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년 5월의 독립운동가, 유찬희‧유기석‧유기문 선생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공동으로 유찬희·유기석·유기문 선생 삼부자(三父子)를 ‘2020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에 따르면 유찬희(1884.8.8~1930.2.13) 선생은 1883년 8월 8월 황해도에서 태어나 배재학당에서 수학하였으며 슬하에 딸 둘과 아들 둘을 두었다. 장녀는 신덕(信德), 차녀는 신영(信永)이고 장자는 기석(基石), 차남은 기문(基文)이다.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과 1907년 고종황제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을 보면서 항일의식과 민족의식을 형성하였으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인재를 길러야 한다는 생각에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등에서 교육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3년 북간도에서 한인 자치단체인 간민회 등에 참여하여 한인의 식산흥업과 국적취득 등 권익을 옹호하고, 교육과 언론을 통해 한인을 계몽하였다. 1919년 3월에는 독립운동단체의 통일체로서 간도지역 항일민족운동단체인 대한독립기성총회를 조직하였다. 또한 1920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인상무총회를 설립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위한 자금을 모집하였으며, 대한국민회에서 무장투쟁과 자금을 지원하였다. 1923년 12월에 중국 돈화현에서 조선독립을 위한 항일사상을 고취하는 동성노농공사의 간사로 활동하였다. 이후, 선생은 블라디보스토크, 연해주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펼쳤으나 위암으로 1930년 귀국하여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별세하였다. 장남 유기석(1907.1.12~1980.11.27) 선생은 1930년 4월 상하이에서 유자명(柳子明) 등과 아나키즘 단체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을 결성하고 의열투쟁을 촉구하였다. 같은 해 6월 선생은 천진에서 대한독립당주비회 기관지 『한국의 혈』의 고문으로 활동하며, 안창호의 유일정당 운동인 대독립당(大獨立黨) 결성운동을 후원하였다. 1938년 김구(金九)와 협력하여 일본 군함 출운환(出雲丸)호 폭침(爆枕)과 상하이지역 일본 책임자 곡정지(谷正之) 공사의 암살을 시도하였다. 1943년 조선민족혁명당에 입당하여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으며, 1944~1945년 남경(南京)에서 광복군(光復軍) 징모 제3분처 대장으로 광복군 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 선생은 광복 후 중국 남통학원, 강소사범학원 등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학을 양성하였으며 1980년 별세하였다. 차남 유기문(1910~미상) 선생은 1931년 11월 무력 투쟁단체이자 남화한인청년연맹의 의열투쟁 조직인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 결성에 주도적인 참여하여 의열투쟁에서 많은 역할을 하였으며, ‘천진(天津) 폭탄 의거’와 ‘육삼정(六三亭) 의거’, ‘변절자에 대한 숙청’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선생은 1935년 5월에 흑색공포단원 엄순봉과 이규호와 함께 친일 상하이 거류민회장 이용로와 친일파 옥과빈을 처단한 사건에 참가하였다. 이 사건에 선생은 체포되지 않아 소재불명(所在不明)으로 기소 중지되었으며, 이후 선생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한편, 정부에서는 세 분의 공훈을 기리어 유찬희 선생에게는 201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유기석 선생에게는 200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유기문 선생에게는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
2020년 4월의 독립운동가, 오광선·정현숙 선생 부부···독립군 부부에서 광복군 가족으로 독립전쟁에 투신하다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이 공동으로 ‘오광선·정현숙 선생 부부’를 2020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처에 따르면 오광선(1896.5.14~1967.5.3) 선생은 1896년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나 1913년 삼악학교를 졸업한 후 이웃 마을 출신 정현숙(이명 정정산) 여사와 결혼했다. 독립운동에 큰 뜻을 품은 선생은 1914년 서울로 올라가 종로에 있는 상동(尙洞)청년학원에 입학하였으나, 총독부의 지속적인 탄압과 재정난으로 1915년 문을 닫게 되자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건너갔다. 1918년 신흥무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동흥(東興)학교 군사교관과 체육교사로 재직한 후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서 독립군 양성에 헌신하였다. 1920년 12월 대한독립군단(총재 서일, 부총재 홍범도·김좌진·조성환, 부대원 약 3천 5백여 명) 중대장에 임명되었으며, 1930년 7월 이청천과 홍진 등이 중국 위하현에 결성한 한국독립당의 의용군 중대장으로 활동하였고, 1934년 2월에는 중국 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교관으로서 군관 양성 활동에 매진하였다. 