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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의 독립운동가, ‘동제사’ 활동 「김갑·한흥교·민제호」 선생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공동으로 “일제강점기 동제사(同濟社)에 가입,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헌신한 김갑·한흥교·민제호 선생을 2022년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30일 보훈처(처장 박민식)에 따르면 동제사는 1912년 신규식 선생이 중심이 되어 상하이에서 조직된 최초의 독립운동 단체로, 상하이 한인들의 단결과 젊은 독립운동가들의 교육을 위해 박달학원을 설립하기도 했다. 부산 동래에서 출생(1889년)한 김갑 선생은 1909년 영남지역 첫 비밀 결사조직인 대동청년단에 가입해 항일운동을 했으며, 1917년 5월 베이징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상하이로 건너가 동제사에 가입했다. 동제사의 박달학원에서 교육을 받고 동제사 중견간부로 활동한 선생은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임시의정원이 수립되자 경상도 대표 의원으로 활약했으며, 임시정부에서는 교통부 위원, 군무위원회 이사, 법제위원회 위원으로서 초기 임시정부 안정화를 위해 힘을 쏟았다. 1924년 4월부터 임시정부 법무총장대리차장, 노동총판에 이어 재무장으로 활동하며 임시정부의 살림을 책임지기도 했지만, 1933년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租界)에 있는 광제의원에서 4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임시정부는 선생의 헌신에 보답하기 위해 국민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부산 동래 출생(1885년)의 한흥교 선생은 1910년 오카야마 의학전문학교를 졸업, 1911년 신해혁명(중국의 민주주의 혁명)참여를 위해 상하이로 건너가 본격적인 항일운동에 투신했다. 신해혁명 국민군 참여를 계기로 신규식 선생 등을 만나 동제사가 결성될 때부터 가입·활동했고, 항저우 의학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동제사 동지들의 의료지원을 전담했다. 이후 베이징 의학전문학교 교수로 근무 중 만주, 몽골지역의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위한 지원업무에 이어 중국 육군 군의정(현 소령)등을 거쳐 1914년 상하이로 돌아온 선생은 1916년까지 상하이, 절강성 가남지역에서 의원을 개업, 동제사를 재정적으로 후원했다. 신채호 선생과 중외통신, 신광신보 등을 간행하며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알리는데도 헌신한 선생은 1927년 국내 귀국 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만주지역 의료 활동과 함께 북경, 태원 등에서 병원을 운영하며 독립운동을 후원했다. 해방 후 귀국, 1967년 82세의 일기로 숨을 거뒀다. 민제호 선생은 서울 종로에서 출생(1890년), 한성영어학교 재학 중 국권을 빼앗기자(1910년) 항일운동 참여를 결심, 1913년 상하이로 망명해 동제사에 가입한 뒤 한중우호단체인 신아동제사에서 대외 협력업무를 맡았다.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열린 임시의정원에서 69명의 의원에 선출된 후 대한적십자회와 대한인거류민단 등 대중단체에 참여해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1929년까지 임시정부 대외업무를 수행하며 자금모집 등의 협력업무도 담당했다. 1932년 한인애국단 단원인 윤봉길 의거로 일제의 탄압이 시작되자 상하이 임시정부와 함께 항저우로 피신했지만, 곧 병을 얻어 1932년 42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감갑, 한흥교, 민제호 선생은 동제사에 가입해 항일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신 분들로, 이후 임시정부에서도 주요 임무를 맡아 조국독립을 위해 끝까지 헌신했다. 정부는 선생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김갑 선생에게 1986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한흥교 선생과 민제호 선생에게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각각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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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의 독립운동가, 한인애국단 활약 ‘안경근·이덕주·최흥식’ 선생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공동으로 일제강점기 한인애국단에서 일본군 고위 관료 처단을 위해 군사교육과 의열투쟁을 주도한 ‘안경근·이덕주·최흥식 선생’을 ‘2022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한인애국단은 1920년대 중반 이후 독립운동의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침략의 원흉인 일본군 주요 인물을 처단하기 위해 1931년 김구 선생 주도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결성된 단체이다. 31일 국가보훈처(처장 박민식)에 따르면 ‘안경근 선생’은 안중근 선생의 4촌으로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났으며, 1918년 국내에 가족 모두를 남겨두고 독립운동에 전념하기 위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했다. 선생은 1924년 중국 운남성 곤명의 운남강무학교를 졸업, 만주 정의부에 참가하고 황포군관학교 교관으로도 근무하면서 군사 인재를 양성했다. 1931년 한인애국단에서는 윤봉길의사 의거 이후 일제의 독립유공자 탄압을 피해 김구 선생 신변을 보호했다. 선생은 1926~27년(황포군관학교 교관), 1934년(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황포군관학교 전신)에 걸쳐 조국 독립을 위해 꼭 필요한 군사인재를 양성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선생으로부터 교육을 받은 졸업생들은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대 창설의 핵심 세력이 되어 무장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이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에서 군사위원회를 조직(1937년 7월), 선생은 군사위원으로 선임되어 항일운동을 펼쳤다. ‘이덕주 선생’은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나, 20세에 조국 독립을 위해 단신으로 상하이로 망명했다. 이후 대한교민단 산하 의경대, 상해한인독립운동청년동맹, 상해 한국독립당, 상해 한인청년당에 가입하여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던 중 1932년 3월, “조선총독을 처단해야 한다”는 김구 선생의 지령을 받고 황해도 신천에 도착했다. 일본 경찰의 경계가 삼엄해 김구 선생에게 도움을 요청, 김구 선생은 유진식을 국내로 파견했다. 그러나, 유진식과 함께 조선총독 처단 의거 준비를 하던 선생은 평소와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을 수상히 여긴 신천경찰서 경찰에 의해 체포, 취조 중 조선총독 처단 계획이 발각되면서 의거는 불발됐다. 선생은 1932년 7월 해주지방법원에서 ‘살인예비, 치안유지법, 총포 화약류취체령 위반’으로 징역 7년형을 선고 받았다. ‘최흥식 선생’은 서울에서 태어나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각종 행상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다 20세에 귀향, “큰 포부와 위대한 뜻을 품고 죽음으로써 3천만 백성을 고통과 압박에서 구해낼 생각”을 갖고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 망명을 결심했다. 선생은 상해 도착 후, 윤봉길 의사가 취직했던 종품공사에서 1931년 12월부터 3개월 정도 근무하던 중, 한인애국단 숙소를 사용하면서 한인애국단과 인연이 시작됐다. 선생은 “1932년 5월 26일부터 30일까지 리튼(Lytton) 조사단(만주사변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국제연맹이 영국의 리튼을 위원장으로 하여 파견한 조사위원회)이 대련에서 현지 조사 일정이 있는 만큼, 국제적인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대련에 있는 관동군 사령관, 남만주철도 총재 등 일제 고위 관료를 처단해야 한다”는 김구 선생의 지령을 받았다. 선생은 1932년 5월 26일 오후 7시 40분, 리튼(Lytton) 조사단 일행이 대련역에 도착한다는 사실을 확인, 대련으로 나오는 관동군 사령관과 남만주철도 총재를 유상근과 함께 처단하기로 했다. 만약 의거가 실패할 경우, 조사단이 대련을 떠나 다음 행선지로 이동하는 5월 30일 오전 9시 두 번째 의거도 계획했다. 