 영웅들을 배출하는 한편 청산리 전투에 참전했다. 한편, 북로군정서는 사관연성소 출신으로 이루어진 만주 독립군 부대 가운데 가장 훈련이 잘된 정예부대로,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만주 길림성 화룡현 청산리 지역에서 일제와 벌인 전투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뒀다. 또한, 청산리전투는 일본군의 간도 침입 작전을 완전히 차단해 만주지방에서 독립운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했으며, 이를 통하여 국내 독립운동도 우회적으로 지켜주면서 조국의 독립에 대한 확신과 독립정신을 고양시켰다. 선생은 청산리 전투 이후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러시아 연해주로 이동하였으나, 자유시참변 이후 다시 만주로 돌아와 1922년에는 북로군정서 부사령관으로 활동했다. 1923년 9월에 중국 상하이에서 창간된 국한본문 잡지 「배달공론」에 〈군사학 강의〉를 두 차례 기고하는 등 군사지식을 보급하는 일에도 힘썼다. 이후 신민부에서 보안사령관을 맡아 총사령관인 김좌진 장군을 최측근에서 보좌했으며, 성동사관학교 교관으로 신민부의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여 항일 투쟁을 전개했다. 1926년 김좌진 장군의 밀명으로 항일운동의 군자금을 협조받기 위해 블라디보스톡에 파견되어 활동 중 1927년 러시아 첩보기관에 체포됐으며, 1930년 연해주 고루지게에서 순국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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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출신 2020년 9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최태유’님
【중앙보훈방송=오천지창조 기자】 제주특별자치도보훈청이 제주 출신 2020년 9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최태유’님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청에 따르면, 최태유(1874~미상)님은 1918년 제주에서 법정사(法井寺) 무력항일시위에 선봉집사(先鋒執事)로 참여하여 일본인 관리를 축출하고 주재소를 공격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18년 음력 3월경 법정사의 승려 김연일은 방동화·강민수·장임호 등과 제주 내 일본인 관리와 경찰을 추방하기로 결의했다. 이어 9월 14일경 모여 10월 7일 시위를 일으켜 제주 읍내로 들어가 각지의 일본인 관리를 쫓아내고, 불교도와 법정사 부근의 농민 등을 규합하기로 결정하였다. 최태유는 1918년 9월 14일 이후 같은 달 말까지 법정사에 머무는 동안, 강창규·김삼만·김봉화·양남구·강봉환 등과 함께 김연일의 계획에 참여하기로 하고, 각 리(里)에 배포할 격문을 준비했다. 이어 제주도 좌면(左面) 영남리(瀛南里)로 들어가 서호리(西好里)·호근리(好近里)에서 공포를 발사하며 준비한 격문을 배포하였다. 선봉대장 강창규 등은 좌면 중문리(中文里) 경찰관주재소를 공격하기로 하고, 강정리(江汀里)·도순리(道順里)·하원리(河原里)에서 수백 명의 참가자를 모집하여 중문리로 집결했다. 이때 최태유는 선봉집사로서 강창규를 도와 시위대를 지휘하다 체포되었다. 1919년 2월 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이른바 소요(騷擾), 보안법(保安法) 위반 및 방화죄로 징역 4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4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오천지창조 기자 oh-5004-o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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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2020년 9월 호국인물, 임병래 해군중위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이 2020년 9월 호국인물로 ‘임병래 해군중위’를 선정했다고 밝혔다. 전쟁기념관에 따르면 고(故) 임병래 해군 중위는 1922년 평안남도 용강군에서 태어나, 1950년 4월 20일 사관후보생 9기로 임관했다. 6·25전쟁이 발발하고 연합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준비하자 8월 13일 해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첩보수집부대를 편성했다. 