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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월의 6‧25 전쟁영웅, 이재국 공군 소령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가 ‘이재국 공군 소령’을 2020년 3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28일 보훈처에 따르면 ‘이재국 소령’은 1932년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태어났다. 1952년 8월 1일에 조종간부 1기생으로 임관 후 같은 해 9월 11일 강릉기지에 배속되어 북한 지역에 있는 적의 군사시설 파괴임무를 수행했다. 1953년에는 고성일대의 지상군 전투지역 근접항공지원작전에 참가하여 적을 무력화시키고 아군의 사기를 고양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1952년 10월 한 달 동안 거의 매일 전투 비행에 나서는 등 1952년 9월 23일 첫 출격한 이래 7개월이라는 짧은 작전 참여기간 동안 무려 총 99회 출격하는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이재국 소령은 1953년 3월 6일 고성 남방의 적진을 공격하던 중 적에게 피탄(被彈)되어 기체가 화염에 쌓인 상황에서 기적적으로 생환(生還)하였고, 이 공격으로 심각한 화상을 입었으나 불굴의 투지로 재기하여 1955년에 다시 조종간(操縱桿)을 잡았으나 안타깝게도 1955년 3월 T-33 제트기 도입을 위한 임무수행 중 순직했다. 이재국 공군 소령은 6·25전쟁 중 빛나는 공적으로 정부로부터 1953년 을지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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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2월의 6‧25 전쟁영웅, 김영국 육군 대위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가 ‘김영국 육군 대위’를 2020년 2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처에 따르면 ‘김영국 대위’는 1928년 충청북도 진천군에서 태어났다. 6‧25전쟁이 발발하고 1950년 10월 육군종합학교 제9기생으로 입교하여 같은 해 12월 육군소위로 임관한 후 제2사단 32연대에 소대장으로 배속되었다. 1951년 9월 1일 중공군 제80사단 239연대가 강원도 김화지구 734고지를 빼앗기 위해 총공격을 개시해오자, 제2사단 대대장은 734고지 전진거점을 전담하던 7중대 중대장 김영국 중위에게 어떠한 상황이 전개되더라도 기필코 734고지를 고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7중대는 대대 규모의 많은 적군에 대항하여 결사적으로 항전을 하였으나, 적군의 수에 이기지 못하고 고지의 9부 능선까지 밀리며 백병전이 펼쳐지게 되었다. 이때 김영국 중위는 솔선수범으로 직접 적진으로 뛰어 들어 6명의 적을 사살하고 기관총 1정을 탈취하는 등 응전하는 전공을 세웠으나, 끝내 적의 흉탄에 장렬히 전사했다. 결국 김영국 중위가 이끄는 7중대의 분전으로 734고지를 사수 할 수 있었고, 이 전공으로 김영국 중위와 7중대에 이승만 대통령과 트루먼 미(美) 대통령 그리고 유엔군사령관과 미(美) 제9군단장의 표창이 수여되었다. 한편, 김영국 중위는 육군 대위로 1계급 특진되었고, 정부는 김영국 대위의 공훈을 기려 1951년 을지무공훈장과 화랑무공훈장을 추서했다.[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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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월의 6‧25 전쟁영웅, 박평길 육군 병장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가 대한민국의 자유를 위해 살신성인 정신을 실천한 ‘박평길 육군 병장’을 2020년 1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처에 따르면 ‘박평길 육군 병장’은 1925년 제주읍 이도리에서 태어났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참전을 결심하고, 부인과 자녀를 남겨두고 9월 1일 육군에 입대했다. 1950년 10월, 보병 제11사단 13연대 3대대 9중대 2소대에 편성되어 전북지역의 북한군 패잔병 주력부대를 분쇄하였으며, 1951년 4월에는 동부전선으로 이동하여 제9중대 2소대 분대장이 되었다. 1951년 6월, 강원도 고성군 수동면 564고지전투에서 적의 토치카(사격진지)에 쓰러지는 아군병사가 속출하자, 박 병장은 적탄을 뚫고 총을 쏘며 돌격하여 대퇴부에 총탄을 맞아 부상을 당했으나 좌절하지 않고, 적의 토치카(사격진지) 근처까지 달려가 수류탄을 던져 적군 10여명을 폭사시키고, 적군과 백병전을 치르는 과정에서 적탄에 맞아 25세라는 젊은 나이에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부는 박평길 