하지만, 선생이 대련의거 준비 과정에서 중국 상해로 보낸 전보를 상하이 주재 일본총영사관에서 의심하여 수취인(곽윤-김구 선생이 편지 등을 통해 주요 정보를 주고받을 때 사용하는 이름)을 확인한 뒤, 관동청에 발신인 체포를 요청하면서 거사일 이틀 전 일본경찰에 의해 체포, 의거를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선생은 대련법원에서 징역 10년 형을 선고 받고, 여순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들 세 분의 선생은 한인애국단 소속으로 특수정보를 수집하여 의열투쟁을 지원했고, 본인의 안위보다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초개(草芥)같이 버리신 분들이다. 정부는 선생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안경근 선생에게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이덕주 선생은 1990년, 최흥식 선생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각각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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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의 독립운동가, 근우회의 창립을 주도하고 항일운동을 전개한 ‘박원희·김영순·조복금’ 선생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공동으로 민족 통합적 여성단체인 근우회 창립을 주도하고 민족차별에 맞서 항일운동을 전개한 박원희·김영순·조복금 선생을 ‘2022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근우회는 신간회 자매단체로 민족계와 종교계, 사회주의계의 여성을 통합하여 ‘한국 여성의 단결, 지위향상 및 항일운동’을 위해 조직된 단체로, 일제의 탄압에도 각종 강연회나 토론회를 통해 여성계몽활동, ‘광주학생운동’ 등 여학생운동 지원 및 여성 근로자 임금 차별 철폐 등의 지원활동을 전개했다. 29일 보훈처(처장 황기철)에 따르면 박원희 선생은 대전에서 태어나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3년간 유학 후 귀국, 1924년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주의 여성단체인 ‘여성동우회’를 조직하고 활동했다. 이후 1926년, 근우회 탄생의 밑거름이 되었던 중앙여자청년동맹을 조직한 뒤, 선생을 포함한 각계각층의 지식 여성 40명이 발기인단이 되어 1927년 4월 26일 개최된 근우회 발기총회에서 21명의 준비위원에 선임되었다. 1927년 5월 27일 YMCA 강당에서 회원 150명, 방청인 1,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된 근우회 창립총회에서 집행위원(21명)으로 선출된 선생은 근우회 집행위원회 교양부원으로 활동했다. 교양부 활동의 핵심은 여성들의 교양을 위한 강연 활동과 계몽운동이었다. 특히, 1927년 10월 ‘특수환경에 처한 조선여성의 사명’이라는 주제로 진행된 강연에서 일제의 경제 침탈과 조선의 대책 마련을 촉구하던 중 일본 경찰에 의해 중지당하고 경찰서에 연행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김영순 선생은 서울에서 태어나 정신여학교를 졸업했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1919년 결성된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에 가입, 서기에 선임되어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조직 간부가 조선인 경찰에 밀고하여 1919년 11월 일본 경찰의 조사로 실체가 드러나면서 체포되어 1920년 2월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박원희 선생과 함께 근우회 발기총회에서 준비위원, 근우회 창립총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회원모집 역할을 수행하여 근우회 전국 60여 개의 지회 설립에 기여했다. 또한 근우회 집행위원회 교양부원으로 편집부와 학생부 설립 운영, 근우회 선전일의 책자 제작·보급, 근우회 지회 설치를 위한 강연회 활동 등을 통해 여성의 지위 향상과 조국의 독립을 위해 힘썼다. 조복금 선생은 1911년 하동에서 태어나 진주여자잠업강습소를 졸업, 1928년 3월 하동청년동맹여자지부 정기대회에서 서무재정부 역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그해 7월 하동지회 설립을 주도하여 서무재정부를 맡게 되었다. 1929년 3월 제2회 정기대회에서 대의원으로 선출되어 정치연구부를 맡아 활동했으며, 1930년 4월 근우회 하동지회의 전국 대의원에, 6월에는 하동청년동맹 집행위원 겸 여자부장으로 선출되는 등 하동지역의 여성운동과 항일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그러나 1931년 일제의 직·간접적인 탄압으로 중앙 근우회가 해체되면서, 하동지역 근우회도 자연스럽게 해체되었다. 이후 선생은 부산에 있는 조선방직회사 직공이 되어 노동항일운동에 참여했고, 1931년 6월 ‘노동자(勞動者)’라는 신문과 격문을 인쇄하여 각 공장의 노동자에게 배포했다. 이 사건으로 부산경찰서에 연행되었고, 8월에는 일명 ‘부산적색노동조합협의회’ 사건으로 송치되어 ‘출판법, 보안법,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이들 세 명의 선생은 당시 차별적인 여성문제를 인식하고 ‘여성 지위향상’이라는 한국근대여성운동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했으며, 일제의 탄압과 민족적 차별에 맞서 투쟁한 대한민국 여성의 상징이었다. 정부는 선생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박원희 선생은 2000년, 김영순 선생은 1990년, 조복금 선생은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각각 추서하였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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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의 독립운동가, 신민회 주역인 ‘안태국 선생’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공동으로 안태국 선생을 ‘2022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처(처장 황기철)에 따르면 안태국 선생(1877∼1920)은 신민회 활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만주(북간도 혼춘)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으며, 3․1만세운동 이후 상하이로 와서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나, 1920년 4월 고문 후유증 등으로 병사하였다. 신민회는 1907년 4월, 안창호의 발기로 양기탁, 이동휘, 유동열 등 7인의 창건위원과 노백린, 안태국, 이시영, 이회영, 신채호, 박은식 등이 중심이 되어 서울에서 조직된 비밀결사 단체로, 1910년경 회원수가 800여 명에 달할 정도로 당시의 영향력있는 애국계몽가들을 거의 망라한 국권회복운동 단체이다. 1877년 평안남도 중화(현재 평양 부근)에서 태어난 선생은 1907년 안창호, 양기탁, 노백린, 신채호 등과 함께 애국계몽운동 단체인 신민회를 조직하고, 최고위 간부인 평안남도 총감(평양이 속해 있어 서울 총감 다음의 직위로 신민회에서 세력이 막강했음)에 임명되어 1911년 해체 시까지 4년여간 국권 회복에 힘썼다. 당시 신민회 기관지 역할을 한 「대한매일신보」 평양지사장을 겸임하던 선생은 1909년 애국계몽운동을 활발히 전개하기 위해 태극서관(서적의 출판과 보급을 목적으로 설립된 서점)을 설립하였고, 신민회의 외곽조직인 청년학우회 발기인으로 초대 총무에 선임되었다. 일제가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거 이후 신민회 간부들을 탄압하기 시작하자, 신민회에서는 지역 총감이 참석하는 전국 간부 회의를 통해 독립운동 근거지를 해외에 건설하기로 하고 군자금과 이주민 모집사업을 실행하였다. 1910년 11월 ‘안명근 사건(일명 안악사건, 안명근 등이 황해도에서 무관학교 설립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된 사건)’ 조사 과정에서 신민회가 간도에 독립군 기지와 무관학교 설립을 계획하고 있다는 단서를 잡은 일제는 이를 저지하려고 신민회 간부들을 체포하였는데, 이때 선생도 보안법 위반으로 붙잡여 1911년 7월에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일제는 이 사건을 ‘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사건(일명 105인 사건, 이하‘음모사건’)’으로 조작하여 전국에 걸쳐 신민회 간부 600여 명을 검거하여 기소하였는데, 선생도 복역 중 가혹한 고문을 당하며 재 기소되어 1912년 9월에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선생은 공판 중에 정확한 기억과 물증까지 제시하며 음모사건이 날조된 것임을 논리정연하게 폭로하여 일제 재판부를 궁지에 몰아넣는 완강한 공판투쟁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1913년 7월 항소심에서 징역 6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그리고 투옥된 지 5년 만에 석방된 선생은 가혹한 고문과 감옥 생활로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1916년 가족들을 이끌고 북간도 혼춘으로 이주하여 새 근거지를 마련하고 독립운동을 다시 시작하였다. 