해군첩보부대는 임병래 중위 등 정보장교가 포함된 17명으로 구성되어, 8월 17일 부산에서 출발했다. 이어 8월 22일 인천 앞바다의 영흥도에 상륙한 첩보부대는 3개 조로 나누어 활동을 개시했다. 임병래 중위는 인천으로 잠입하여 밤낮으로 영흥도와 인천을 오가며 첩보활동을 지휘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그는 인천에 남아있던 공작원들과 접선하여 서울 지역까지 첩보 영역을 확대했다. 같은 해 9월 1일, 맥아더사령부 정보부에서 파견한 클라크 해군대위의 첩보대가 영흥도에 도착하자, 해군첩보부대는 그동안 수집한 정보를 미군 정보부로 전달했다. 그들이 보낸 정보는 인천의 적 병력·보급관계·기뢰부설 현황·상륙지점의 지형과 암벽의높이 등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어 인천상륙작전 하루 전인 9월 14일, 해군첩보대원들은 안타깝게도 북한군에게 포위됐다. 임병래 중위는 홍시욱 이등병조와 함께 나머지 첩보대원들을 탈출시키고자 끝까지 맞서 싸우다, 작전의 기밀 유지를 위해 최후의 순간 권총으로 자결하였다. 실제 이 사건을 모티브로 2016년 「인천상륙작전」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고(故) 임병래 해군중위와 해군첩보대원들은 영흥도 일대에서 상륙에 필요한 핵심 첩보를 수집해 해군본부와 미 극동사령부에 전달하여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크게 기여하였다. 정부는 이러한 그의 공적을 기려 1954년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하였으며, 2013년에는 해군의 유도탄 고속함 10번함을 임병래함으로 제정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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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전현충원 2020년 9월의 현충인물, 이청호 경사
【중앙보훈방송=김하늘 기자】 국립대전현충원이 2020년 9월의 현충인물로 ‘이청호 경사’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국립대전현충원에 따르면, 이청호 경사는 1971년 4월 경북 영덕에서 태어났다. 그는 1996년 특전사 예비역 중사로 전역 후 1998년 해양경찰관으로 임용되어 특수구조단, 특수기동대, 경비함정 등 최일선에서 근무하며 국가수호와 국민의 생명보호 업무에 앞장섰다. 2011년 겨울, 우리 바다에서는 외국 어선들의 불법조업이 계속되었다. 인천해양경찰서 3005함 구조업무 및 불법조업선 검색팀장으로 업무를 수행하던 이청호 경사는 2011년 12월 12일 새벽, 인천시 옹진군 소청도 남서방 87km 해상에서 불법조업 중이던 중국 어선을 발견하고 단속에 나섰다. 나포조의 선봉으로 제일 먼저 승선한 그는 30여 분의 진압작전 끝에 흉기로 저항하는 중국 선원 8명을 제압하고, 조타실로 진입해 선장을 제압하고자 했다. 그 순간 해경의 작전을 방해하고자 다른 어선이 배를 들이받았고 이청호 경사는 그 충격의 틈을 탄 중국인 선장이 입힌 부상으로 병원에 긴급 후송되었으나 안타깝게도 순직하여 사랑하는 가족 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청호 경사가 경찰을 천직으로 생각하였음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불법조업 어선 단속과 돌변하는 해상 기상상황 등 위험한 직무에서도 가장 먼저 출동하던 그에게 “거친 바다가 무섭지 않냐”라고 묻자, 그는 “대원들이 나를 믿고 따라온다”라는 대답을 했다. 이를 통해 그의 기개를 알 수 있다. 정부는 대한민국을 위한 고귀한 희생과 공로로 이청호 경사에게 1계급 특진과 옥조근정훈장을 추서하였고, 국립대전현충원 경찰관 묘역에 안장하여 예우를 다하고 있으며, 2015년 12월 건조된 해경 최대급 함정인 삼봉급 2번 함을 이청호함(5002함)으로 명명하여 고인의 애국심을 기리고 있다. 김하늘 기자 hn90071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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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의 독립운동가, 채원개 선생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공동으로 ‘채원개 선생’을 2020년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31일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에 따르면 채원개(1895.3.24~1974.2.16) 선생은 청년시절 3․1운동을 시작으로 독립군과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을 거쳐 광복군에 이르기까지 무장투쟁의 긴 여정을 통해 조국의 독립에 헌신했다. 