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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옥 의사, 독립운동 탄압의 심장 종로경찰서를 겨누다
한지 김상옥(金相玉) 의사(1890. 1. 5.~1923. 1. 22.)는 서울에서 태어나 20세에 동흥야학교(東興夜學校)를 설립하는 등 사회계몽ㆍ민족교육에 헌신했다.3ㆍ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윤익중(尹益重), 신화수(申華秀), 정설교(鄭卨敎) 등 동지들과 함께 비밀결사조직인 혁신단(革新團)을 조직하고 기관지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행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했다. 1920년 봄에는 만주에서 들어온 군정서원(軍政署員) 김동순(金東淳)과 만나 암살단을 조직하여 일제 주요기관을 파괴하고 요인을 암살하는 등 의열투쟁을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갈 것을 계획했다. 의사는 일제 경찰의 수사망을 피해 1920년 10월에 상해로 망명하여 김구ㆍ이시영ㆍ조소앙 등 임시정부 요인들과 교류하면서 의열단에 가입하였고, 조국 독립을 위한 의열투쟁 의지를 키웠다. 1922년 겨울, 의열단원으로 폭탄ㆍ권총ㆍ실탄 등의 무기를 휴대하고 안홍한(安弘翰), 오복영(吳福泳) 등과 함께 서울에 잠입하여 거사 기회를 노리다가 이듬해인 1923년 1월 12일 밤, 일제 식민통치의 근간이었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여 여러 명을 부상시켰으며, 1월 22일 일본 경찰과 교전 끝에 장렬하게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의사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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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윤승주 일병 국가유공자(순직군경)로 등록 결정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가 고(故) 윤승주 일병을 국가유공자(순직군경)로 등록 결정하고, 유족에게 '18. 1. 3.(수) 국가유공자 증서를 수여했다. 고(故) 윤승주 일병은 '14. 4. 7. 선임병 4명에게 지속적인 구타와 가혹행위를 당해 사망했으며, 유족은 '14. 5. 14. 국가보훈처에 국가유공자(순직군경) 등록신청을 했다. 국가보훈처는 '15. 5. 27. 윤일병이 영내 또는 근무지에서 내무생활 중 상급병의 구타․가혹행위로 인한 사고 또는 재해로 사망했다고 보아 보훈보상대상자(재해사망군경)으로 의결했다. 그런데 현지 사실조사('17. 12. 6.) 결과 윤일병이 의무병으로서 주중과 주말 구분 없이 상시 대기 상태로 직무를 수행한 것이 확인됐다. 이에 국가보훈처 보훈심사위원회는 '17. 12. 13. 고인이 의무병으로서 24시간 의무대기한 점 등을 감안, 국민의 생명보호와 관련하여 복무 중 사고를 당한 것으로 보아 국가유공자(순직군경)에 해당한다고 재의결했다. 이와 관련 피우진 처장은 “앞으로도 의무복무자가 영내생활 중 사망한 경우 그 경위에 대해 사실조사 등을 통해 면밀하게 검토,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이겠다”면서 “국가보훈처는 보상과 복지 뿐만 아니라 국가유공자 심사에서도 '따뜻한 보훈‘이 지속적으로 확대될 수 있도록 하겠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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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제 순국선열, 국립대전현충원 2018년 1월의 현충인물
국립대전현충원(원장 권율정)은 염재야록(念齋野錄)을 저술한 조희제(1873.12∼1939.1) 순국선열을 2018년 1월의 현충인물로 선정했다. 조희제 선생은 1873년 12월 10일 전북 임실군 덕치면 회문리 절골에서 태어났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과 맞서 의병을 준비할 만큼 애국의식이 투철했던 아버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선생은 기우만 의병장, 송병선 순국지사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으며 항일의식을 키울 수 있었다. 선생은 자신이 살고 있던 임실에서 의병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자 재산을 털어 임실․순창․남원 등지에서 활동하던 의병을 직접 도왔으며, 옥고를 치르던 애국지사의 뒷바라지도 도맡았다. 