선생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혼춘지방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고 후배들과 한민회를 창립하였고, 그 산하에 결사대원을 모집하여 한민회군을 창설하였다. 이후 한민회군은 청산리전투에도 참가하여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선생은 안창호의 초청으로 1920년 3월 상하이 임시정부로 갔으나, 임시정부의 요직은 고사하고 북간도 지역 독립운동에 매진할 뜻을 밝혔다. 안창호가 이를 받아들여 선생을 대한민국임시정부 특파원으로 임명하여 파견하는 것으로 결정하였으나, 애석하게도 1920년 4월 46세를 일기로 고문 후유증 등으로 병사하고 말았다. 선생의 장례식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거행되었고, 상하이 인근 외국인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문화대혁명기에 만국공묘(1910∼1930년대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들이 안장되었던 묘지)로 이장되었다. 정부는 조국 독립을 위해 위국헌신한 선생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한편, 만국공묘에 안장되었던 선생의 유해는 1993년 8월, 광복 48년 만에 박은식․노백린․신규식․김인전 선생과 함께 대한민국으로 봉환되어, 서울현충원 현충문 앞에서 각계인사, 외교사절, 시민 등 6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국민제전으로 영결식을 거행하고 애국지사묘역에 모셔졌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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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의 독립운동가, 군산 3·5만세운동을 주도한 ‘이두열·고석주·김수남·윌리엄 린튼 선생’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공동으로 호남 최초 만세운동인 군산 3·5만세운동의 주역인 ‘이두열·고석주·김수남·윌리엄 린튼 선생’을 ‘2022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28일 국가보훈처(처장 황기철)에 따르면 군산 3·5만세운동은 호남지역 최초의 만세운동으로 당시 만세운동에 참여한 인원만 3만 7,000여 명에 달하였고, 사망 및 부상자 등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을 뿐 아니라 이후 전북 곳곳에서 28회에 걸쳐 만세운동이 일어나게 된 촉매제 역할을 하였다. 3․1운동 소식을 들은 영명학교 교사 이두열 선생과 구암교회 부속여학교 교사 고석주 선생은 호남지역 최초로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고, 만세운동이 이루어진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우선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예수병원에 근무하는 직원들, 교회 신자들, 선생들에게 교육을 받아 민족의식을 가졌던 학생들의 독립만세운동 참여를 이끌어냈다. 거사일을 3월 6일 장날로 잡고 학생들과 함께 영명학교에서 비밀리에 독립선언서 수천장을 인쇄하는 등 차근차근 준비하던 만세운동은 거사 직전, 낌새를 눈치챈 일본 경찰의 급습으로 두 분의 선생과 학생들이 체포, 연행되면서 거사가 좌절될 위기에 처했다. 그 순간, 이를 본 학생간부 등은 긴급회의를 열어 3월 6일로 예정되어 있던 만세운동을 3월 5일로 앞당겼다. 학생, 예수병원 사무원, 교회 신자들은 함께 남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뿌리며 만세를 외쳤고, 거리에 있던 많은 인파가 이 대열에 합세하여 체포된 교사와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군산경찰서까지 나아갔다. 위기를 느낀 일본 경찰은 익산에 주둔하던 헌병대까지 동원하여 만세운동 참가자들을 탄압하였고, 이두열 선생은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죄로 징역 3년을, 고석주 선생도 같은 죄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모진 고초를 겪어야 했다. 당시 노동일에 종사하던 김수남 선생은 동료 이남률 등과 함께 일제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독립운동에 방해가 되는 친일교육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영명학교의 3·5만세운동 이후 군산공립보통학교 일본인 교장과 교사들의 학생 감시와 단속은 더욱 심해졌고, 이런 가운데 3월 14일 학생 70여 명이 동맹하여 연서로 퇴학원을 제출하며 항거했다. 일본인 교장과 교사들은 학부형을 소환하여 끈질긴 회유와 협박으로 이를 방해하였다. 이를 지켜본 선생은 독립운동에 방해만 되는 친일학교인 군산공립보통학교를 불태워 버리기로 결심했다. 선생은 이남률과 3월 23일 밤 11시에 학교에 들어가 건물 동남쪽 출입구에서 불을 붙였고, 맹렬히 타들어가 학교 건물 1개 동을 전소시켰다. 친일교육의 상징이던 군산공립보통학교를 불태워 조국독립의 열망을 표현했던 선생은 방화죄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모진 옥고를 치렀다. 영명학교에서 교육선교를 시작했던 윌리엄 린튼 선생은 미국으로 돌아가 일제의 잔학한 식민통치와 한국인들의 저항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한국독립의 필요성과 지원을 역설하였다. 1912년 22살의 최연소 나이에 선교사로 한국에 온 선생은 교육선교 1년 만에 한국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여, 한글로 성경을 가르치고 영어도 가르쳤다. 1917년 전임 선교사가 한국을 떠나면서 선생은 영명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선생은 군산 3·5만세운동 당시 교사들과 학생들의 준비를 묵인하고 은밀히 지원도 하였다. 하지만 일제가 군산에서 발생한 만세운동 참가자를 잔혹하게 탄압하고 고문하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이후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돌아간 선생은 애틀랜타에서 남장로교 평신도 대회에서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 애틀랜타 저널에 ‘한국인들이 어떻게 자유를 추구하는지에 대한 애틀랜타인의 증언’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의 상황을 기고하는 등 지속적으로 한국독립의 필요성과 지원을 주장하였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전주 신흥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던 선생은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신흥학교가 폐교하기에 이르렀고, 선생도 1940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되었다. 군산 3·5만세운동은 영명학교 교사들과 학생들이 계획하고 노동계와 종교계가 조직적으로 전개한 전 민족적, 전 민중적 운동으로 자주독립을 꿈꾸는 우리 민족의 염원과 저항정신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정부는 선생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이두열 선생과 고석주 선생에게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김수남 선생에게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그리고 윌리엄 린튼 선생에게는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각각 추서하였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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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의 독립운동가, 좌우통합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한 ‘강기덕 선생’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공동으로 ‘강기덕
선생’을 ‘2022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28일 국가보훈처(처장
황기철)에 따르면 ‘강기덕 선생’은 3·1운동을 시작으로 신간회에 이르기까지 국내에서 다양한 독립운동을
했고, 광복 이후에도 남북분단을 막기 위해 노력하는 등 평생 조국을 위해 헌신하신 분이다.
선생은 1886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났으며,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48명 중의 한 명(학생대표, 보성법률상업학교
재학 중)으로 독립선언서를 각 학교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2차
시위(3월 5일)에서
깃발을 흔들며 군중의 선두에서 만세를 부르다 일경에 체포되어 1년 6개월
옥고를 치렀다.
1921년 11월 만기 출소하여 고향인 원산에서 인쇄업에 종사했으나, 1924년 3월경 원산 보광학교 3·1운동 5주년
기념 인쇄물을 제작하며 3·1운동 정신을 계승하고자 했다.