무장으로서 강인한 기개를, 때로는 중재자로서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실천하였으며, 광복 이후에도 군에 투신하여 대한민국의 기초를 닦은 독립운동가이자 군인이었다. 선생은 평안남도 영원 출신으로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개신교 계열의 의명소학교를 졸업하고, 21세에 조선보병대에 입대하여 평생 걷게 되는 군인의 삶을 시작했다. 이후 고향에서 3·1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되었으나 탈옥하여 북만주로 이동하는 중에 유하현 삼원포에서 대한독립단 총단장인 조맹선을 만나 그의 부탁으로 대한독립단 군사교관으로 활동했다. 1920년 일본이 독립군 세력을 대대적으로 토벌하자 대한독립단 통임관구 지대장으로 열세인 병력과 물자로 일본군과 격돌하여 관통상을 입은 끝에 철수했다. 1921년 통의부 대표로 김창환·심용준 등과 함께 상해로 파견되어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였고, 이후 상해에서 임시정부 활동에 참여했다. 1923년 3월 한국노병회 특별회원에 선임되었고, 심용준과 함께 분열되는 임시정부의 단합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6월에는 낙양군관학교에서 기병과에 입학하여 체계적인 군사학을 배웠으며, 중국 군벌의 내전에도 참여하여 본격적인 실전 경험을 쌓았다. 1925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육군 주만 참의부 군무부장에 임명되어 정의부와 참의부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만주로 건너가 직접 지도자들을 만나 갈등을 봉합하고 성공적으로 중재했다. 1927년 황포군관학교 교관으로서 제대로 된 군사양성 기관이 없이 무장투쟁하던 조선인들에게 체계적인 군사교육을 실시했다. 1934년에는 광동 주재 중국군에 복무하면서도 한국독립당 광동지부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도 지속적으로 참여했다. 이후 광주에서 중국군으로 재직시 동산백원을 임시정부의 임시청사로 제공하고 아세아 여관을 임시정부 요인 및 가족들의 숙소로 이용하는 데 기여하는 등 임시정부를 측면으로 지원하였다. 1940년 광복군에 합류하여 참모처장, 1943년 총무처장등을 역임하며 후방에서 지원하는 역할을 하였으나 1944년에는 광복군 제1지대장에 부임하여 전면에 나서 광복군을 지휘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광복군 제1지대를 이끌고 광복군으로 귀국하려 했으나, 미군정이 광복군의 입국을 거절하고 개인 자격으로 입국만을 허락하여 부대를 해체하여 부하들을 먼저 귀국 시킨 뒤 1946년 상하이에서 선편으로 귀국했다. 귀국 후 육군사관학교에서 훈련을 마친 뒤 제3연대 작전참모로 부임한 이후 제3여단장, 제2사단장을 역임했고 1949년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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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의 6‧25전쟁영웅, 에드워드 알몬드(Edward Mallory Almond) 미국 육군 중장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는 ‘에드워드 알몬드(Edward Mallory Almond) 미국 육군 중장’을 2020년 9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31일 보훈처에 따르면 알몬드 중장(1892.12.12.~1979.6.11.)은 미국 버지니아주 루레이에서 태어나, 버지니아 군사학교를 1915년에 졸업했다. 이듬해 육군 보병 장교로 임관 후 제1·2차 세계대전에 모두 참전하였고, 종전 후에는 맥아더 총사령부의 인사참모부장 및 참모장을 역임했다. 6·25전쟁 당시에는 미(美) 제10군단장으로 인천상륙작전과 원산상륙작전에서 상륙군을 지휘하여 압록강과 두만강 인근까지 진격했다. 하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악화되자 흥남에서 철수작전을 계획했다. 흥남철수작전 시 병력 및 군수물자를 수송하기로 계획되었으나, 알몬드 중장은 현봉학 박사, 포니 대령 등의 의견을 받아들여 위험을 무릅쓰고 10만여 명의 피란민들을 이남 지역으로 수송하기로 결정했다. 