선생의 독립운동 중 가장 중요한 활동은 ‘염재야록’의 집필․편찬이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애국지사의 독립운동을 기록해 역사에 남겨야겠다고 결심한 선생은 수십 년간 전국 각지를 돌며 관련 자료를 수집해 1931년 초고를 완성했다. 조 선생은 1938년 ‘염재야록’의 편찬사실이 발각돼 옥고를 치뤘으며, 일제 경찰의 잔혹한 고문과 단발 강요에 1939년 1월 자결 순국했다. 정부는 조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으며,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1묘역에 안장됐다. [자료제공 : 국립대전현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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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의 독립운동가, 조지 애쉬모어 피치 선생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 광복회, 독립기념관이 조지 애쉬모어 피치(George Ashmore Fitch, 1883. 1. 23~1979. 1. 20.) 선생을 2018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선생은 중국 상하이에서 장로교 선교사인 아버지 조지 필드 피치가 한국인들과 접촉하며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모습을 보며 성장했다. 1909년 미국에서 목사가 되어 상하이로 돌아온 후 YMCA에서 활동하며 크레인(Charles Richard Crane) 주중 미국대사에게 여운형을 소개하여 주었고, 한국 독립운동가를 위한 회합장소를 제공했다. 1919년 미국에 설립된 한인구제회가 재정적 어려움을 겪자 상하이 주재 외국인 선교사들을 모아 적극적인 모금에 나섰고, 한인학교인 ‘인성학교’를 위해서도 모금활동을 했다. 1932년 4월 윤봉길 의거로 인해 일본경찰에 쫓기던 김구, 엄항섭, 안공근, 김철을 자택에 숨겨주었으며, 위치가 노출되자 중국인으로 위장시켜 아내인 제랄딘과 상하이를 탈출시켰다. 이후 프랑스 조계지역 언론과 경찰에 서한을 보내 일본 경찰의 한국인에 대한 불법 체포와 검문에 항의했다. 1937년 일본군이 난징 대학살을 일으키자 당시 난징에 있던 외국인들과 함께 국제위원회를 조직하여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는데 노력했다. 1941년에는 미얀마 랭군과 충칭을 연결하는 미얀마로드 미군 수송활동에 참여했고,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중국 국민당의 연락사항을 미국 전략정보국(OSS)에 전달하는 첩보작전을 수행하였으며, 1942년 중국 국민당 정부를 상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을 청원했다. 해방 후, 1947년 한국 YMCA 총간사로 임명되어 6.25전쟁 중 구호활동에 전념하다 1951년 은퇴했다. 정부는 1968년 조지 애쉬모어 피치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자료제공 :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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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의 전쟁영웅, 김 신 공군 중장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가 백범 김구 선생의 차남이자 제6대 공군참모총장을 역임한 김신 공군 중장(1922.9.21 ~ 2016.5.19)을 2018년 1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자 다음날인 6월 26일에 이근석 대령 등 10명과 함께 미군으로부터 F-51 무스탕(Mustang) 전투기를 인수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당시 미측이 제의한 F-51 전투기 인수 조종사 선발조건은 ‘훈련 없이도 전투기를 탈 수 있는 조종사’였다. 김 신 중령은 인수에 참여한 10명 중 유일하게 미 공군에서 F-51로 훈련받은 경험을 보유하고 있어 통역과 함께 비행기에 대한 기초적인 설명을 맡아 비행훈련 진행과 전투기 인수에 크게 기여했다. F-51 인수는 대한민국 공군의 본격적인 전투 임무 수행의 결정적 출발점이었다. 단 한 번의 비행훈련 끝에 F-51 전투기를 인수해 7월 2일 귀국한 김 신 중령 등은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은 위급상황에서 이튿날인 7월 3일부터 전투 출격하여 묵호, 삼척 지구와 영등포, 노량진 지구전투 등에서 적 부대와 탄약저장소 등을 공격했다. 이후에도 지리산 공비토벌작전(’51년 8월), 대한민국 공군 단독출격작전(’51년 10월) 등 전쟁기간 중 총 19회 출격했다. 특히, 제10전투비행 전대장으로 재임할 때 미 공군이 수차례 출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한 승호리철교 폭파임무를 맡았다. 