또한 선생은 조선농민의 참담한 현실을 강조하며 경작제도의 문제를 개선하여 농민들의 수입증진을 위한 연설을 했다는
이유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일경에 체포되어 6개월 옥고를 치렀다. 출소 후 선생은 신간회 원산지회 발기인회에 참여하여 설립준비위원과 상무위원을 맡았고, 1927년 7월 11일
신간회 원산지회 설립대회에서 간사로 선임되었다.
‘신간회’는 1927년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세력이 합작한 좌우연합 항일 독립운동 단체로, 일제강점기
가장 규모가 컸던 사회운동 단체이다.
선생은 신간회 활동을 하면서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대책 마련과 신문지법 중단을 촉구하였고, 소작쟁의에 관한 불량지주의 죄악 조사를 요구하는 함남기자 연맹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8개월을 선고받기도 했다.
1929년 11월 만기
출소하여 원산지회 지회장에 선임된지 얼마 되지 않아, 원산 학생들이 일으킨 일제 반대 시위에 연루되어 1930년 2월 또다시 구속되었다가 풀려났다.
1931년 이후 선생은 원산노동조합 간부로서 노동조합의 재건 운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1933년 또다시 징역 1년 2개월 옥고를 치렀고, 1935년 만기 출소했다.
광복 이후에는 신탁통치 반대 국민총동원 위원회 중앙위원을 맡아 통일정부수립을 위해 노력하였지만 안타깝게도 꿈을
실현시키지 못하였고, 6·25전쟁 중 납북되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강기덕 선생에게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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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의 독립운동가, 제주해녀항일운동을 주도한 ‘부춘화·김옥련·부덕량’ 선생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공동으로 부춘화·김옥련·부덕량 선생을 ‘2022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지난 31일 국가보훈처(처장
황기철)에 따르면 이번에 선정된 세분의 선생은 1931~1932년에
걸쳐 제주도 일대 해녀들을 중심으로 일제와 해녀조합의 수탈과 착취에 항거한 제주해녀항일운동을 주도한 분들이다.
‘제주해녀항일운동’은 일제강점기
여성들이 주체가 된 민족운동으로, 연인원 1만 7천여 명이 참여한 제주도 최대 항일운동이다. 일제의 부당한 경제적
차별과 수탈, 그리고 억압에 저항한 조직적인 투쟁으로써, ‘법정사항일운동’, ‘조천만세운동’과 함께 제주 3대
항일운동의 하나로 꼽힌다.세분의 선생 모두 제주도 구좌면(현,
구좌읍) 출생으로, 부춘화 선생은 15세에, 김옥련 선생은 9세에, 부덕량 선생은 13세에 가족 생계에 보탬을 위해 어린 나이에 해녀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제주도의 토지는 척박하여 여성이라면 해녀 생활을 하지 않으면 살아가기 어려웠고, 근대 교육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러나 선생들은 1928년부터
1931년까지 하도보통학교 야학강습소에서 함께 공부하고 근대 항일·민족의식을 깨우치기 시작했다.
1930년 해녀조합의 우뭇가사리 해조류 부정판매에 항의하던 하도리
청년들이 일제 경찰에 검거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하도리 해녀들도 함께 저항하기 시작하였다.
이듬해인 1931년 12월
일제의 해녀 착취에 항의하기 위해 세분은 하도리 해녀 회의에서 대표로 선출되었다.
1932년 1월 12일은 제주시 구좌면 세화리 장날이자, 제주도사(현, 제주도지사) 겸 해녀조합장이 부임 후 순시하러 구좌면에 오는 날에 하도리 해녀들을 포함한 제주 일대 해녀들이 호미와 비창(전복을 따는 도구)을 휘두르며 시위를 시작했다.
특히, 세분의 선생은 해녀들을 규합하며 시위에 앞장섰고, 모든 해녀 투쟁 참여자를 대표하여 “도사의 조합장 겸직 반대, 일본 상인 배척” 등의 요구조건 관철을 위해 제주도사와 직접 협상했다.
이러한 과정에 위협을 느낀 제주도사는 요구조건을 5일 내에 해결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제주도사가 돌아간 이후 일제는 무장경찰을 출동시켜 1월 23일부터 27일까지 34명의
해녀 주동자들과 수십명의 청년들을 체포했다.
세분의 선생은 경찰에 체포되어 미결수로 수 개월간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어 고초를 겪었고, 안타깝게도 부덕량 선생은 고문 후유증으로 몸이 극도로 쇠약하여 28세
나이로 사망했다.
정부는 선생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부춘화 선생에게 2003년 건국포장을, 부덕량 선생에게는 2005년 건국포장을 각각 추서했으며, 김옥련 선생에게 2003년 건국포장을 수여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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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의 독립운동가, 이인정·송재만·한운석 선생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공동으로 '이인정·송재만·한운석 선생'을 '2021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국가보훈처(처장 황기철)에 따르면 선생들은 대호지면·정미면(현 당진시)에서 일제에 맞서 민·관이 하나 되어 주도면밀하게 준비하고 다양한 계층이 적극적으로 참여한 4·4 독립만세운동의 주역들이다. 선생들은 고종의 국장과 3․1독립만세운동을 목격하고 내려온 대호지면 유생들과 협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실행하는 일을 주도적으로 수행했다. 먼저, 이인정 선생(1859~1934)은 대호지면 면장으로 만세운동 준비를 전반적으로 지휘했으며, 송재만 선생(1891~1951)은 만세운동을 위해 작성한 도로 수선 공문을 면내 8개 마을 이장 집을 직접 방문해 전했고 마을 주민들에게 만세 내용을 안내했다. 도호의숙에서 학생을 가르치던 한운석 선생(1884~1950)은 만세 계획과 애국가 작사를 요청받은 후 그 자리에서 애국가를 작사하고 참여계획을 논의했다. 4월 4일 대호지면 면사무소 앞에 집합한 면민 400~500명에게 이인정 선생은 “도로 수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조선독립운동을 위해 모이게 한 것이다.”라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천의시장으로 향해 가자”라고 연설했다. 그리고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하며 적극적으로 만세운동을 지휘했다. 송재만 선생은 사전에 준비한 태극기를 꺼냈고 애국가가 적힌 인쇄물을 배포했다. 그리고 오전 11시경 천의시장에 도착해 시장 일대와 천의경찰관주재소, 정미면사무소 등을 행진하면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일본 경찰들은 오후가 되어 귀가하려는 민중들에게 태극기를 탈취하려고 시도했고, 군중들은 저항하며 돌을 던지고 일경을 구타하며 격렬하게 저항했다. 이러한 일경의 검거 및 탄압으로 이인정, 송재만 선생 등이 체포되는 등 1차로 17명이 검거를 당했다. 계속된 탄압으로 군인과 경찰에 의해 200여 명 이상이 검거되어 고초를 겪었고, 그중에서 재판에 54명이 회부 됐다. 이인정, 한운석 선생은 1920년 2월 7일 상고 기각으로 징역 1년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고, 송재만 선생도 같은 날 상고 기각으로 징역 5년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조직적이고 대규모로 일어난 만세운동으로 인해 일제의 탄압도 극렬하여 순국 3명, 태형 88명, 불기소 65명, 면소 4명, 징역 39명 등 199명이 처벌을 받았으며, 이에 2020년까지 총 124명이 독립유공자로 서훈 됐다. 당시, 만세운동에 참여한 남상락(‘90, 애족장) 선생이 부인 구홍원 선생과 같이 하얀 명주 천에 색실로 자수를 놓은 태극기를 사용했다. 이후 이 자수 태극기는 국가등록문화재 386호로 등재됐고, 2021년 3월의 독립운동가 홍보 포스터에도 반영되었다. 정부는 선생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이인정·송재만·한운석 선생에게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각각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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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 이달의 충북여성독립운동가, 한말 최초의 여성 의병 대장 '윤희순' 선생