병장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1951년 9월 화랑무공훈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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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의 6‧25 전쟁영웅, 전병익 해군 중사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가 ‘전병익 해군 중사’를 2019년 12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처에 따르면, 전병익 중사는 1929년 6월 충청북도 음성에서 출생했다. 1947년 7월 해군에 입대하여 1950년 4월 대한민국 해군 최초의 전투함인 PC-701함(백두산)에 배치되었다. 6·25전쟁 발발 직후에 1,000톤급 북한군 무장수송선이 병력 600여명을 태우고 부산 동북방 30마일 해상으로 남하했다. 이때 전병익 중사는 대한해협 해전에 ‘3인치 포 장전수’로 참전하여, 험상궂은 날씨에 시야확보가 어려운 밤이라는 악조건 속에서 치열한 교전 끝에 6월 26일 부산 동남방 해상에서 북한군 무장수송선을 격침하여 승리를 거두었으나, 안타깝게도 전 중사는 적선에서 발사한 포탄을 맞고 장렬히 전사했다. 대한해협 해전은 해상교통로 출입항의 중심지역인 부산을 공격하려던 북한의 기도를 무산시키며 6·25전쟁 중 첫 승리를 거둔 전투였으며, 유엔군은 수많은 병력과 군수물품, 유류 등 전쟁 물자를 부산항으로 수송할 수 있었고, 이는 6·25전쟁을 승리로 이끈 계기가 되었다. 한편, 정부는 전병익 중사의 공훈을 기려 1952년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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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의 6·25 전쟁영웅, 김금성 공군준장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는 ‘김금성 공군 준장’을 2019년 11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처에 따르면, 김금성 준장(1927.11.27.~1961.08.19.)은 1927년 11월 충청북도 충주 출생으로, 1950년 10월에 공군 소위에 임관하여 공군비행단 비행대에서 정찰을 비롯한 비행 임무를 수행했다. 1951년 10월부터는 강릉기지에서 F-51 전투기로 출격을 시작하여 1952년 1월 북한군의 후방보급로 차단을 위해 꼭 필요한 평양 근교 ‘승호리철교 차단작전’을 완수했고, 1952년 3월 ‘송림제철소 폭격작전’, 1953년 3월 351고지탈환을 위한 ‘근접항공지원작전’ 등 한국 공군이 출격한 거의 모든 주요작전에 참가하여 획기적인 전공을 세웠다. 6·25전쟁 중 전투비행대대장, 작전과장 등을 역임하여 비행단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면서 전투조종사로서는 두 번째로 많은 195회 출격을 기록했다. 특히, 작전 중에 여덟 번이나 적의 대공 포화에 전투기가 피탄되었으나, 우수한 조종기량을 발휘해 위기를 극복하여 모든 출격 조종사의 표상이 되었다. 전쟁 후에는 공군사관학교 생도대장, 제10전투비행단장으로 근무하여 우리 공군의 전력증강 및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정부는 김금성 준장의 공훈을 기려 1961년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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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의 6·25 전쟁영웅, 이성가 육군소장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가 ‘이성가 육군 소장’을 2019년 ‘10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처에 따르면 이성가 소장은 1922년 만주에서 출생해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중위로 임관하여 1949년 10월 태백지구 전투사령관으로서 공비토벌작전을 수행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북한군 제5사단은 양양과 강릉을 잇는 해안도로를 확보하기 위해 국군 제8사단을 공격했다. 당시 제8사단장이었던 이성가 소장은 북한군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며 북한군의 진격을 지연시켰다. 