한편, 흥남철수작전은 1950년 12월 14일부터 12월 24일까지 국군 1군단과 미군 10군단 장병 10만 5천여 명, 피란민 10만여 명을 안전하게 이남 지역으로 철수시킨 인도주의 작전이었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국군 1군단과 미군 10군단은 전투력을 보존하고 1951년 1월부터 시행한 유엔군의 재반격 작전에 참여할 수 있었다. 또한, 경상남도 거제시는 2005년 5월 거제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 흥남철수작전 기념비를 세워 인류애의 기적이었던 이 작전을 기념하고 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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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전현충원 2020년 8월의 현충인물, 김옥련·부춘화 애국지사
【중앙보훈방송=김하늘 기자】 국립대전현충원이 2020년 8월의 현충인물로 ‘김옥련·부춘화 애국지사’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국립대전현충원에 따르면, ‘김옥련·부춘화 애국지사’는 1930년대 일제의 강력한 민족말살정책에도 불구하고 불꽃처럼 타올랐던 우리나라 최대의 어민운동이자 여성운동이며, 제주 3대 항일운동 중 하나인 '제주 해녀 항일운동'을 이끈 주역이다. 김옥련 애국지사는 1932년 1월 해녀 1천여 명이 참가한 제주해녀항일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다. 선생은 1907년 제주 구좌 하도리에서 가난한 집안 막내딸로 태어나 어려운 형편 탓에 낮에는 물질을 하고 밤에는 야학에서 노동독본·산술·글쓰기 등을 배우며, 일제의 부당한 착취와 억압에 저항하는 항일 의식을 키웠다. 김옥련 애국지사는 일제의 착취를 저지하고 해녀들을 단결시키기 위한 항일단체인 ‘소녀회’의 회장직을 맡아 활동했다. 부춘화 애국지사는 1932년 1월 해녀 1천여 명이 참가한 제주해녀항일운동을 이끈 독립운동가다. 선생은 1908년 제주 구좌 하도리에서 빈곤한 집 장녀로 태어나 15살 때부터 생계를 위해 물질을 하고, 밤에는 야학을 하며 역사적·시대적 상황과 민족의식에 눈을 떴다. 부춘화 애국지사는 일제의 착취를 저지하기 위해 해녀들을 단결시키는 항일운동을 펼쳤으며, 항일단체인 부녀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1928년 제주 해녀조합 산하 구좌 해녀조합의 대표로 활동했다. 1930년대 접어들면서 일제는 정치적 주권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침탈에 총력을 기울였다. 해녀들의 권익을 보장해 주어야 할 제주도 해녀조합이 철저히 어용화되었고, 그 횡포가 극에 달했다. 1931년 여름 참다못한 구좌 하도리 해녀들의 거센 저항이 도화선이 되어 대규모 항일투쟁인 제주 해녀 항일운동이 분연히 일어섰다. 1932년 1월 7일 세화 장날을 이용해 김옥련·부춘화 선생 등이 주축이 되어 해녀조합의 부당한 침탈 행위를 규탄하는 항일운동이 열렸고, 12일에는 1천여 명의 해녀들이 다구치 제주도사 일행을 향해 호미와 빗창을 들고 “우리들의 요구에 칼로써 대응하면 우리는 죽음으로써 대응한다”라고 외치며 용감하게 일제와 맞서 싸웠다. 해녀들의 권익을 위해 일본 관리와의 담판 요구 조건을 관철시킨 두 분의 애국지사는 이 사건으로 시작된 일경의 대대적인 민족운동가의 검거를 저지하려다 체포되어 수개월간 혹독한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일제의 식민지 수탈 정책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였던 두 분의 공훈을 기려 김옥련 독립유공자에게 2003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고, 부춘화 독립유공자에게는 2003년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김옥련·부춘화 독립유공자는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잠들어 계신다. 김하늘 기자 hn90071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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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의 6·25 전쟁영웅, 지리산함(PC-704함) 57용사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는 ‘지리산함(PC-704함) 57용사’를 2020년 8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31일 보훈처에 따르면 지리산함(PC-704함)은 6·25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우리 해군이 국민 성금으로 도입한 최초의 전투함 4척 중 하나로, 1950년 7월에 배치된 직후부터 전선에 투입되었고 1950년 8월 덕적도·영흥도를 탈환하여 인천상륙작전의 관문을 열었으며 1951년 1월 황해도 월사리에서 피난민과 유격대원을 구조하는 등 수많은 작전에서 전공을 세웠다. 