【중앙보훈방송=신경호 기자】 충북도는 금년 2월부터 그동안 역사에서 소외되었던 충북여성독립운동가 열 분의 삶과 발자취를 기리기 위하여 매월 도정소식지와 SNS를 통해 한분씩 소개한다고 밝혔다. 먼저, 이달의 충북여성독립운동가로 충북 중원군(현재 충주)이 본적인 한말 최초의 여성 의병 대장 윤희순 선생의 삶을 소개한다. 윤희순 선생은 1895년 시아버지 유홍석이 의병을 일으켰을 때 여성들을 모아놓고 “나라를 구하는 데에는 남녀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며 여성들의 의병활동을 촉구했다. 1907년 일본이 한국군대를 해산하고 고종 강제퇴위를 진행하던 때 유홍석 등이 의병을 모아 일본군과 전투를 하였고, 이때 윤희순은 군자금을 모으는 동시에 무기와 탄환을 제조·공급하는 탄약제조소를 운영하기도 했다. 나아가 여성 30여 명으로 여성의병대를 조직하는 한편, 《안사람 의병가》등 8편의 의병가를 작사·작곡하고, 4편의 경고문을 제작·배포하는 등 여성들의 의병활동을 이끌어내는데 적극 앞장섰다. 1911년에는 중국 만주로 이주하여 에 가입하는 등 항일운동을 지속하였고, ‘노학당’과 조선독립단학교를 설립하는 등 군사교육을 통해 학생들을 애국투사로 길러내고자 했다. 꽃다운 삶을 광복을 위해 바친 그는 40년 이상 지속된 일제의 핍박속에서 아들 유돈상이 일제의 고문으로 순국한지 11일 만에 향년 76세의 나이로 이역만리에서 눈을 감았다. 오랜 활동에도 사진과 자료는 많이 남아있지 않지만, 그가 쓴 “의병가사집”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한글로 쓰여진 노랫말은 그의 강한 항일정신과 애국심을 떠올리게 한다. 충북도는 독립에 대한 열망 하나로 민족의 아픔을 끌어 안은 채 불꽃 같은 삶을 살다간 여성독립운동가 중 충북에 연고가 있는 열 분을 기리는 반신상을 제작하여 충북미래여성플라자 내에 전국 최초로 충북여성독립운동가 전시실을 조성해 지난해 8월부터 개관·운영하고 있다. 또한 충북도는 이번 3.1절에 충북여성독립운동가 열 분의 반신상과 주요행적을 예술의전당에 전시할 예정이다. 한편, 온라인 전시실을 통해서도 충북의 여성독립운동가 16명에 대한 인물별 소개와 동영상자료, 가상(VR)전시관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신경호 기자 rudgh973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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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의 독립운동가, 권쾌복·배학보·유흥수 선생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공동으로 ‘권쾌복·배학보·유흥수 선생’을 2021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29일 국가보훈처(처장 황기철)에 따르면 권쾌복(1921~2009)·배학보(1920~1992)·유흥수(1921~2016) 선생은 대구사범학교 내의 비밀결사인 ‘다혁당 (茶革黨) 사건’의 주요 인물들이다. 다혁당은 항일운동 역량을 하나로 결집하기 위해 대구사범학교 전 학년이 참여하는 단체를 만들기 위해 결성됐지만, 5개월 만에 일제에 발각되어 본격적인 활동은 하지도 못하고 와해됐다. 세 명의 선생은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어려운 가정 형편과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 모습에 매료되어 1937년 4월에 대구사범학교 심상과 9기생으로 입학했다. 그러나 민족차별 교육이 자행되던 학교에서 1939년 학생들의 노동력 강제동원과 일본과 조선학생의 마찰로 빚어진 왜관사건으로 폭발했으며 많은 대구사범학교 조선인 학생들이 본격적으로 항일운동에 뛰어드는 원인이 됐다. 세 명의 선생은 왜관사건 이후 조선 역사와 문학 관련 서적, 잡지 등을 읽고 시국에 관한 의견을 나누는 모임인 ‘백의단’을 결성했으며, 이후 다혁당으로 발전했다. 1940년에 감시와 통제가 심해지고, 그해 11월 23일 유흥수 선생은 독서회 참가자들과 일제 식민지로부터 벗어나 독립할 것을 목표로 하는 비밀결사인 ‘문예부(文藝部)’를 결성했고, 『학생(學生)』 이라는 잡지를 만들어 학생들에게 배부했다. 또한 다가올 독립에 대비할 목적으로 학문 분야를 연구하여 실력을 양성하는 또 하나의 비밀결사인 ‘연구회(硏究會)’가 조직됐다. 1941년 2월 중순 유흥수 선생은 권쾌복 선생과 배학보 선생 등을 만나 역량을 결집하기 위해 통합된 비밀결사 조직인 ‘다혁당(茶革黨)’을 결성했다. 다혁당은 조직 체계에서 당수와 부당수를 두고, 총무, 문예, 예술, 운동부 등 4개 부서를 두고 기존의 활동을 계승했으며, 특히 문예부 산하에 문예창작부와 연구부를 두었는데, 이전의 ‘문예부’와 ‘연구회’를 계승한다는 의미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권쾌복 선생은 당수를 맡았으며, 배학보 선생은 부당수를 맡고, 유흥수 선생은 문예부 산하 문예창작부 책임을 맡았다. 이렇게 통합되어 활발한 활동을 준비하던 다혁당은 갑작스러운 사건이 발생했다.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활동하던 정현이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내용이 발각되어 1941년 7월에 일제 경찰에 체포됐다. 수사과정에서 다혁당 활동이 발각되어 다혁당은 결성된 지 5개월여 만에 일제 경찰에 와해됐다. 이후 대규모 검거 열풍이 불어 1941년 12월에 35명이 재판을 받았는데, 이 시기 비밀결사 사건으로서는 가장 큰 규모였다. 다혁당 사건은 지식인들이 변절하고 항일운동이 침체 된 시기에 벌어진 운동으로, 조선의 독립을 확신하고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교육운동이자 민족운동으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정부는 선생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권쾌복 선생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배학보 선생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유흥수 선생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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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출신 2021년 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고사만 선생
【중앙보훈방송=오천지창조 기자】 제주특별자치도보훈청이 제주 출신 2021년 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고사만 선생’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제주보훈청에 따르면, 고사만(1908.10.23.~1962.10.13.) 선생은 제주 구좌 종달 1941 출생으로 제주도에서 해녀들의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투쟁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1927년 사회주의를 받아들이고 혁명적 농민조합 결성을 위해 활동했다. 1930년 그는 문도배·신재홍 등과 혁우동맹(革友同盟)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한 후 농민부·청년부·소년부·여성부를 편성하여 분야별로 계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사유재산제도와 일본제국주의를 부인하는 사회주의 선전에도 나섰다. 조선공산당 제주 야체이카 조직 등에 나선 고사만은 혁우동맹을 해소시키고 농민단체와 해녀조합 결성을 주도했다. 이런 가운데 제주지역에서는 민족적 열기와 식민체제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어 갔다. 1931년 1월 제주에서는 해녀들에 대한 불합리한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투쟁이 일어났다. 관제적인 해녀어업조합에 반대하고 있던 해녀들은 1천여 명의 시위대로 일경에 맞섰다. 이때 고사만은 해녀들의 항일운동 배후지도자로 지목되어 일경에 붙잡혀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재판이 지연되는 가운데 1년 10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오천지창조 기자 oh-5004-o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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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의 독립운동가, 기우만·박원영·김익중 선생···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반발하여 1896년에 일어난 호남지역 의병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공동으로 ‘기우만, 박원영, 김익중 선생’을 ‘2021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에 따르면 기우만(1846~1916)·박원영(미상~1896)·김익중(1851~1907) 선생 모두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반발하여 1896년에 일어난 호남지역 의병들이며, 호남지역 유학자인 노사 기정진(奇正鎭)의 학맥을 계승하여 서양 및 일제의 국내정치 개입을 거부하고 왕을 보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장성,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먼저, 조부 기정진의 영향을 받은 기우만 선생은 전남 장성 탁곡에서 출생했으며, 자는 회일(會一), 호는 학정거사(學靜居士)·송사(松沙) 등이다. 