이후 김구 선생의 지시로 1936년 북경으로 파견되어 첩보활동을 벌이던 중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신의주 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1945년 11월 귀국하여 ‘대한국군준비위원회’, ‘광복청년회’, ‘대동청년단’에 참여하였으며, 1948년 12월 육사 8기로 입교하여 이듬해 육군대령으로 임관하였고 전주지구위수사령관을 지낸 후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또한 정현숙(1900.3.13~1992.8.1) 여사는 1919년 남편을 따라 만주로 망명하여 화전을 일구며, 남의 집 일을 해주고 받은 품삯으로 생활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독립군의 뒷바라지에 헌신하여 ‘만주의 어머니’로 불리었다. 1941년 한국혁명여성동맹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44년에는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임정 활동에 참여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부부의 두 딸 오희영, 오희옥 선생(생존 애국지사) 역시 1939년 2월 조직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가담하여 선전활동에 참여한 것은 물론, 광복군에 입대해 초모(招募)공작 등에 활약하였으며 사위(오희영의 남편 신송식)까지 독립운동에 투신한 독립운동가 가문이다. 정부는 두 분의 공훈을 기리어 오광선 선생에게는 1962년 독립장을 수여하였고, 정현숙 선생에게는 1995년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
2020년 3월의 독립운동가, 김세환 선생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이 공동으로 김세환 선생을 2020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28일 보훈처에 따르면 김세환(1889.11.18.~1945.09.26.) 선생은 수원에서 출생하고 청소년시기에 교회에서 선교활동과 함께 교육과 구국활동을 펼치는 인물들의 지도를 받으며 성장했다. 이들의 영향으로 교육가 및 독립운동가로서 꿈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선생은 독립을 위한 신(新)학문의 중요성을 깨닫고 한성외국어학교를 졸업 후 일본 주오대학(中央大學)에서 유학했다. 1909년 말경 귀국하여 수원상업강습소(현 수원중·고)와 삼일여학교(현 매향여중·고)에서 교사로 활동하며 후진양성을 위해 지역사회의 중추적 인물을 배출하고 민족의 진로를 모색하는데 앞장섰다. 이후, 미국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소식을 듣고 이를 독립의 기회로 삼고자 3·1운동 준비모임에 참여하였고, 민족대표 48인의 한사람으로 ‘순회위원’이란 막중한 임무를 띠고 수원지역의 3·1운동을 기획 및 지도하였다. 만세운동 참여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선생은 기개를 잃지 않았고, 법정에서는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금후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할 것인가?”라는 검사의 질문에 선생은 “그렇다”라고 간단명료하게 대답하여 독립에 대한 결연한 의지를 강하게 드러냈다. 법정에서 선생의 자세는 재판 과정을 지켜보던 한국인들에게 큰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선생은 1920년 10월 30일 경성지방복심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석방되었다. 선생은 1920년대 초부터 추진되던 민립대학설립운동에 수원지역을 대표하여 참여하였고 신간회 수원지회장에 선출되었으며, 박선태·김병호 등과 함께 수원체육회를 결성하여 수원지역의 민족운동을 조직적으로 강화하고자 했다. 1939년 폐교 직전의 위기에 빠진 삼일학교를 구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으며 1941년에는 수원상업학교를 설립하여 해방되기까지 교육에 힘썼던 선생은 1945년 9월 26에 숨을 거두었으며, 개인묘지에 묻혔던 선생의 유해는 1968년 국립묘지로 안장되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
2020년 2월의 독립운동가, 조지 새넌 맥큔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이 공동으로 조지 새넌 맥큔(George Shannon McCune, 한국명 윤산온) 선생을 2020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처에 따르면 조지 새넌 맥큔(1873.12.15.~1941.12.04) 선생은 1873년 12월 15일 미국 펜실베니아(Pennsylvania) 주에서 태어났다. 1905년 9월에 부인과 함께 내한하여 평양선교지부에 배치되어 숭실학교(崇實學校)에 선생으로 부임하면서 한국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1909년 9월 평북 선천선교지부로 전임하여 중학교 과정인 신성학교(信聖學校) 교장을 맡게 되면서 본격적인 교육사업을 시작했다. 1911년 10월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으로 교장으로 있던 신성학교 학생과 교사들이 구속되고 본인도 105인 사건의 연루자로 알려지자, 이들의 석방과 공정한 재판을 위해 활동했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일제의 강경한 탄압 사실과 운동의 의의를 알리기 위해 직접 운동 내용을 적어 여행가는 외국인에게 편지로 맡겨 검열을 피해 미국 시카고에 있던 「컨티넨트(The Continent)」 잡지사로 보내 게재하게 하였다. 또한 3.1운동의 발판이 된 2.8 독립선언서 번역문을 오산학교 시절 인연으로 이광수의 부탁을 받아 교정해 주었고, 3.1운동의 주요 지도자로 활약한 세브란스 의전 학생인 김원벽(金元壁)을 만나 독립운동을 격려하는 등 3.1운동에 직간접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런 선생의 활동에 일제는 지속적으로 감시와 탄압을 시작했고 결국 1921년 미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1928년 다시 돌아와 평양 숭실전문학교와 숭실학교의 교장으로 재직하였다. 