이어 영천전투에서는 뛰어난 작전지휘로 북한군 제15사단을 역습하여 빼앗긴 영천을 탈환하는 등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반격의 기반을 마련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지리적으로 영천은 대구와 포항의 중간에 위치한 교통의 중심지로서 북한군이 점령할 경우, 낙동강 방어선 전체가 붕괴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 후에도 이성가 소장은 1951년 제7사단을 지휘하여 전술적 요충지인 백석산 및 크리스마스 고지 전투 등 많은 전선에서 작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정부는 이성가 육군 소장의 공훈을 기려 1953년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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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9월의 6‧25전쟁영웅, 공해동 육군 하사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가 ‘공해동 육군 하사’를 2019년 9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처에 따르면, 공해동 육군 하사(1931.11.22.~1952.09.13.)는 1931년 경상북도 달성군 출생으로 전쟁기간 중 육군에 입대하여 수도사단 기관총사수로 수도고지 전투에 참전했다. 이 전투에서 기관총 사격으로 적의 공격을 지연시키고 고지를 사수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1952년 9월 6일 중공군에게 고지를 빼앗긴 수도사단은 제26연대가 6차례의 탈환전을 전개하였으나 모두 실패하고, 임무를 교대한 제1연대가 9월 9일에 고지를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제1연대는 수차례에 걸친 적의 공격을 물리치면서 고지를 끝까지 사수하였는데, 특히 제1연대에 배속된 제21수색중대 기관총사수 공해동 하사의 활약이 있었다. 1952년 9월 13일 새벽 1시 15분에 한 발의 녹색 불빛과 함께 적의 출현이 급보되었다. 적은 다섯 개의 접근로를 따라 각각 중대규모의 부대로 공격해 오며 맹렬히 공격을 퍼부었다. 공해동 하사는 우박처럼 쏟아지는 실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불굴의 투지로 기관총을 발사했다. 이 과정에서 여러 발의 적 탄환을 어깨에 맞았음에도 죽음의 마지막 순간까지 방아쇠를 놓지 않았다. 공해동 하사의 투혼에 힘입어 수도사단은 마침내 중공군의 공격을 격퇴하고 고지를 사수할 수 있었다. 정부는 공해동 하사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1952년 을지무공훈장을 수여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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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의 6·25전쟁 영웅, 홍은혜 여사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가 해군의 어머니로 불리던 ‘홍은혜 여사’를 2019년 8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처에 따르면, 대한민국 해군의 창설자인 손원일(1909~1980) 제독의 부인 홍은혜 여사(1917.08.11.∼2017.04.19.)는 1917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나 1939년 이화여전(현 이화여대) 음악과를 졸업하고 당시 30세인 청년 손원일과 결혼했다. 이후 1945년 손 제독이 해군의 전신인 해방병단을 창설하고 초대 해군참모총장으로 취임하면서, 홍 여사도 한평생 대한민국 해군을 위한 봉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홍 여사는 우리나라 해군 최초의 전투함인 ‘백두산함’의 구매를 위해 해군장병 부인들과 함께 삯바느질로 전투함 구매 자금을 모으는데 앞장섰다. 이렇게 해서 도입한 백두산함은 6·25전쟁 발발과 함께 부산으로 은밀히 침투하던 북한수송선을 격침해 최초의 해상전투 승전기록을 남겼다. 또한 홍 여사는 6·25전쟁 중에 부상당한 해군과 해병대 병사들을 돌보는데 헌신했다. 정전협정 체결 이듬해,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에 공장과 탁아소, 유치원 등을 지어 전사자 가족들의 생계를 도왔으며 부상당한 병사들을 돕기 위한 모금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해군사관학교 생도들이 군가가 없어 일본 군가에 가사를 붙여 부르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던 홍 여사는 손 제독이 쓴 가사에 곡을 만들어 우리나라 최초의 군가 ‘해방(海防)행진곡’을 발표했다. 그 이후에도 ‘바다로 가자’, ‘해군사관학교 교가’ 등 다수의 해군 군가를 직접 작곡하여 부르게 하였다. 한평생 우리나라 해군을 향한 사랑과 관심을 놓지 않고 헌신하여 ‘해군의 어머니’라 불리던 홍은혜 여사는 2009년 손원일 제독 탄신 100주년을 맞아 해군으로부터 공로패를 받았으며, 2017년 향년 100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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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의 6‧25전쟁영웅, 김재호 육군 일등병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가 ‘김재호 육군 일등병’을 2019년 7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처에 따르면, 김재호 일등병(1926.01.05.