승호리 철교는 평양 동쪽 10km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평남 중앙선이 지나는 대동강 지류인 남강에 설치된 철교로 군수물자를 중·동부 전선으로 수송하는 적 후방보급로의 요충지였다. 1, 2차 출격에도 임무에 실패하자 김 신 대령은 휘하 지휘관 참모와 전술적 문제를 논의해 적의 극심한 대공포화의 위협을 감수하고라도 고도를 강하하여 폭탄을 투하하는 새로운 공격전술을 창안했으며, 1952년 1월 15일에 마침내 승호리철교 폭파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자료제공 : 국가보훈처 / 사진자료 : 네이버블로그-킷캣(hano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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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의 독립운동가, 김치보(金致寶)선생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이 공동으로 2017년 12월의 독립운동가로 김치보(金致寶, 1859. 9. 17~1941. 11. 18.)선생을 선정했다. 선생은 평안남도 평양 출생으로 1919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노인동맹단을 조직하고 강우규를 국내에 결사대로 파견하여 새로 부임하는 조선총독 사이토 암살시도를 지원한 분이다. 1908년 경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한 후 덕창국이라는 한약방을 운영하며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09년 국민회 블라디보스토크 지방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청년돈의회 회장을 맡아 한인 교육활동에 힘을 쏟았다. 1910년 성명회의 병탄조약 원천무효 선언서에 서명했고, 1911년 권업회에 참여하여 통신부장에 선임되었다. 1919년 2월 대한국민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3․1운동 소식이 들려오자 연해주 일대에서 대규모 만세시위를 전개했다.1919년 3월 노인동맹단 단장으로 선출되었다. 노인동맹단은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본총영사관에 독립요구서를 제출하였고, 9월 강우규를 국내에 결사대로 파견하여 남대문역 앞에서 새로 부임하는 조선총독 사이토에게 폭탄을 던져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22년 4월에 해삼위천도교교구장 고문자격으로 귀국하여 최시형의 아들 최동희를 만나 고려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선생의 행적은 1924년 3월까지 확인되나 이후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정부는 1996년 김치보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자료출처 :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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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의 전쟁영웅, 감봉룡 경찰 경감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가 12월의 전쟁영웅으로 ‘감봉룡’ 경찰 경감을 선정했다. 감봉룡 경감은 6·25전쟁 발발 당시 황해도 개성지역 철도경찰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개성은 서울과 평양을 잇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북한군의 공세가 시작되었고, 적 정예 제1사단, 제6사단과 13대의 T-34전차의 집중 공세를 막아내지 못한 국군 제12연대는 김포반도로 철수해야 했다. 개성경찰서 병력도 연대와 함께 철수했다. 그러나 이때 감봉룡 경감이 지휘하는 철도경찰대는 50명 전 대원 모두 본부를 사수하기로 결의하고 본부 주변의 요충지를 점거해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철도경찰대의 저항이 워낙 완강한데다 개전 후 처음으로 조직적인 저항을 받은 북한군은, 다른 통로로 진출하던 5대의 전차까지 동원해 본부 건물을 포격하기 시작했다. 포위망은 좁혀져 왔다. 총탄이 부족하고 통신마저 두절된 상태에서 감봉룡 경감과 대원들은 굴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끝까지 돌격하여 장렬히 산화하였다. 우월한 자동화기와 대규모 병력, 게다가 전차까지 가세한 적을 막아내기에는 애초 역부족이었지만, 이들의 분전은 전쟁초기 북한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히면서 그들의 사기를 저하시킨 숭고한 희생이었다. 정부는 감봉룡 경감의 고귀한 뜻과 희생정신을 높이 평가하여 2014년 충무무공훈장을 추서했다. [자료출처 :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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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경철 의사자, 국립대전현충원 12월의 현충인물