1930년부터 일제는 모든 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고 선생이 있는 숭실학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선생은 기독교 사목과 목적에 맞지 않는다면서 계속 거부의사를 표명하며 일제의 탄압에 맞섰다. 결국 1936년 1월 18일자로 기독교의 교리와 양심상 자신이 신사참배를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학생들에게도 참배를 시킬 수 없다고 최종 서면으로 답변함으로써 그날로 숭실학교 교장과, 1월 20일 숭실전문학교 교장 직위를 취소당했다. 1936년 4월 선생은 안식년을 이유로 미국으로 돌아갔고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에서 강연과 논설 등을 지속해 나갔다. 또한 재미 유학생 단체인 북미대한인학생회(The Korean Students League of North America) 자문위원을 맡아서 계속 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을 이어 나갔고, 1941년 12월 4일 시카고 장로회병원에서 사망했다. 선생은 위와 같이 외국인으로서 3․1운동 지원, 신사참배 거부 운동 등 한국의 독립과 한국인 인재양성에 헌신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
제주 출신 2020년 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김삼만님
【중앙보훈방송=오천지창조 기자】 제주특별자치도보훈청이 제주 출신 2020년 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김삼만님’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청에 따르면, 김삼만님(1864.~미상)은 1918년 제주 법정사에서 조직된 의군(義軍)의 후군대장(後軍大將)으로 일본인 관리 축출과 주재소 공격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의군은 1918년 음력 3월경 제주도 한라산 서남(西南) 임록(林鹿)에 소재한 법정사의 승려 김연일이 방동화·강민수·정구룡·김인수·김용충·장임호 등과 제주 내 일본인 관리와 경찰을 추방하기로 결의하면서 조직되었다. 김삼만은 1918년 9월 법정사에서 강창규·김봉화·양남구·최태유·강봉환 등과 함께 의군에 참여하기로 하고, 곤봉과 각 리(里)에 배포할 격문을 준비하였다. 같은 해 10월 김연일은 장임호는 모사(謀師), 강창규는 선봉대장(先鋒隊將), 양남구는 중군대장(中軍大將), 김삼만은 후군대장, 김봉화·최태유는 선봉집사(先鋒執事)에 지명하였다. 김삼만 등 시위대는 수백 명의 참가자를 모집하여 중문리로 집결한 뒤, 경찰관주재소 건물에 불을 놓아 소각하였으나, 서귀포 경찰관주재소 순사들에게 공격을 당하여 흩어졌다. 김삼만은 1919년 2월 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이른바 소요 및 보안법 위반, 방화죄로 징역 4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4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오천지창조 기자 oh-5004-oh@naver.com]
-
제주 출신 2020년 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강붕해(강성건)님
【중앙보훈방송=오천지창조 기자】 제주특별자치도보훈청이 제주 출신 2020년 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강붕해(강성건)님’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청에 따르면, 강붕해(강성건)님(1915.01.23.~2006.01.09.)은 제주(濟州) 사람으로 천주교 신자이던 그는 1938년 겨울 서귀포 천주교회의 아일랜드인 선교사 나 신부(羅神父:본명 토마스 다니엘 라이언)에게, "대정면(大靜面) 모슬포(慕瑟浦)의 해군비행장에서 비행기가 발진하여 중국의 상해(上海) 남경(南京) 방면을 도양폭격(渡洋爆擊)하고 있는데, 아마도 비행장 지하실에 폭탄을 저장해 두고 있는 모양이다"라고 말함으로써 군사시설에 관한 정보에 제공했다. 또한 1939년 9월경에도 나 신부에게 "중국군 비행기가 전라남도 목포(木浦)에 폭격하러 왔다가 일본 해군기에 의해 격추되었다"고 말했고, 1941년 9월경에는 "중국에 출정하고 있는 일본군은 숫자가 적고, 오히려 다수의 군대는 소련 및 영미와 일전을 벌이려고 대기 중이다"라는 내용의 말을 하였다. 이 무렵 일제는 제주도를 중국에 대한 도양폭격의 발진기지로 만들면서 도내 반일세력을 색출 제거코자 하여, 우선 적성국(敵性國)인 영국 국적의 아일랜드인 선교사들과 그들이 소속된 천주교회 조직을 탄압 파괴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그 또한 위의 발언들을 통해 군사기밀을 유출하고 유언비어를 유포했다는 이유로 1941년 말에 나 신부 등과 함께 일경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그 후 1942년 10월 24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국방보안법 및 군기(軍機)보호법 위반으로 징역 1년과 육·해군형법 위반으로 금고(禁錮) 10월이 병합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오천지창조 기자 oh-5004-oh@naver.com]
-
2020년 1월의 독립운동가, 정용기 선생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이 공동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정용기 선생’을 2020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처에 따르면, 정용기(1862.12.13~1907.09.02) 선생은 경북 영천 출신으로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제의 침략 책동이 노골적으로 드러나자 고종은 시종관(侍從官) 정환직을 불러 의병을 일으킬 밀지(密旨)를 내렸고, 부친 정환직은 고종의 밀지를 받들어 그날 관직에서 물러났다. 부친 정환직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가 1906년 1월경 ‘영천창의소’를 설치하고, 권세가(勸世歌)를 지어 일본인들이 들어와 문명과 종사가 무너지는 것이 을사 5적들 때문임을 지탄하고, 충성심 있는 의사들이 의병을 일으켜 역적들과 왜적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 대한독립만세의 기치를 들고 모두 함께 의병으로 나설 것 등을 호소하였다. 