선생은 1896년 2월 장성향교에서 최초로 호남의병을 일으켰다. 장성, 나주에서 기반을 다진 선생은 광주에서 대규모로 의진(義陣)을 결집하여 회맹(會盟)을 하고 서울로 북상할 계획을 세웠으나, 국왕의 해산 조칙으로 1896년 봄을 전후하여 해산했다. 선생이 일으킨 의병은 단발령의 철폐와 일제 축출, 개화 정책의 반대, 옛 제도의 복구 등을 내세웠다. 또한 왕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인 체제를 유지할 것을 주장했으며, 의병해산 후에는 의병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해 1909년「호남의사열전」을 집필하여 의병의 활약상을 상세히 정리했다. 다음으로 박원영 선생은 전남 광주에서 출생했으며, 자는 주옥(周玉), 호는 포류재(蒲柳齋)이다. 강직한 성품과 기개를 타고난 선생은 노사 기정진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이름을 알렸다. 선생은 기우만 선생이 의병을 일으키자 바로 달려가 참여했고 나주에서 광주로 이동한 장성의병의 실무를 주관했으며, 의병이 해산된 이후 진위대에 체포되어 처형됐다. 또한, 김익중 선생은 전남 장성 맥동에서 출생했으며, 선생 또한 노사 기정진의 가르침을 받았고 사람 간의 의리를 중요하게 여겼다. 1896년 봄 기우만 선생이 의병을 모으자 무장을 강화하기 위해 평소에 교류가 있던 포수들의 참여를 독려했고, 자신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나주와 광주를 오가며 활약했다. 이후 정미조약으로 전국적인 의병 봉기가 일어나자 1907년 기삼연 선생을 중심으로 한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에 참여했다. 회맹소 의병들은 거점을 마련하려 고창읍성을 공격하여 점령했고, 선생은 고창읍성을 탈환하려는 일제의 습격에 맞서다 전사했다. 정부는 선생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기우만 선생에게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 박원영 선생에게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 김익중 선생에게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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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의 독립운동가, 윤창하 선생 선정···광주학생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항일정신 일깨워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공동으로 광주학생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항일정신을 일깨운 ‘윤창하 선생’을 2020년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에 따르면 윤창하 선생(1908.4.9.~1984.12.29.)은 전남 해남 출신으로 독서회 활동과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하여 항일정신을 일깨웠다. 선생은 1926년 광주고등보통학교(이하 ‘광주고보’)에 입학해 광주고보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28년에 동맹휴학이 일어나자, 적극 동참했다.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광주중학교(일본인 학교) 학생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생 박기옥(朴己玉)을 밀친 것을 발단으로,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났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3․1운동 이후 가장 크게 전국으로 확산된 대중운동이었으며 학내 문제에 그치지 않고 식민지 교육문제, 일제 식민정책에 대한 저항에서 나아가 민족독립, 민족해방을 제기한 총체적 민족운동이었으며, 1920년대에 축적된 민족역량을 전국 규모로 분출했다는 점에서 국내 민족운동의 역량을 집약적으로 보여준 것이었다. 선생은 1929년 11월 3일 광주고보 시위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독서회 중앙부와 광주고보 독서회의 간부로 활동했다. 11월 3일 체포되어 1930년 5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시위운동으로 금고 4월에 집행유예 5년, 1931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독서회 활동으로 징역 2년을 각각 언도받았다. 두 번째 판결로 인해 앞의 집행유예 판결이 취소되어 총 2년 4월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선생은 옥고 후유증으로 일제강점기나 광복 이후에도 특별한 사회활동을 하지 못하다가 1984년 77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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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의 독립운동가, 유도발·유신영 선생 부자(父子)···일제의 식민지배에 맞서 대를 이어 자결로 항일정신 일깨워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공동으로 일제의 식민지배에 맞서 대를 이어 자결로 항일정신을 일깨운 ‘유도발·유신영 선생’ 부자를 2020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처(처장 박삼득)에 따르면 유도발(1832.6.~1910.10.음력)·유신영(1853.6.~1919.3.) 선생 부자는 풍산이 본관인 서애 유성룡의 10세, 11세 후손이다. 두 부자는 충효를 가업으로 삼아 경술국치와 광무황제 고종의 서거를 당해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아버지는 나라에 대해 의리를 실천했고 아들은 나라와 아버지에 대해 충효를 실천했다. 두 분의 자결은 일제의 식민지배에 맞선 항일투쟁의 일환으로, 그 죽음은 개인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남은 이들의 항일정신을 일깨워 독립운동에 나서게 만드는 울림이 됐다. 먼저, 부친 유도발 선생은 1910년 8월 29일 일제에 의해 강제병합이 체결되자, 일제의 지배에 놓인 세상을 차마 살아갈 수 없다며 1910년 11월 11일 단식에 돌입했다. “종사가 망해 장차 남의 나라의 백성이 되겠으니 남은 해가 얼마 없는데 구차하게 살기를 도모하는 것은 욕된 일이 아닌가? 이후로는 다시 음식을 나에게 권하지 말라”는 유서와 함께 명정(銘旌)에 ‘대한처사(大韓處士)’로 써 줄 것을 부탁했다. 명정은 죽은 사람의 관직이나 이름을 적은 기(旗)로, 선생이 대한처사로 써 달라고 한 것은 죽어도 영원히 대한제국의 선비임을 천명한 것이다. 1910년 11월 27일 단식 17일째, 선생은 향탕으로 자신의 몸을 깨끗이 씻고 죽음을 맞이했다. 그 죽음은 일제의 강제병합에 대한 강력한 항거로, 사람들에게 항일정신을 일깨웠다. 아들 유신영 선생은 선대의 가업을 철저히 익히고 항일 인사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면서 학문과 사상을 넓혀나갔다. 1895년 유인석 의진과 1896년 권세연 의진에 참여하여 적극적인 의병활동을 전개했으며, 이는 선생의 문집 『하은유고(霞隱遺稿)』의 「행장」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919년 1월 광무황제(고종)가 서거하자 친일파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나는 나이가 많아 일할 수 있는 힘이 없다. 마땅히 목숨을 바쳐 나라의 원수를 갚겠다.”라고 하면서, 선생이 할 수 있는 투쟁 방법은 죽음 뿐이라며, 1919년 3월 3일 독약을 마시고 자결했다. 그의 죽음은 대를 이어 일제에 투쟁한 것으로, 남은 이들에게 맞서 싸울 것을 촉구하는 항일투쟁의 울림이 됐다. 정부는 두 분 공훈을 기리기 위해 유도발 선생에게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유신영 선생에게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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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의 독립운동가, 박영희 선생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공동으로 ‘박영희 선생’을 ’2020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29일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 이하 보훈처)에 따르면 박영희(1896.12~1930) 선생은 신흥무관학교 교관, 북로군정서 학도단장 등을 역임하면서 독립전쟁의 영웅들을 배출했으며, 김좌진 장군의 부관으로 청산리전투에 참여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끈 숨은 주역으로 민족의 교관·군사 전략가이다. 