국립대전현충원(원장 권율정)이 12월의 현충인물로 심경철 의사자(1975.9.15∼2001.1.15)를 선정했다. 심경철 의사자는 1998년 목포해양대학교를 졸업하고 2급항해사로 승선중이던 2001년 1월 15일 거제 남녀도 해상에서 유조선(SK해운) P-하모니의 알 수 없는 폭발사고로 사망했다. 심 의사자는 배가 침몰하는 순간 구명복을 착용하지 못한 여성 실습생 2명을 위해 자신의 구명기구를 던져 구하고 자신은 맨몸으로 혹한의 겨울바다에 뛰어 내렸다가 사고를 당했다. 위급한 상황에서 타인의 생명을 구하다 희생된 심경철 의사자는 2001년 9월 의사자 확정을 받고 2007년 10월 국립대전현충원 의사상자 묘역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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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영웅 고태문 명예도로 표지석 제막식 열어
제주특별자치도보훈청(청장 황승임)이 호국영웅 고태문 대위 명예도로 표지석 제막식을 개최했다. ‘명예도로 고태문로’는 강원도 인제지구 펀치볼 동북부 884고지에서 중대장으로 적과 백병전까지 전개하며 고지 사수전을 벌여 전쟁을 승리로 이끈 고태문 대위의 희생정신을 후세대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지정했다. 고태문로는 고 대위의 출신지역인 구좌읍 한동리 해안도로 2.4km 구간이다. 11월 8일 오전 11시 열린 이날 제막식에는 故 고태문 대위 유가족과, 전성태 행정부지사, 김경학, 부공남 의원을 비롯하여 보훈·안보단체장, 지역주민 등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막식, 축사, 헌시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표지석은 앞면이 길이 3.5m, 폭 0.46m, 높이 2.5m로 강승우 중위 연혁과 공적이 명각되어 있으며, 후면은 길이 2.04m, 폭0.46m, 높이 2m로 헌시를 명각하여, 호국영웅의 숭고한 희생과 공훈을 기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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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영웅 강승우 명예도로 표지석 제막식
제주특별자치도보훈청(청장 황승임)이 호국영웅 강승우 중위 명예도로 표지석 제막식을 개최했다. 11월 6일 오전 11시에 열린 이날 제막식에는 故 강승우 중위 유가족과, 전성태 행정부지사, 도의회 강성균 교육위원장 등 도의원, 이상순 서귀포시장을 비롯하여 보훈·안보단체장, 지역주민 등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막식, 축사, 헌시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명예도로 강승우로’는 6․25한국전쟁에서 최대 격전지였던 백마고지 전투에서 육탄으로 적 기관총 진지로 돌격, 격파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끈 강승우 중위의 희생정신을 후세대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지정한 것이다. 명예도로는 강 중위의 생가터를 중심으로 성산읍 시흥리 해안(올레1코스 일부 해당) 1.6km 구간이다. 표지석은 앞면이 길이 3.5m, 폭 0.46m, 높이 2.5m로 강승우 중위 연혁과 공적이 명각되어 있으며, 후면은 길이 2.04m, 폭0.46m, 높이 2m로 헌시를 명각하여, 호국영웅의 숭고한 희생과 공훈을 기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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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의 전쟁영웅, ‘앙리 모로 드 믈랑’ 벨기에 육군 소령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2017년 11월의 전쟁영웅으로 ‘앙리 모로 드 믈랑’ 벨기에 육군 소령을 선정했다. 