1906년 영남지역에서 1,000여 명의 의병이 모였으며 선생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진호를 ‘산남의진(山南義陣)’으로 정하고 부대를 편성하였다. 선생은 신돌석 의진과 연합작전을 펴기 위해 진군하던 중 경주 진위대 간계로 대구감옥에 수감되어 4개월간 고초를 겪고 석방되었다. 그 사이 선생의 구속으로 구심점을 잃은 병사들은 상당수는 떠나버렸고, 남은 군사들도 사기가 크게 떨어져 해산하기에 이르렀다. 4개월 동안의 고초와 시달림으로 몸을 안정시키고 있던 때에 대구에서 대구 광문사 사장 김광제, 부사장 서상돈 등이 국채보상운동을 일으켰다. 이 운동은 순식간에 전국적으로 퍼져나갔고, 경북지역에서도 고령·성주·김천·상주 등 여러 지역에서 여러 관련 단체들이 조직되어 동참하였다. 영천지역에서는 ‘영천군 국채보상단연회’가 조직되었으며 선생은 회장으로 취임하여 영천지역 국채보상운동을 이끌었다. 선생은 1907년 4월 의진을 다시 결성하여, 청하·영천·청송 등지로 진군하면서 일본군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여 적군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후 관동으로의 북상 준비 및 각 지대와의 연락을 위해 각지로 의병들을 파견한 뒤, 본진 병력 150여 명을 이끌고 청하군 죽장으로 이동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다가 1907년 9월 주요 의병들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선생이 전사한 후 부친 정환직이 의진 총수를 맡았으나 일본군 영천수비대에게 잡혀 대구로 압송 중 영천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
제주 출신 2019년 1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고영호님
【중앙보훈방송=오천지창조 기자】 제주특별자치도보훈청이 제주 출신 2019년 1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고영호님’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청에 따르면, 고영호님(1920.12.16.~2004.02.24.)은 제주도 북제주 사람이다. 일본 대판(大阪)중학 졸업 후 1943년 동지 윤병윤·김규성 등과 민족의식 고취, 독립국가 건설을 서약하고 「조선독립청년당」을 조직하여 활동했다. 동년 4월 명치(明治)대학 재학 중 이러한 활동내용이 일경에 탐지되어 피체되었으며, 1944년 1월 28일 대판(大阪)지방재판소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했다. [오천지창조 기자 oh-5004-oh@naver.com]
-
2019년 12월의 독립운동가, 윤봉길 의사···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공동으로 ‘윤봉길의사’를 2019년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처에 따르면 윤봉길(1908.6.21.~1932.12.19.) 의사는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서 태어났다. 1927년 〈농민독본(農民讀本)〉 3권을 저술하여 한글교육 등 문맹퇴치와 민족의식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1928년에는 부흥원(復興院)을, 1929년에는 월진회를 설립하여 농촌계몽운동을 실시했다. 1930년 3월 의사는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 生不還, 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이라는 비장한 글을 남긴 채 정든 가족을 뒤로하고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이후, 중국 상해에서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 의열투쟁의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던 중 “1932년 4월 29일 일왕(日王)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을 일본군의 상해사변 전승 축하식과 합동으로 상해 홍구공원(虹口公園)에서 거행할 예정이다”라는 ‘상해 일일신문‘의 보도를 접하고 의거를 결심했다. 의거 3일 전 1932년 4월 26일에, 의거가 개인적 차원의 행동이 아니라 한민족 전체의사를 대변한다는 점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백범 선생이 주도하던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가입했다. 의거 당일 1932년 4월 29일 홍구공원에는 수많은 인파가 운집하였고 경계가 삼엄한 가운데, 단상 위에는 시라카와(白川) 대장과 해군 총사령관인 노무라(野村) 중장, 우에다(植田)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重光),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河端), 상해총영사 무라이(村井) 등 침략의 원흉들이 도열해 있었다. 오전 11시 40분경 축하식 중 일본 국가 연주가 거의 끝날 무렵, 의사는 앞사람을 헤치고 나아가 단상 위로 수통형 폭탄을 던졌고, 폭탄은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을 내고 식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 의거로 시라카와 대장과 가와바타 거류민단장은 사망하고 노무라 중장은 실명, 우에다 중장 등은 중상을 입었다. 그 결과로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특히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일개 조선 청년이 해냈다”고 감격해 하며, 임시정부에 대한 중국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이어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다시 독립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체포된 의사는 가혹한 고문 끝에 1932년 5월 25일 상해 파견 일본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이후 일본 오사카로 호송된 뒤 1932년 12월 19일 가나자와(金澤) 육군형무소 공병 작업장에서 십자가 형틀에 매어 총살, 25세의 젊디젊은 나이로 순국했다. 의사의 유해는 일제에 의해 버려졌고, 광복 후인 1946년에야 조국에 봉환,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