지리산함 57용사는 “동해경비작전(작전명:28작전)에 임하라!”라는 해군본부 작전명령 제430호에 따라 1951년 12월 24일 10시 부산을 출항하여 25일 원산해역에서 삼각산함(PC-703함)과 교대하고 해상경비작전에 투입됐다. 당시 원산해역은 갈마반도, 호도반도 등 육지에 북한 해안포가 설치되어 있었고, 여도 등 도서지역은 아군이 정보수집 전초기지로 확보하고 있던 군사적 요충지로 매우 위험한 곳이었다. 지리산함 57용사는 북한군이 원산 성남리 동북방에 기뢰· 지뢰 등을 은폐하여 두고 야간에 트럭을 이용하여 원산항 부근으로 운반하고 있다는 정보에 따라 거센 파도에도 불구하고 적의 기뢰부설 저지를 위해 야간경비작전을 강행하던 중, 12월 26일 새벽 적의 기뢰에 접촉되어 함정 침몰과 함께 이태영 함장 등 승조원 57명 모두가 장렬히 전사했다. 한편, 해군 제1함대사령부는 57용사의 숭고한 희생과 넋을 기리는 추모 행사를 매년 12월 26일 지리산함 전사자 충혼탑(강원도 강릉시 통일공원 소재)에서 개최하고 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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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의 독립운동가, 이석영 선생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공동으로 이석영 선생을 ’2020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31일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에 따르면 이석영(1855~1934) 선생은 1855년 서울에서 출생했으며, 1885년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다. 선생은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관직에서 물러나 재야에 머물다가 1910년 동생 이회영(’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이시영(‘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등 6형제와 일가족 전체가 독립군 기지 개척 등 독립운동을 위해 전 재산을 처분하여 서간도로 망명했다. 선생의 재정지원으로 1911년 서간도에 한인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가 설립되었으며, 농업개발, 민족교육, 군사교육을 실시하여 구국인재를 양성, 무장항일 투쟁을 전개하고자 하였으나 1911년과 1912년 연이은 대흉년으로 심각한 재정난에 부딪히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선생이 기부한 자금으로 신흥무관학교 전신인 신흥강습소가 설립되어 1911년 6월 서간도 삼원포 추가가(鄒家街)에서 개교식를 가졌다. 이곳에서 1920년까지 3,5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으며, 만주에서 조직된 독립군의 근간을 이루며 독립전쟁사에 찬란한 자취를 남겼다. 1912년 신흥강습소가 신흥학교로 개편되면서 주변의 권유로 선생이 교장을 맡았는데 선생이 독립운동에서 직함을 가진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를 통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꺼리는 선생의 성품을 알 수 있다. 특히, 이러한 선생의 재정적 후원이 없었다면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의 탄생은 어려웠을 것이다.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친 선생은 노후에 끼니조차 잇기 힘든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다 1934년 상하이 빈민가에서 생을 마쳤다. 독립운동은 집안의 희생과 몰락을 각오하고 나서야만 했던 가시밭길이었다. 