선생은 충청남도 부여군 출신으로 1913년 휘문의숙에서 신학문을 배우던 중 은사인 이세영을 따라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에 입교하여 군사 지식을 배웠으며, 졸업과 동시에 교관으로 임명되어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1920년에는 북로군정서의 사관연성소 학도단장과 김좌진 장군의 부관으로 일하면서 독립전쟁의 영웅들을 배출하는 한편 청산리 전투에 참전했다. 한편, 북로군정서는 사관연성소 출신으로 이루어진 만주 독립군 부대 가운데 가장 훈련이 잘된 정예부대로,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만주 길림성 화룡현 청산리 지역에서 일제와 벌인 전투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뒀다. 또한, 청산리전투는 일본군의 간도 침입 작전을 완전히 차단해 만주지방에서 독립운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했으며, 이를 통하여 국내 독립운동도 우회적으로 지켜주면서 조국의 독립에 대한 확신과 독립정신을 고양시켰다. 선생은 청산리 전투 이후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러시아 연해주로 이동하였으나, 자유시참변 이후 다시 만주로 돌아와 1922년에는 북로군정서 부사령관으로 활동했다. 1923년 9월에 중국 상하이에서 창간된 국한본문 잡지 「배달공론」에 〈군사학 강의〉를 두 차례 기고하는 등 군사지식을 보급하는 일에도 힘썼다. 이후 신민부에서 보안사령관을 맡아 총사령관인 김좌진 장군을 최측근에서 보좌했으며, 성동사관학교 교관으로 신민부의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여 항일 투쟁을 전개했다. 1926년 김좌진 장군의 밀명으로 항일운동의 군자금을 협조받기 위해 블라디보스톡에 파견되어 활동 중 1927년 러시아 첩보기관에 체포됐으며, 1930년 연해주 고루지게에서 순국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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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출신 2020년 9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최태유’님
【중앙보훈방송=오천지창조 기자】 제주특별자치도보훈청이 제주 출신 2020년 9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최태유’님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청에 따르면, 최태유(1874~미상)님은 1918년 제주에서 법정사(法井寺) 무력항일시위에 선봉집사(先鋒執事)로 참여하여 일본인 관리를 축출하고 주재소를 공격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18년 음력 3월경 법정사의 승려 김연일은 방동화·강민수·장임호 등과 제주 내 일본인 관리와 경찰을 추방하기로 결의했다. 이어 9월 14일경 모여 10월 7일 시위를 일으켜 제주 읍내로 들어가 각지의 일본인 관리를 쫓아내고, 불교도와 법정사 부근의 농민 등을 규합하기로 결정하였다. 최태유는 1918년 9월 14일 이후 같은 달 말까지 법정사에 머무는 동안, 강창규·김삼만·김봉화·양남구·강봉환 등과 함께 김연일의 계획에 참여하기로 하고, 각 리(里)에 배포할 격문을 준비했다. 이어 제주도 좌면(左面) 영남리(瀛南里)로 들어가 서호리(西好里)·호근리(好近里)에서 공포를 발사하며 준비한 격문을 배포하였다. 선봉대장 강창규 등은 좌면 중문리(中文里) 경찰관주재소를 공격하기로 하고, 강정리(江汀里)·도순리(道順里)·하원리(河原里)에서 수백 명의 참가자를 모집하여 중문리로 집결했다. 이때 최태유는 선봉집사로서 강창규를 도와 시위대를 지휘하다 체포되었다. 1919년 2월 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이른바 소요(騷擾), 보안법(保安法) 위반 및 방화죄로 징역 4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4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오천지창조 기자 oh-5004-o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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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의 독립운동가, 채원개 선생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공동으로 ‘채원개 선생’을 2020년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31일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에 따르면 채원개(1895.3.24~1974.2.16) 선생은 청년시절 3․1운동을 시작으로 독립군과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을 거쳐 광복군에 이르기까지 무장투쟁의 긴 여정을 통해 조국의 독립에 헌신했다. 무장으로서 강인한 기개를, 때로는 중재자로서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실천하였으며, 광복 이후에도 군에 투신하여 대한민국의 기초를 닦은 독립운동가이자 군인이었다. 선생은 평안남도 영원 출신으로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개신교 계열의 의명소학교를 졸업하고, 21세에 조선보병대에 입대하여 평생 걷게 되는 군인의 삶을 시작했다. 이후 고향에서 3·1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되었으나 탈옥하여 북만주로 이동하는 중에 유하현 삼원포에서 대한독립단 총단장인 조맹선을 만나 그의 부탁으로 대한독립단 군사교관으로 활동했다. 1920년 일본이 독립군 세력을 대대적으로 토벌하자 대한독립단 통임관구 지대장으로 열세인 병력과 물자로 일본군과 격돌하여 관통상을 입은 끝에 철수했다. 1921년 통의부 대표로 김창환·심용준 등과 함께 상해로 파견되어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였고, 이후 상해에서 임시정부 활동에 참여했다. 1923년 3월 한국노병회 특별회원에 선임되었고, 심용준과 함께 분열되는 임시정부의 단합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6월에는 낙양군관학교에서 기병과에 입학하여 체계적인 군사학을 배웠으며, 중국 군벌의 내전에도 참여하여 본격적인 실전 경험을 쌓았다. 1925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육군 주만 참의부 군무부장에 임명되어 정의부와 참의부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만주로 건너가 직접 지도자들을 만나 갈등을 봉합하고 성공적으로 중재했다. 1927년 황포군관학교 교관으로서 제대로 된 군사양성 기관이 없이 무장투쟁하던 조선인들에게 체계적인 군사교육을 실시했다. 1934년에는 광동 주재 중국군에 복무하면서도 한국독립당 광동지부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도 지속적으로 참여했다. 이후 광주에서 중국군으로 재직시 동산백원을 임시정부의 임시청사로 제공하고 아세아 여관을 임시정부 요인 및 가족들의 숙소로 이용하는 데 기여하는 등 임시정부를 측면으로 지원하였다. 1940년 광복군에 합류하여 참모처장, 1943년 총무처장등을 역임하며 후방에서 지원하는 역할을 하였으나 1944년에는 광복군 제1지대장에 부임하여 전면에 나서 광복군을 지휘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광복군 제1지대를 이끌고 광복군으로 귀국하려 했으나, 미군정이 광복군의 입국을 거절하고 개인 자격으로 입국만을 허락하여 부대를 해체하여 부하들을 먼저 귀국 시킨 뒤 1946년 상하이에서 선편으로 귀국했다. 귀국 후 육군사관학교에서 훈련을 마친 뒤 제3연대 작전참모로 부임한 이후 제3여단장, 제2사단장을 역임했고 1949년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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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의 독립운동가, 이석영 선생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공동으로 이석영 선생을 ’2020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31일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에 따르면 이석영(1855~1934) 선생은 1855년 서울에서 출생했으며, 1885년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다. 