2019년 11월의 독립운동가, 박은식 선생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공동으로 ‘박은식 선생‘을 ’2019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처에 따르면, 박은식 선생(1859.09.30.~1925.11.01.)은 1859년 9월 30일 황해도 황주군 남면에서 태어나, 1898년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에서 문교 분야의 간부로 활동했으며, 독립협회가 강제해산당한 후에 경학원의 강사, 한성사범학교의 교사 및 서북협성학교와 오성학교 교장을 맡아 교육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활동하면서 많은 논설을 쓰면서 국권회복과 애국계몽운동을 벌여 나갔다. 선생은 일제의 무단탄압으로 1911년 중국 만주로 망명하여 국혼을 발흥시킬 역사서의 저술에 진력했다. 1912년에는 상해에서 독립운동단체인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여 중국의 국민혁명 세력과 연대를 모색했고,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등 한국 독립운동의 기반 조성에 주력했다. 1915년에 「한국통사(韓國痛史)」를 간행해 대외적으로는 일본제국주의 침략의 잔학성과 간교성을 폭로규탄하고, 대내적으로 민족적 통분과 적개심을 유발하면서 동포들의 각성과 반성을 촉구했다. 또한, 북경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인 신한혁명당의 결성에 참여했다. 노령의 블라디보스톡에서 1919년 3․1운동을 맞이한 선생은 육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대한국민노인동맹단을 조직하여 국내외 거족적인 독립운동에 호응했다. 그해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노령의 대한국민의회정부, 그리고 서울의 한성임시정부의 통일을 추진하여 통합 임시정부가 발족하는데 기여했다. 특히, 1920년에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간행했는데, 이는 1884년 갑신정변부터 1920년 독립군의 항일무장 투쟁까지의 일제침략에 대한 한국민족의 독립투쟁사를 3․1운동을 중심으로 기술하여 민족적 자부심과 독립투쟁정신을 크게 고취했다. 1925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그 해 8월 만주 독립군 단체인 정의부의 지도자 이상룡을 국무령으로 추천하고 스스로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1925년 11월 1일, 동포들에게 독립 쟁취를 위해 반드시 단결하라는 말을 남기고 66세를 일기로 상해에서 서거했다. 그의 유해는 1993년 8월 고국으로 봉환되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
제주 출신 2019년 1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박규훈님
【중앙보훈방송=오천지창조 기자】 제주특별자치도보훈청이 제주 출신 2019년 1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박규훈님’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청에 따르면, 박규훈님(1900.07.23.~1975.08.20.)은 제주 출생으로 1919년 3월 1일 당시 경성고등보통학교 4년생으로 서울 탑동공원에서 진행된 독립선언 행사에 참가하여 다수의 시위군중과 함께 파고다 공원을 뛰쳐나와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내를 행진하며 일군헌병과 일경의 무차별 총격에도 굴하지 않고 만세시위를 벌이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같은 해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오천지창조 기자 oh-5004-oh@naver.com]
-
2019년 10월의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이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바쳐라!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이 공동으로 ‘안중근 의사’를 ‘2019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처에 따르면 안중근 의사(1879.9.2~1910.3.26)는 1879년 9월 2일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1905년 을사늑약의 소식을 듣고 중국 상해로 건너가 산동 지방의 한인들을 모아 구국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일제의 침략 실상을 널리 알리는 외교 방책으로 국권회복을 도모했으나 1906년 부친의 별세로 귀국했다. 이후 평안남도 진남포에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설립해 교육계몽운동을 전개했고, 삼합의(三合義)라는 광산회사를 평양에서 설립해 산업 진흥운동에도 매진했다. 의사는 국외에서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독립전쟁전략을 구사하기 위해 1907년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했으며 1908년 연추(煙秋)에서 동의회라는 의병부대를 조직하고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했다. 1909년에는 동지 11명과 함께 동의단지회를 조직, 단지를 하고 구국에 헌신할 것을 맹세했다. 