그러나 그 길을 마다하지 않았던 선생과 6형제들의 삶과 자취는 독립운동의 정의와 양심이 무엇인가를 역사에 남긴 표상이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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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2020년 8월 호국인물, 김홍일(金弘壹) 육군 중장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이 2020년 8월 호국인물로 ‘김홍일(金弘壹) 육군 중장’을 선정했다고 밝혔다. 30일 전쟁기념관에 따르면 고(故) 김홍일 육군중장은 대한제국 시기인 1898년 9월 23일,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계몽주의 독립운동의 본산이었던 오산학교 졸업 후, 황해도 신천의 경신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지만, 오산학교 출신자들이 항일운동 혐의로 탄압을 당하자 이를 계기로 항일무장투쟁에 투신했다. 1920년, 구이저우[貴州]군 소위로 임관 후 무장투쟁이 치열하던 연해주 대한의용군사회에서 근무했다. 1926년 국민혁명군 소령이 된 후, 1927년 용담(龍潭)전투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고, 1931년에는 상하이 병기창 주임으로서 이봉창·윤봉길에게 폭탄을 제공해 임시정부의 의열 투쟁을 지원했다. 1938년, 중일전쟁 만가령 전투의 승리를 이끌어 외국인으로서 드물게 국민혁명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그는 임시정부의 권유로, 1945년 한국광복군 참모장에 취임하여 광복군의 육성에 힘썼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 직후, 귀국하여 육군준장으로 특별 임관하였고, 이듬해 소장으로 진급했다. 6·25전쟁이 발발 당시 육군참모학교장이었던 그는 6월 28일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서울 북방에서 분산 철수하는 국군 부대를 수습하여 한강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의 지휘를 통해 국군은 한강에서 6일 동안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였고, 미국이 참전을 결정하고 첫 지상군을 한반도에 파견하는 귀중한 시간을 확보했다. 7월 4일에는 제1군단장에 취임하여 중부전선의 지연전과 낙동강선 방어 작전을 지휘했다. 이후 육군종합학교장으로서 초급간부 양성에 전념하던 그는 1951년 3월 중장으로 예편했다. 그리고 대만대사, 외무부장관, 국회의원, 신민당 대표, 광복회장으로서 왕성하게 활동하던 그는 1980년 8월 8일, 향년 83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정부는 군인으로서 그의 공을 기려 1951년 7월 26일 태극무공훈장을, 독립운동 유공으로서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수여했다. 그가 타계한 직후인 1980년 8월 11일에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여 그의 공로를 드높였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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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전현충원 2020년 7월의 현충인물, 박재권·남궁선·김기봉 이등중사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립대전현충원이 2020년 7월의 현충인물로 ‘박재권·남궁선·김기봉 이등중사’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국립대전현충원에 따르면 7월의 현충인물은 70여 년 전 위기의 대한민국을 지켜낸 ‘박재권·남궁선·김기봉 이등중사’로, 세 분의 용사들은 남북공동유해발굴 사업을 통해, DMZ에 위치한 화살머리고지에서 유해가 발굴되며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 화살머리고지는 6·25전쟁 당시 최대 격전지 중 하나로 수많은 호국용사가 잠들어 있다. 유해발굴사업은 6·25전쟁 당시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으나 수습되지 못한 채 아직도 이름 모를 산야에 홀로 남겨진 12만 3천여 위 호국용사들의 유해를 찾아 조국의 품으로 모시는 「국가적 숭고한 호국보훈사업」이다. 박재권 이등중사는 1931년 경남 사천에서 태어나 1952년 3월 입대해 국군 제2사단 31연대 소속으로 참전했다. 강원 김화 저격능선 전투, 철원지구 전투 등에서 전투를 치른 박 이등중사는 화살머리고지 전투에서 고지 사수 하루 전인 1953년 7월 10일 안타깝게도 전사했다. 남궁선 이등중사는 1930년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나 1952년 4월 입대하여 국군 제2사단 32연대 소속으로 전쟁에 참전했다. 