선생은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관직에서 물러나 재야에 머물다가 1910년 동생 이회영(’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이시영(‘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등 6형제와 일가족 전체가 독립군 기지 개척 등 독립운동을 위해 전 재산을 처분하여 서간도로 망명했다. 선생의 재정지원으로 1911년 서간도에 한인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가 설립되었으며, 농업개발, 민족교육, 군사교육을 실시하여 구국인재를 양성, 무장항일 투쟁을 전개하고자 하였으나 1911년과 1912년 연이은 대흉년으로 심각한 재정난에 부딪히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선생이 기부한 자금으로 신흥무관학교 전신인 신흥강습소가 설립되어 1911년 6월 서간도 삼원포 추가가(鄒家街)에서 개교식를 가졌다. 이곳에서 1920년까지 3,5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으며, 만주에서 조직된 독립군의 근간을 이루며 독립전쟁사에 찬란한 자취를 남겼다. 1912년 신흥강습소가 신흥학교로 개편되면서 주변의 권유로 선생이 교장을 맡았는데 선생이 독립운동에서 직함을 가진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를 통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꺼리는 선생의 성품을 알 수 있다. 특히, 이러한 선생의 재정적 후원이 없었다면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의 탄생은 어려웠을 것이다.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친 선생은 노후에 끼니조차 잇기 힘든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다 1934년 상하이 빈민가에서 생을 마쳤다. 독립운동은 집안의 희생과 몰락을 각오하고 나서야만 했던 가시밭길이었다. 그러나 그 길을 마다하지 않았던 선생과 6형제들의 삶과 자취는 독립운동의 정의와 양심이 무엇인가를 역사에 남긴 표상이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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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의 독립운동가, 강혜원 선생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공동으로 ‘강혜원 선생’을 ’2020년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에 따르면 강혜원(1885.11.21.~1982.5.31.) 선생은 1885년 11월 21일 평양에서 출생하였고, 자녀들의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어머니 황마리아를 따라 1905년 5월 하와이로 이주하였다. 그곳에서 삯바느질을 하여 학비를 벌었으며 1913년 4월 어머니와 함께 호놀룰루 대한인부인회를 조직하면서 한인부인운동을 시작했다. 1919년 3월 올케 강원신을 비롯하여 한성선, 한영숙, 한신애, 김경애 등과 함께 신한부인회(新韓婦人會)를 조직하고 총무로 선임되었다. 신한부인회는 동포들의 자유정신 고취, 한국 후원, 대한인국민회에 의무금을 납부하는 한인여성단체였다. 그리고 각지에 흩어져 있던 부인회를 통합하여 1919년 8월에 대한여자애국단을 창립하고 선생은 총단장으로 선임되었으며, 1920년 2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통해 군자금 500달러를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1921년 4월 28일 대한여자애국단 총부 위원들과 함께 「여자애국단 경고서」를 발표하고 단비(團費) 수납을 촉구했다. 선생은 시간당 15센트씩 벌면서도 매월 3달러씩 단비(團費)를 냈으며, 이렇게 어렵게 모은 돈을 선생을 비롯한 대한여자애국단 단원들은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후원금을 송금했다. 이후에도 부인회를 통해서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지원했으며 1940년 1월, 1941년 2월, 1941년 12월 대한여자애국단 총부 단장으로 3번이나 선임되어 3년간 활동했다. 이처럼 선생은 임시정부와 대한인국민회의 재정을 적극 지원했고, 미주 내 한인 동포 자녀들에게 민족교육운동을 실시하는 등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쳤다. 해방 이후에도 재미한인전후구제회(在美韓人戰後救濟會)와 함께 본국에 구제품을 보내기도 했으며, 1982년 5월 31일 별세하여 로스앤젤레스 로즈데일(Rosedale) 공동묘지에 계시다가 2016년도에 남편과 함께 유해봉환되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한편, 선생을 비롯한 가족 모두가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어머니 황마리아(1865~1937)는 하와이 한인사회 여성운동의 선구자로서 2017년 애족장에, 남편 김성권(1875~1960)은 하와이 한인 한인단체인 한인합성협회, 흥사단 등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하여 2002년 애족장에 추서되었으며, 동생 강영승(1888~1987)은 미주한인사회 최초로 법학박사 학위을 취득한 인물로 대한인국민회, 신한민보 등에서 민족운동에 헌신 2016년 애국장에, 올케 강원신(1887~1977)은 선생과 함께 미주 한인사회 부인운동을 통한 독립운동에 헌신한 공로로 1995년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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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의 독립운동가, 임병극 선생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공동으로 ‘임병극 선생’을 2020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에 따르면 임병극(1885~미상) 선생은 1885년 평안도에서 출생하였으며 1917년 고향을 떠나 북간도(北間島)로 망명하여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일원으로 북간도에서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대한국민회가 만든 항일무장활동 기관인 국민회군의 제2중대장에 임명되어 독립전쟁의 최일선에서 활동했다. 국민회군과 함께 북간도에 근거지를 구축하고 항일무장활동을 펼치던 독립군단들은 효과적인 항일전을 위해 1920년 5월 22일 북간도 독립군 연합체인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를 탄생시켰으며, 북간도의 여러 독립군단 소속의 독립군 유격대는 수시로 국내진입전쟁을 전개해 일제 침략자들을 응징했다. 1920년 6월 4일 독립군 유격대는 국내로 진입하여 일본군 헌병 순찰대를 격파하는 큰 전공을 세운 후, 6월 6일 대한북로독군부 주력부대가 주둔해 있는 왕청현(汪淸縣) 봉오동(鳳梧洞)으로 향했다. 봉오동은 마치 삿갓을 뒤집어 놓은 모양의 지형으로 들어 올수 있는 입구가 하나였고, 나머지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외부의 공격을 방어하기에는 최적의 요건을 갖춘 요새지로 오늘날에는 그 지형의 이점을 살려 봉오저수지가 축조되어 있는 곳이다. 1920년 6월 7일 홍범도 사령관의 공격 신호탄에 따라 일제히 일본군을 공격하였으며, 대한북로독군부 피복과장이면서 국민회군의 2중대장이었던 임병극 선생도 부하 독립군을 독려해 적극적인 공격을 실시하여 봉오동 전투 승리에 기여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발표한 결과에서 일본군 사망자 157명, 중상자 200여명, 경상자 100여명이었으나, 독립군은 전사자 4명, 중상자 2명뿐으로 독립군의 완승이었다. 이로 인해, 봉오동전투는 침략자 일제에게 한민족이 기필코 조국광복을 달성하리란 증표를 보여준 독립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선생은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에도 참여하여 전승을 거두었으며, 이후 1921년 안도현에서 의용대를 조직하여 군자금을 모집하고 일제의 기관을 기습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923년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연해주 민족운동계 및 고려혁명군 대표자격으로 참가하였다. 선생은 북간도에서 의열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1924년 2월 8일부터 10일까지 3일간 적기단(赤旗團)·북로군정서의 인사들과 회합을 가졌다. 이후 선생에 대한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돈화(敦化)와 연길을 왕래하며 지하활동을 이어갔다. 선생의 이 같은 활동은 중국군에 포착되어 1924년 9월 연길현 숭례향 대명월구(大明月溝)에서 부하 5명과 함께 체포되어,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