벨기에 상원의원이자 국방부장관으로 재직 중이던 앙리 모로 드 믈랑은 1950년 6‧25전쟁 지원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국무회의에서 장비만 지원하자는 다수의 제안을 일축하고 파병을 주도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1951년 5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국방부장관직을 내려놓고 통신장교로 6‧25전쟁에 참전했다. 그때 그의 계급은 놀랍게도 소령에 불과했다. 앙리 모로 드 믈랑의 6‧25전쟁 참전을 위해 상원의원이 해외 참전을 금지한 당시 벨기에 법률을 개정하기까지 했다. 앙리 모로 드 믈랑은 1951년 2월 임진강 북쪽의 금굴산 진지를 방어하여 중공군의 진출을 저지하였고 이를 통해 영국 제29여단의 철수를 지원하였다. 1992년 영면한 앙리 모로 드 믈랑은 1988년 펴낸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벨기에도 한국처럼 열강에 둘러싸인 소국이기 때문에 같은 처지의 한국을 도와야 했다. 전쟁은 끔찍한 일이다. 하지만 인간은 전쟁 한가운데서 전우를 위해 목숨을 희생할 수 있는 위대한 창조물이다.” 그는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내려놓은 채 더 큰 가치인 인류애를 행동으로 보여주었고,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여 세계인의 귀감이 되었다.[자료출처 :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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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의 독립운동가, 이근주 선생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2017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이근주(李根周, 1860~1910) 선생을 선정했다. 선생은 1910년 8월 경술국치의 비보를 접하고 자결로 일제의 침략에 항거했다. 선생은 1860년 2월 충청남도 홍성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에 항거하여 일어난 홍주의병에 김복한․안병찬 등과 참여했다. 그러나 김복한 등 주도자들이 체포된 뒤에 조의현 등과 재기를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선생은 홍주의병 과정을 기록한「을미록」, 나라가 매군매국(賣君賣國)의 무리에 의해 더렵혀짐을 한탄한「절의가」, 민영환의 순국을 기린 혈죽시 등 여러 항일 기록을 남겼다. 1910년 8월 국치의 비보를 접하자, “국운이 다하였으며 성인의 도가 끊어져 살아갈 마음이 없다. 일본한테 나라를 빼앗긴 것은 너무나 분통하고 부끄럽고 또 싫어서 죽을 수밖에 없다.” 하며 자결을 결심했다. 선생은 1910년 9월 큰형의 환갑이 지난 뒤 부모의 묘에 가서 제사를 올리고 자진․순국했다. 정부는 1991년 이근주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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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현·김규재·변재우 소방관, 국립대전현충원 11월의 현충인물
국립대전현충원(원장 권율정)이 조기현·김규재·변재우 소방관을 ‘11월의 현충인물’로 선정했다. 조기현·김규재·변재우 소방관은 은평소방서 소속으로 2008년 8월 20일 서울 은평구 대조동 나이트클럽 화재 당시 진압 작업을 하던 중 3층 천장이 무너져 매몰되면서 순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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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심장에 폭탄을 던진 이봉창 의사
이봉창 의사는 1900년 8월 10일, 효녕대군의 후손인 부친 이진규씨와 모친 밀양 손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0살 때 용산 사립 문창학교에 입학하여 4년 후 졸업한다. 이후 일본인이 경영하는 제과점의 종업원으로 일했고, 만주로 건너가 남만철도회사 용산정거장에서 운전견습생으로 근무했다. 두 직장에서 일본인 직원들에게 계속 굴욕적인 수모와 설움을 받았던 이봉창 의사는 이 설움이 모두 ‘나라를 일본에 빼앗겼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이후 선생은 ‘적을 이기기 위해선 적을 알아야 한다’는 결심을 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나고야, 도쿄, 요코하마 등지를 전전하며 일본어를 익히는 한편, 상점 점원, 철공소 직공, 잡역부로 생활하며 일본 생활을 익혔다. 6년 일본 생활을 마친 이봉창 의사는 독립운동의 기회를 잡기 위해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간다. 