그러던 중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를 시찰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 침략의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파괴자인 이토를 처단할 결심을 하였다.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에게 총탄을 명중시켜 사망에 이르게 하였으며 현장에서 체포되어 여순에 있던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 송치되었다.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에 이르기까지 6회에 걸쳐 재판을 받았으나 재판은 일본인들만에 의해 형식적으로 진행되었고, 2월 14일 공판에서 일제의 각본대로 사형을 언도 받았다. 의사는 "사형이 되거든 당당하게 죽음을 택해서 속히 하느님 앞으로 가라"는 모친의 말에 따라 공소도 포기한 채, 여순감옥에서 「안응칠역사」 저술을 끝내고 「동양평화론」의 저술을 시작하면서 이것이 끝날 때까지 만이라도 사형 집행을 연기해 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일제는 이 작은 소망조차도 무시하고 사형을 집행하였고,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여순감옥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의사는 「동양평화론」에서 이토의 처단은 사사로운 감정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한국 국권의 회복과 동양평화의 회복을 위한 부득이한 조치임을 주장했다. 정부는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
제주 출신 2019년 10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한철영(한석용)님
【중앙보훈방송=오천지창조 기자】 제주특별자치도보훈청이 제주 출신 2019년 10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한철영(한석용)님’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청에 따르면, 한철영(한석용)님(1897.02.17.~1964.10.18.)은 제주 출생으로, 1919년 3월 이래로 서울 및 전국 각지에서 독립을 절규하는 함성이 울려 퍼지자 제주군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했다. 3월 15∼16일의 양일간에 걸쳐 김시은·김시범·송정왕·한백흥·김재일 등과 함께 신좌면 조천리, 함덕리 등지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벌이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같은 해 4월 26일 제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오천지창조 기자 oh-5004-oh@naver.com]
-
2019년 9월의 독립운동가, 지청천 장군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이 공동으로 ‘지청천 장군’을 2019년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처에 따르면, 지청천 장군은 1888년 1월 25일(양력 3월 7일) 서울 삼청동에서 태어났다. 장군은 1907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으나 1909년 폐교되어 일본 사관학교에 유학하여 1912년 5월 졸업할 때까지 군사학 등을 공부했다. 이후 신흥무관학교 교성대장으로 독립군 간부 및 병사 양성에 크게 기여했다. 신흥무관학교는 서간도 일대에 거주하고 있던 교포사회를 기반으로 성립한 중학과정의 독립군 양성 학교였다. 장군은 1921년 3월 한인 무장세력이 세운 ‘대한의용군 총사령부’의 참모부원으로 선출되었고 ‘대한독립단’으로 개편된 후 군사고문으로 추대되었다. 같은 해 6월 하순 홍범도·안무(安武) 등의 부대와 함께 장군 휘하 부대는 고려혁명군정의회 제3연대로 편성되었는데, 장군은 이 부대의 주요 간부 직책을 맡게 되었다. 1925년에는 남만주의 통합 독립운동 조직이자 교민 자치조직인 정의부(正義府) 군사위원장과 사령관을 겸했고, 1928년에는 만주의 유력조직인 정의부·참의부·신민부 등 3부(府) 통합운동에 노력했다. 1930년 한국독립군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중국의용군과 합세하여 주로 하얼빈(哈爾濱) 부근의 북만주 일대에서 독립전쟁을 전개했다. 특히, 1933년 6월 30일에 중국 연변의 나자구(羅子溝)에서 조선 회령으로 철수하는 일본군을 기습하여 거둔 ‘대전자대첩(大甸子大捷)’이 유명하다. 1938년 임시정부 군사학편수위원회 위원장이 되고, 1939년 10월에는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선출된 뒤 군무부장을 겸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임시정부에서는 군사부문 독립운동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는데, 장군은 그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1940년 임시정부의 정규군으로 한국광복군이 창건되어 장군은 총사령에 취임하여 해방 직후까지 한국광복군을 총지휘했으며, 환국할 때까지 중국대륙에서 중국, 미국 등과 힘을 합쳐 일제 타도와 조국광복을 위해 맹렬히 활동했다. 해방 이후에 정계에서 활약하던 장군은 1957년 1월 15일 69세로 별세했다. 정부는 장군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
제주 출신 2019년 9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김옥련 선생
【중앙보훈방송=오천지창조 기자】 제주특별자치도보훈청이 제주 출신 2019년 9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김옥련 선생’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청에 따르면, 김옥련 선생(1907.09.02.~2005.09.04.)은 북제주 출생으로, 1932년 1월 제주도 구좌면에서 해녀들의 권익침탈에 항거하는 시위를 전개했다. 1931년 해녀들에 대한 일본 관리들의 가혹한 대우와 제주도해녀조합 어용화의 폐단이 있자, 해녀들은 1931년 12월 20일 요구조건과 투쟁방침을 결의했다. 김옥련 선생은 1932년 1월 7일과 12일 제주도 구좌면에서 해녀조합의 부당한 침탈행위를 규탄하는 시위운동을 주도하고, 해녀들의 권익을 위해 부춘화 등과 함께 도사(島司) 전구정희(田口禎熹)와 담판을 벌여 요구조건을 관철시켰다. 그리고 1월 26일 경에는 제주도 민족운동가의 검거를 저지하려다 피체되어 6개월 정도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포장을 수여했다. [오천지창조 기자 oh-5004-oh@naver.com]