~1953.07.15.)은 1926년 전라남도 광양군 출생으로 육군에 입대 후 수도사단 제26연대 1대대 소총수로 복무하면서 수도고지 전투에 참전했다. 수도고지 전투는 1952년 중부전선의 금성돌출부에 있는 수도고지에서 국군 수도사단과 중공군이 군사분계선 설정에 대한 휴전협상의 주도권 장악을 목적으로 전개한 고지 쟁탈전이었다. 김재호 일등병은 이 전투에서 중공군의 대규모 공격을 저지하고 수도고지를 사수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1952년 10월 6일 저녁, 중공군의 전차 4대가 수도고지에 포격을 가하고 6,000여 발의 포탄을 고지 일대에 쏟아 부으며 집중 공격을 가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중대의 전선이 무너지고 적이 진내로 돌입하면서 수도고지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김재호 일등병은 접전이 벌어지기 직전, 적의 전차포 사격으로 엄체호가 무너지면서 잠시 정신을 잃고 말았다. 다른 전우들이 모두 전사한 가운데 홀로 정신을 잃고 쓰려졌던 김재호 일등병은 얼마 후 정신을 차리고 무너진 흙더미를 헤치고 나왔다. 그 때 그의 눈앞에서는 아군과 적군이 무수한 수류탄전과 백병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에 김 일등병은 용맹히 뛰쳐나가 총검을 휘두르며 중공군을 격퇴하고 수류탄을 투척하여 적 일부를 폭살하였다. 또한 당황하여 흩어지는 적을 향해 소총사격을 가해 6명을 사살하고 적이 완전히 퇴각한 후 소총 2정과 다발총 1정을 노획하여 본진으로 복귀했다. 정부는 이 같은 공적으로 1953년 김재호 일등병에게 을지무공훈장을 수여했다. 그러나 김재호 일등병은 정전협정 체결 12일 전인 1953년 7월 15일 금성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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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의 6‧25 전쟁영웅, 김문성 해병대 중위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가 ‘김문성 해병대 중위’를 2019년 6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국가보훈처에 의하면, 김문성 중위(1930.08.25.∼1951.06.08.)는 1930년 제주도 서귀포 출생으로 1951년 3월 해병대 소위로 임관한 후 해병대 제1연대 3대대 9중대 2소대장으로 중동부전선 도솔산지구 전투에 참전했다. 1951년 6월 4일, 해병대 제1연대는 강원도 양구 지역에 위치한 도솔산에서 북한군 최정예 제12사단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당시 도솔산은 중동부 전선의 핵심 요충지로 이를 확보하지 못할 경우 해병대는 물론 좌우에 인접한 아군이 한 걸음도 전진할 수 없는 전략상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이를 잘 알고 있는 북한군 또한 매우 거세게 저항했다. 도솔산을 탈환하기 위한 작전에서 김문성 소대장은 24개 목표 중 가장 험준한 지점에 투입되었다. 적은 난공불락의 지형적 이점을 이용하여 자동화기로 집중 공격했다. 김문성 소대장은 선두에서 소대를 지휘하며 빗발치는 총탄을 무릅쓰고 적의 진지 50m 지점까지 육박해 들어갔으나, 안타깝게도 목표를 바로 눈앞에 두고 적탄에 피탄되어 장렬히 전사했다. 소대장의 전사를 목격한 소대원들은 격분하여 총돌격을 감행하여 마침내 적을 격멸시키고 미 해병대도 성공하지 못했던 난공불락의 요새인 도솔산 목표지점을 완전히 탈환하여 ‘무적해병’의 신화를 이룩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계급 특진과 함께 충무무공훈장을 추서했다(자료제공=국가보훈처).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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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의 6‧25전쟁영웅, 조관묵 경찰 경감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가 조관묵 경찰 경감을 2019년 5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조관묵 경감(1927.01.06.∼1950.11.03.)은 강원도 양구군에서 태어나 1948년 순경으로 임용되어 강원경찰국 춘천경찰서에 근무하던 중 6·25전쟁이 발발했다. 6·25전쟁 당시 양구전방은 백석산전투, 피의능선전투 등이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조관묵 경감은 춘천경찰서 양구파견대 중대장으로 대원 30여명과 함께 양구지역 치안 업무를 수행했다. 1950년 9월 28일 서울수복과 동시에 춘천이 수복되자 조관묵 경감은 인민군 제10사단 소속 1개 연대 4천 여 명 규모의 패잔병과 대치하며 양구군 소재지를 사수하던 중, 패잔병의 습격을 받아 강원도 춘성군 북산면 내평리까지 후퇴했다. 