당시 임시정부 직원들은 ‘기노시타’라는 일본식 이름을 쓰며 봉급을 타면 술에 취해 사치와 호사를 즐기는 건달의 모습을 한 한국인 청년을 의심한다. 그들은 이 청년을 계속해서 임정 건물에 출입하도록 하는 백범 김구 선생에게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백범은 어찌하여 우리 한국인인지 일인인지 모르는 자를 임정 건물에 출입하도록 놔두고 있습니까? 그 자는 하오리(일본식 의복)를 입고 게다짝까지 신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백범 김구 선생은 이봉창 의사에 대해 면밀히 관찰하며 그가 단순 ‘건달’이 아님을 간파하고 있었다. 김구 선생은 그와 여러 차례 비밀 면담을 가지며, 다음과 같은 이봉창 의사의 인생관에 크게 감복했다. "제 나이가 이제 서른 한 살입니다. 앞으로 서른 한 살을 더 산다고 해도 지금까지 보다 더 나은 재미는 없을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0년 동안에 인생의 쾌락이란 것을 대강 맛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영원한 쾌락을 위해서 독립사업에 몸을 바칠 목적으로 상해에 왔습니다." 이후 두 사람은 이봉창 의사의 일본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일왕폭살계획을 추진하게 된다. 일왕폭살을 위한 거사는 꼬박 1년의 준비 시간이 걸렸다. 김구 선생이 거사에 필요한 자금과 폭탄을 구하는 동안, 이봉창 의사는 일본인으로 가장하여 일본인이 운영하는 철공소에서 일하며 거사를 준비했다. 드디어 모든 준비를 마친 1931년 12월 13일, 이봉창 의사는 김구 선생이 이끄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여 다음과 같은 선서를 하며 결의를 다졌다. “나는 적성(赤誠)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선서식을 행한지 4일 만에 일본으로 건너간 이봉창 의사는 이듬해 1월 8일 일왕 히로히토가 도쿄 요요기 연병장에서 거행되는 신년 관병식(觀兵式)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김구 선생에게 이날 거사를 치르겠다는 암호 전보를 보냈다. 이윽고 1932년 1월 8일, 이봉창 의사는 앵전문 앞에서 일왕 행렬이 나타나길 기다렸다가 때를 놓치지 않고 일왕을 향해 수류탄을 투척했다. 수류탄은 일본 궁내대신이 탄 마차 옆에 폭발하여 일장기기수와 근위병이 탄 말 두 필을 말이 다쳤으나, 일왕 히로히토를 암살하는 데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거사 직후 현장에서 붙잡힌 선생은 같은 해 9월 30일 오전 9시, 경찰들이 겹겹이 둘러싼 가운데 진행된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고, 10월 10일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받아 순국했다. 1945년 광복 이후 귀국한 김구 선생은 이봉창 의사의 유해를 돌려받아 1946년 서울의 효창공원에 윤봉길, 백정기 의사와 함께 안장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비록 거사는 실패했지만, 이봉창 의사의 일왕폭살 의거는 독립운동사에 큰 의미를 준다. 일본제국주의가 신격화해 놓은 일왕의 행차에, 그것도 그들의 심장부인 동경에서 폭탄을 투척했다는 것은, 중국을 비롯한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던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당시 중국 언론에서도 이봉창 의사의 용감한 의거를 보도했고, 이로 인해 이전에 좋지 않았던 한중 국민의 감정 대립도 없어진 계기가 된다. 또한, 이봉창 의사의 의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로를 개척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 독립운동의 강인성과 지속적인 저항성을 전 세계에 보여주었다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자료출처 : 국가보훈처 대표 블로그 - 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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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영웅 고(故) 차일혁 경무관 흉상 제막식 거행