-
2019년 8월의 독립운동가, 김구 선생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이 공동으로 ‘김구 선생’을 2019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처에 따르면, 김구 선생(1876.08.29.~1949.06.26.)은 1876년 7월 11일(양력 8.29)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1896년 국모를 살해한 원수를 갚기 위해 일본인 스치다를 살해하고 옥고를 치렀다. 1904년 신지식인을 길러내는 애국계몽운동을 펼치기 시작했으며, 황해도 문화군 초리면(신천군 초리면)의 서명의숙(西明義塾)과 안악의 양산학교(楊山學校) 교사, 재령의 보강학교(保强學校) 교장 등을 지내며 교육 구국운동에 힘을 쏟았다. 또한 최광옥과 함께 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를 조직하여 학무총감(學務總監)에 추대되어 각 군을 돌며 계몽운동을 펼쳤다. 선생은 1910년 신민회에 가입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다 1911년 일제에 붙잡혀 징역 2년 형을 언도받았고 안명근 사건에 연루되어 15년 형이 추가되어 옥고를 치르다 1915년 가출옥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중국 상하이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 경무국장에 임명되어 일제가 보내는 첩자들을 가려내 처단하고 정부요인들과 동포들의 안정을 지켜내는 일을 수행했다. 1931년에는 임시정부가 조직한 한인애국단을 맡아 일왕 처단(이봉창), 조선총독 처단(이덕주·유진식), 관동군사령관 처단(유상근·최흥식) 등을 지휘했다. 1933년 장제스 총통을 만나 한인청년을 장교로 길러내는 길을 열었다. 뤄양(洛陽)에 있던 군관학교에 한인청년들을 장교로 길러낼 특별반을 만들었으며, 만주에서 독립전쟁을 벌이던 이청천, 이범석, 오광선 등을 초빙하여 장교 양성에 주력했다. 1940년 선생은 한국독립당의 집행위원장, 광복군 통수권자,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이 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굳건히 지키고 조국의 광복을 위해 활약했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요인 1진과 함께 환국 후 오로지 통일국가 수립을 위해 애쓰시던 선생은 1949년 6월 26일 경교장(京橋蔣)에서 안두희의 흉탄에 서거했다. 선생의 유해는 온 국민의 애도 속에 국민장으로 치러지고 효창공원에 안장됐다. 한편,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
제주 출신 2019년 8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고경수님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제주특별자치도보훈청이 제주 출신 2019년 8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고경수님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청에 따르면, 전남 해남에서 출생한 고경수님(1916.08.01.~1935.07.04.)은 1931년 3월 제주농업학교(濟州農業學校)에 재학 중, 동료 학생 10여 명이 일본인 교장의 한국인 차별정책 등에 항거하다가 퇴학 또는 일본 경찰에 의해 구속되는 사건이 벌어지자, 양공팔(梁公八)·김만제(金萬濟) 등과 함께 민족차별과 식민지교육에 항거하여 일본인 교장의 사택을 습격할 것을 결의했다. 같은 달 9일 저녁 교장의 사택으로 들어가 장작과 곤봉을 이용하여 가옥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어 1931년 9월 3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징역 9월에 집행유예 4년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
2019년 7월의 독립운동가, 이동휘 선생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광복회·독립기념관이 공동으로 ‘이동휘 선생’을 2019년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처에 따르면, 이동휘 선생(1873.06.20.~1935.01.31.)은 1873년 6월 20일 함경남도 단천에서 빈농의 아들로 출생했다. 선생은 1904년 러일전쟁 발발 이후 일본의 침략이 가속화되자, 1905년 보창학교(普昌學校)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운동에 헌신했다. 이후, 대중을 자각시켜 구국운동에 나서게 하기 위해 교육문화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기독교야말로 쓰러져 가는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종교라는 신념에서 기독교 전도활동에 힘썼다. 선생은 서북학회(西北學會)와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의 지도자로서 구국운동을 전개했으며, 1911년 3월 안명근·양기탁사건으로 일제총감부에 체포되어 인천 앞 바다에 있는 무의도에서 1년간 유배생활을 보내야했다. 1912년 6월 유배에서 해제된 선생은 1913년 2월경 압록강을 건너 북간도로 탈출했다. 선생은 북간도 한인자치기관인 간민회(墾民會)를 지도하는 한편, 북간도 각지를 순회하며 신교육 보급과 기독교전도활동을 계속하며 동포사회의 단결과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러일전쟁 10주년이 되는 1914년에는 제2의 러일전쟁 발발에 대비하여 항일광복전쟁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를 위해 선생은 만주와 러시아의 민족운동세력을 규합한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를 조직하였으며, 북간도 왕청현 나자구에 사관학교를 설립했다. 1918년, 선생은 하바로브스크에서 김알렉산드라․유동열․김립․오성묵․오와실리․이인섭 등 동지들과 최초의 한인사회주의정당인 한인사회당을 창당했다. 