남 이등중사는 소총수로 철원 상석지구 전투에 참전하였고, 1953년 7월 9일 화살머리고지를 향한 중공군의 대대적인 공습으로 교전 중 105mm 포탄을 맞아 산화했다. 김기봉 이등중사는 1925년 경남 거제에서 태어나 1951년 12월 당시 27살의 나이로 국군 제2사단 31연대 소속으로 참전했다. 김 이등중사는 1953년 6월 29일부터 중공군의 공격으로 시작된 화살머리고지 공방전 중 1953년 7월 10월 전사했다. 고인을 직접 발굴한 DMZ 발굴팀장은 입안에 물고 계셨던 철제 계급장이 마치 “나를 반드시 알려 달라”는 일종의 메시지같이 느껴졌다고 전했다. 박재권 이등중사는 2019년 3월 26일, 남궁선 이등중사는 2019년 9월 18일, 김기봉 이등중사는 2019년 11월 7일 각각 육군참모총장 주관으로 안장식을 거행하였고,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하여 공훈을 기리고 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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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2020년 7월 호국인물, 고길훈 해병 소장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이 2020년 7월 호국인물로 ‘고길훈 해병 소장’을 선정했다. 전쟁기념관에 따르면 고(故) 고길훈(1922.7.10.~1981.2.14.) 해병 소장은 1922년 7월 10일 함경남도 영흥군에서 태어났다. 1944년 도쿄 메이지[明治]대학 문과를 졸업하고 광복 이후 귀국하여 1946년 5월 11일 해군에 입대하였다. 1949년 4월 15일 해병대 창설에 참여하여 초기 해병대의 체제정립에 크게 기여한 그는, 9월 소령으로 진급하였다. 이후 해병대는 전쟁 발발 이전까지 지리산 및 제주도에서 치안유지 임무를 수행하였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북한군은 한 달도 채 지나기 전에 호남지역까지 남하했다. 같은 해 7월 15일 해군본부는 호남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제주도에서 대기하던 해병 3백여 명을 ‘고길훈 부대’로 명명하고 고길훈 소령에게 지휘를 맡겼다. ‘고길훈 부대’는 군산지역에 상륙하여 불과 3백여 명의 병력으로 3일 동안 군산 일대를 방어하면서 북한군의 공세를 저지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군산항에 적재된 정부의 재산을 보전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하여 연희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해병학교장·제1해병연대 부연대장 등을 역임하였다. 휴전 후에는 제1여단장과 제1상륙사단장 등을 역임하였고, 1963년 12월 해병소장으로 예편하였다. 1981년 2월 14일 향년 60세를 일기로 타계하여 서울 국립현충원 장군묘역에 안장되었다. 고(故) 고길훈 해병 소장은 해병대의 첫 전투인 군산·장항·이리 지구 전투를 승전으로 이끌었으며, 6·25전쟁 기간 동안 주요 전투의 승리에 기여하면서 해병대의 저력을 보여주었다. 정부는 이러한 그의 공적을 기려 1952년과 1954년 을지무공훈장을 수여하였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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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의 6·25 전쟁영웅, 란가라지 인도 육군 중령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는 ‘란가라지 인도 육군 중령’을 2020년 7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 보훈처에 따르면 란가라지(1916.6.5.∼2009.3.23.) 중령이 지휘한 인도 제60야전병원은 1942년 8월 창설 부터 공수사단에 배속되어 공수훈련을 받은 의무장병들로 편성되었다. 이들 대부분은 제2차 세계대전에 종군한 경험과 더불어 인도 서북부 국경의 캐시미르(Kashmir) 산악지대에 18개월간 배치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인도 제60야전병원은 외과의사 4명, 마취의사 2명, 일반의사 8명, 치과의사 1명 등 총 341명으로 2개의 외과반과 1개의 치과반으로 편성되었으며, 1950년 11월 20일 부산에 도착한 후 2개 제대로 편성하여 란가라지 중령이 지휘하는 본대가 영국군 제27여단을 직접 지원하고, 배너지 소령이 지휘하는 분견대가 대구 후방병원을 담당했다. 제60야전병원 본대는 평양까지 진출한 후 유엔군의 전면적인 철수에 따라 의정부-수원-장호원으로 철수하였다가 유엔군의 재반격이 시작되면서 영국군과 함께 최전선에 투입되었다. 