호국영웅 고(故) 차일혁 경무관 흉상 제막식이 열렸다. 9월 29일 정읍시 쌍암동 내장산 워터파크에서 진행한 제막식에는 유족, 심덕섭 국가보훈처 차관, 박영근 문화재청 차장, 김생기 정읍시장, 유진섭 정읍시의회 의장, 보훈 가족 등 400여명이 참석했다. 흉상은 청동과 화강석 재질로 가로 2m, 세로 0.7m, 높이 2.4m 크기로 만들었다. 앞면에는 애국의식을 상징하는 무궁화와 차 경무관이 빨치산 토벌 당시 친필로 쓴 ‘진중기록’을 새겼다. 당시 제18전투경찰대대장 차 경무관은 1951년 1월 빨치산 2000여명이 정읍 칠보발전소를 포위하자, 대원 75명을 이끌고 빨치산을 격퇴했으며 빨치산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을 사살하는 공적을 세웠다. 또한 차 경무관은 당시 빨치산의 은신처인 전남 구례의 통일신라시대 사찰 화엄사와 천은사, 하동 쌍계사, 고창 선운사 등을 소각하라는 상부 명령을 받았지만 무장공비의 은신을 막고자 대웅전 등의 문짝만 떼어내 불태우는 기지를 발휘해 천년고찰 문화재를 지켜낸 인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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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의 독립운동가, 채상덕 선생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채상덕(蔡相德, 1862~1925) 선생을 2017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밝혔다.선생은 1862년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통군부 총장, 대한통의부 부총장, 의군부 총장을 역임하며 만주에서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다.1895년 의병에 참여했고, 1910년대 조선이 강점되고 독립의군부가 와해되자 남만주로 망명하였으며 1922년 대한통군부 총장에 선임되었다.1923년 대한의군부를 조직하여 총재를 역임하였고 동년 여름 중국 남만주 화전현에서 독립운동 지도자 58명과 함께 만주독립운동계의 통일과 진로에 대해 회의를 가졌다.1924년 성립된 참의부에 자신의 제자와 부하들을 가입시켜 독립운동을 할 수 있도록 독려하였다.그러나 1925년 3월 밀정 이죽파의 밀고로 일본경찰이 참의부의 회의장소를 기습공격하여 다수의 전사자와 중상자가 발생하게 된다. 이 일로 인해 비통함에 빠진 선생은 제자 이수홍에게 독립군이 되어 자신의 의지를 이어 줄 것을 당부한 후, “부하가 다 죽었으니 나 혼자 살아있을 면목이 어디 있겠느냐”는 말을 남기고 자결 순국했다. 정부는 1995년 채상덕 선생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자료출처 : 국가보훈처,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블러그-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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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의 전쟁영웅, 김경진 육군 중령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김경진’ 육군 중령을 10월의 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김경진 중령은 1920년 9월 8일 경북 의성에서 태어나 1949년 5월 육군사관학교를 8기로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했다. 그는 국군 제9사단 소속으로 1950년 11월 전북 대둔산과 경북 김천·상주지구 공비토벌작전, 12월 강원도 설악산·오대산지구 전투, 1952년 7월 김화지구 전투에 참가해 큰 전공을 세웠다. 1952년 10월 김경진 소령(당시)은 제29연대 2대대장으로서 백마고지 전투에 참가하게 된다. 당시 백마고지는 철원평야 서북단에 위치한 396m 독립고지로서 작전상 요지 중의 요지였다. 전쟁 중 고지의 주인이 무려 스물네 번이나 바뀌고 하루 평균 5만발에 가까운 포탄이 쏟아져 세계 전사에 유례없는 치열한 고지공방전으로 불릴만큼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던 것이다. 1950년 10월 11일, 백마고지의 정상탈환 역습명령을 받은 김경진 대대장은 고지를 확보한 중공군이 진지를 강화하기 전 신속히 역습을 감행하기 위해 5중대를 주공으로 투입했다. 그러나 정상을 100m 가량 앞둔 지점에서 적의 박격포와 직사화기 공격에 막혀 진격이 중단되자 대대장 자신이 포복으로 최전방인 5중대로 나아가 전투를 독려했다. 정상 20m 앞까지 진격한 김경진 소령은 최후의 돌격사격을 감행하던 중 적의 박격포탄에 의해 현장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고인의 살신성인에 힘입어 10월 14일 9사단은 마침내 백마고지 일대를 완전히 탈환, 확보했으며 철의 삼각지의 좌측인 철원지역을 계속 장악하게 되었다. 1954년 6월 25일 정부는 김경진 소령에게 1계급 특진과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했다.[자료출처 : 국가보훈처, 인천보훈지청 현충시설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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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상덕 경감, 국립대전현충원 10월의 현충인물 선정