한인사회당은 기관지 발행, 군사학교 설립, 일본군병사들을 상대로 한 반제반전(反帝反戰)선전, 한인적위대 조직 등을 추진했다. 선생은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직에 취임했다. 선생은 안정된 체제에서 방안을 찾는 정치가라기보다는 혁명적 방법에 의해서만이 조국광복을 달성할 수 있다는 신념을 지녔던 진보적 민족혁명가였다. 특히, 조국광복을 위한 일이라면 모든 일에 앞장서서 선봉에 서고야마는 선생의 진보적 행동성과, 전통적인 권위와 사회적 제약을 과감히 개혁코자 했던 혁명성은 다른 사람들의 추종을 불허했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편,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
제주 출신 2019년 7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김남식님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제주특별자치도보훈청이 제주 출신 2019년 7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김남식님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청에 의하면, 전남 해남에서 출생한 김남식님(1919.12.30.~1989.03.03.)은 천주교 신자로서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거부했으며, 거주지인 제주도 서귀포 천주교회의 아일랜드인 선교사 나 신부(본명, 토마스 다니엘 라이언) 및 서 신부(본명, 오스틴 스위니)와 친분을 맺고 1940년 겨울경부터 수시로 중일전쟁(中日戰爭)과 영독전쟁(英獨戰爭)의 전황에 관한 얘기를 나누면서 일본 신문 방송의 보도가 거짓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1941년 7월경에는 "현재 일본은 중일전쟁을 수행하느라 상당히 약해져 있는 터에 앞으로 영미 양대국을 상대로 해서 교전하게 되면 당연히 패전할 것"이라는 발언을 하였다. 이 무렵 일제는 제주도를 중국에 대한 도양폭격(渡洋爆擊)의 발진기지로 만들면서 도내 반일세력을 색출 제거코자 하여, 우선 적성국(敵性國)인 영국 국적의 아일랜드인 선교사들과 그들이 소속된 천주교회 조직을 탄압 파괴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그는 위의 발언을 통해 근거 없는 유언비어를 유포했다는 이유로 1941년 10월 서 신부, 나 신부 등과 함께 일경에 피체되어 1942년 10월 24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육·해군형법 위반으로 금고(禁錮)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했다(자료제공=제주특별자치도보훈청).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
2019년 6월의 독립운동가, 한용운 선생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광복회·독립기념관이 공동으로 ‘한용운 선생’을 2019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한용운 선생(1879.08.29.~1944.06.29.)은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1913년 한국불교가 새로운 문명세계에 적응할 수 있는 개혁방안을 제시한 기념비적 책인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을 발간했으며, 그때부터 불교의 혁신 운동을 일으킨 주역이라는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1919년에는 종교계를 중심으로 추진된 전국적이며 거족적인 3·1운동 계획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불교계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탑골공원에서의 만세운동 및 전국적인 만세운동에 적극 동참하도록 권유했다. 1919년 3월 1일 종로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식을 가진 후 모두 일경에게 체포되었으며, 선생은 같은 해 7월 10일 옥중에서 「조선독립의 서」란 논설을 집필하여 명쾌한 논리로 조선독립의 정당성을 의연하게 강조했다. 선생은 1921년 12월 21일 석방된 뒤에도 민족운동을 계속하여 갔다. 1922년부터 전국적으로 확산된 물산장려운동을 지원하고, 1923년에는 조선민립대학 기성회 상무위원으로 피선되어 활동하였다. 그리하여 물산장려를 통한 민족경제의 육성과 민족교육을 위한 사립대학 건립 운동에 앞장섰다. 1927년 2월 좌우합작 민족협동전선으로 신간회(新幹會)의 창설이 추진되자, 선생은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신간회가 창립되자 경성지회장으로 피선되어 민족운동의 최일선에서 활동했다. 선생은 1933년 55세 되던 해 지금의 성북동 집터에 심우장(尋牛莊)이라는 자신의 집을 짓고 입적할 때까지 여생을 보냈다. 집을 지을 때 선생을 돕던 인사들이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볕이 잘 드는 남향으로 터를 잡을 것을 권유했으나 총독부 청사가 보기 싫다고 하여 끝내 동북 방향으로 집을 틀어 버리고 말았는데 여기에서 선생의 민족적 자존심을 엿볼 수 있다. 선생은 일제말기 총동원체제 아래 자행된 황민화 정책의 거센 파도 속에서도 민족적 자존심을 꺾지 않았다.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1940년 창씨개명 반대운동, 1943년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 등을 펼쳤다. 선생은 1944년 6월 29일 그토록 그리던 조국광복과 민족독립을 눈앞에 두고 입적해, 유해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자료제공=국가보훈처).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