또한, 1951년 중공군의 공세로 호주군이 주암리 북쪽에서 격전을 벌이는 동안 위생병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총탄이 빗발치는 최전방 고지까지 나아가 중상자들을 들것으로 실어오기도 했다. 이때 많은 중상자들이 응급조치 후 헬리콥터로 후방병원에 신속히 후송되어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1951년 10월, 유엔군의 코만도 작전에 참가한 인도 의무요원들은 총검과 수류탄 대신 의약품과 수술기구를 휴대하고 공격부대를 뒤따르면서 전상자들의 응급조치는 물론 험한 지형과 공산군의 저지사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헌신적으로 환자 수송작전을 전개하였다. 1953년 2월 란가라지 중령은 직접 수술조를 편성하고 전장을 누비며 환자를 수술하는 등 진두지휘를 하던 약 25개월간의 6·25전쟁 참전 복무기간을 마치고 귀국했다. 인도정부는 그에게 ‘Mahar Vir Chakra’ 훈장을 수여했으며, 그가 지휘한 제60야전병원은 한국정부, 유엔군사령관, 인도정부로부터 그 공로를 인정받아 많은 훈장을 수여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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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의 독립운동가, 강혜원 선생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공동으로 ‘강혜원 선생’을 ’2020년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에 따르면 강혜원(1885.11.21.~1982.5.31.) 선생은 1885년 11월 21일 평양에서 출생하였고, 자녀들의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어머니 황마리아를 따라 1905년 5월 하와이로 이주하였다. 그곳에서 삯바느질을 하여 학비를 벌었으며 1913년 4월 어머니와 함께 호놀룰루 대한인부인회를 조직하면서 한인부인운동을 시작했다. 1919년 3월 올케 강원신을 비롯하여 한성선, 한영숙, 한신애, 김경애 등과 함께 신한부인회(新韓婦人會)를 조직하고 총무로 선임되었다. 신한부인회는 동포들의 자유정신 고취, 한국 후원, 대한인국민회에 의무금을 납부하는 한인여성단체였다. 그리고 각지에 흩어져 있던 부인회를 통합하여 1919년 8월에 대한여자애국단을 창립하고 선생은 총단장으로 선임되었으며, 1920년 2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통해 군자금 500달러를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1921년 4월 28일 대한여자애국단 총부 위원들과 함께 「여자애국단 경고서」를 발표하고 단비(團費) 수납을 촉구했다. 선생은 시간당 15센트씩 벌면서도 매월 3달러씩 단비(團費)를 냈으며, 이렇게 어렵게 모은 돈을 선생을 비롯한 대한여자애국단 단원들은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후원금을 송금했다. 이후에도 부인회를 통해서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지원했으며 1940년 1월, 1941년 2월, 1941년 12월 대한여자애국단 총부 단장으로 3번이나 선임되어 3년간 활동했다. 이처럼 선생은 임시정부와 대한인국민회의 재정을 적극 지원했고, 미주 내 한인 동포 자녀들에게 민족교육운동을 실시하는 등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쳤다. 해방 이후에도 재미한인전후구제회(在美韓人戰後救濟會)와 함께 본국에 구제품을 보내기도 했으며, 1982년 5월 31일 별세하여 로스앤젤레스 로즈데일(Rosedale) 공동묘지에 계시다가 2016년도에 남편과 함께 유해봉환되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한편, 선생을 비롯한 가족 모두가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어머니 황마리아(1865~1937)는 하와이 한인사회 여성운동의 선구자로서 2017년 애족장에, 남편 김성권(1875~1960)은 하와이 한인 한인단체인 한인합성협회, 흥사단 등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하여 2002년 애족장에 추서되었으며, 동생 강영승(1888~1987)은 미주한인사회 최초로 법학박사 학위을 취득한 인물로 대한인국민회, 신한민보 등에서 민족운동에 헌신 2016년 애국장에, 올케 강원신(1887~1977)은 선생과 함께 미주 한인사회 부인운동을 통한 독립운동에 헌신한 공로로 1995년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