국립대전현충원(원장 권율정)은 고상덕 경감(1962∼2009)을 10월의 현충인물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고상덕 경감은 2009년 12월 12일 전일 교통근무로 힘들어 하는 부하 직원을 대신해 파주시 탄현면 자유로 서울 방향 오금교 위에서 과속단속을 벌이다 과속차량에 치여 순직했다. 정부는 고상덕 경감의 공적을 인정하여 경위에서 경감으로 1계급 특진, 옥조근정훈장과 경찰공로장을 추서했으며 국립대전현충원 경찰관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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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의 독립운동가, 고운기 선생
2017년 9월의 독립운동가 고운기 선생은 만주와 중국 대륙을 누비며 광복군으로 활약했다. 고운기 선생은 1907년 함경남도 문천에서 태어났다. 본명 공진원, 고운기는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에서 신분을 숨기기 위해 사용한 이름이다. 고운기 선생은 1942년 임시정부 활동 중 병을 얻어 1943년 37세로 운명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고운기란 이름으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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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의 전쟁영웅, 김용식 육군 일등병
2017년 9월의 전쟁영웅으로 선정된 인물은 기계-안강지구전투와 안강 시가지전투에서 용감하게 북한군에 맞서 싸웠던 김용식 육군 일등병입니다. 1950년 8월부터 9월까지 전개되었던 기계-안강지구전투는,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던 기계와 안강 등지에서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한 전투입니다. 1950년 6.25전쟁 발발 이후, 국군은 상대적인 전력의 열세로 북한군에 밀려 낙동강선까지 후퇴하였습니다. 이에 국군과 유엔군은 8월 초부터 마산-왜관-영덕에 이르는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하여 방어태세에 임했는데요. 당시 군 지휘부는 기계-안강지구전투 과정에서 군사적 요충지인 비학산을 탈환하고자 김용식 육군 일등병이 소속되어 있던 부대에 습격 임무를 내렸습니다. 당시 김용식 일등병은 국군 수도사단 17연대 소속으로 부대에 배치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병이었지만, 고참병들도 두려워하는 돌격작전에 자원하였습니다. 비록 전투 경험은 거의 없었으나, 그는 조국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용기로 침투대열의 선봉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습니다. 김용식 일등병은 적 경계병을 신속히 처치하고 기습사격과 과감한 수류탄 투척으로 적 진지를 초토화시켰으며, 적 군관 1명을 포함한 15명을 생포하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치명적인 타격을 받은 북한군 제766 유격부대는 해체되었습니다. 이후에도 김용식 일등병의 활약은 이어졌습니다. 그는 1950년 9월 19일, 안강 시가지전투에서 적에 관한 첩보를 수집하는 척후병 임무를 맡아 정찰하던 중, 북한군의 만행을 목격하게 됩니다. 의분과 정의감에 불탄 김용식 일등병은 소대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북한군 6명과 교전을 벌여 모두 사살하였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교전 도중, 김용식 일등병은 적의 탄환에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국군은 김용식 육군 일등병의 용기와 활약에 힘입어 낙동강 방어선 전투를 기점으로 반격을 개시할 수 있었습니다. 정부는 국가 수호에 혁혁한 공을 세우고 꽃다운 청춘을 바친 김용식 일등병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하였습니다. 불굴의 의지로 적과 싸우며 활약했던 김용식 육군 일등병. 우리는 그를 포함하여 낙동강 방어선에서 산화한 호국영령의 투혼을 결코 잊어선 안 될 것입니다. [자료출처 : 국가보훈처 공식 블로그 - 훈터, http://mpva.tistory.com/4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