다시 반격을 시도하여 격전을 벌였으나, 양구·춘천간 도로를 우회 차단한 적의 배면 공격으로 소대와 중대가 통신이 두절되어 적의 맹공격을 받게 되었다. 조 경감은 2천 여 명의 양구 시민들을 안전하게 후방으로 대피시키는 등 최후까지 분투하였으나 적의 총탄에 전사했다. 조관묵 경감과 양구 파견대의 활약은 국군이 반격해 북진하던 시기에 불리한 상황속에서도 2천 여 명의 시민이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등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여 경찰의 귀감이 되었다. 정부는 조관묵 경감의 공훈을 기려 경위에서 경감으로 1계급 특진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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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의 6‧25전쟁영웅, '콘라도 디 얍' 필리핀 육군 대위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가 ‘콘라도 디 얍(Conrado D. Yap)’ 필리핀 육군 대위를 2019년 4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콘라도 디 얍(Conrado D. Yap) 대위는 필리핀 제10대대전투단 특수중대 중대장으로 1951년 4월 경기도 연천 북방의 율동전투에 참가했다. 율동전투는 중공군의 제5차 공세에 맞서 1951년 4월 22일부터 23일까지 연천 북방의 율동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저지한 방어전투이다. 필리핀 제10대대전투단은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강인한 정신력으로 중공군의 공격을 저지하여 인접 부대들이 철수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해 주었으며, 중공군 2명을 생포하고 500여 명을 사살하거나 부상을 입히는 전과를 거두었다. 얍 대위는 퇴로 차단의 위기에서 방어전을 전개하던 중 대대장으로부터 즉각 철수할 것을 지시받았으나 생존자를 구출하고 전우들의 시체를 수습한 후 철수하겠다고 보고한 후 역습을 감행했다. 얍 대위의 진두지휘 하에 특수중대는 부상을 입은 동료 2명을 구출하고 전사한 부대원들의 시체를 수습해 고지 탈환에 성공했으나 이 과정에서 얍 대위는 적의 저격탄에 맞아 전사했다. 율동전투에서 그가 발휘한 탁월한 용기와 책임감, 그리고 부하를 구출하고자 자신의 생명을 바친 공적을 인정받아 필리핀 정부는 그에게 최고훈장인 ‘Medal of Valor'를 추서했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얍 대위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했다.(자료제공=국가보훈처).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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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의 6‧25전쟁영웅, 케네스 뮤어(Kenneth Muir) 영국 육군 소령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가 ‘케네스 뮤어(Kenneth Muir)’ 영국 육군 소령을 2019년 3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케네스 뮤어 소령(1912.3.6.∼ 1950.9.23.)은 1950년 8월 아길 엔 서들랜드 하이랜더스(Argyll and Sutherland Highlanders)연대 제1대대(이하 아길대대) 부대대장으로 부산항에 상륙해 6‧25전쟁에 참전했다. 뮤어 소령은 대구시 일대의 낙동강방어선에 배치되어 임무를 수행하던 중,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을 거둠에 따라 영국군 제27여단과 함께 반격으로 전환해 성주 동남쪽 신부리 일대의 282고지와 389고지를 공격하게 되었다. 북한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아길대대 B‧C중대가 위기에 처하자 뮤어 소령은 탄약과 들것반을 인솔해 전투현장에 도착했다. 중대를 그대로 방치할 경우 상황이 더욱 악화될 것이 예상됨에 따라 뮤어 소령은 2개 중대의 통합지휘를 자청하여 전투부대를 재편성하고 직접 지휘했다. 사기가 오른 B‧C 중대는 북한군을 격파하며 고지를 장악했지만 북한군의 역습이 시작되자 병사의 기관총을 자신이 직접 발사했다. 고갈되자 60mm 박격포로 응전했으나 안타깝게도 북한군의 탄환에 전사했다. 영국 정부는 뮤어 소령의 공적을 인정해 최고훈장인 ‘Victoria Cross’를 추서했다(자료제공=국가보훈처).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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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의 6‧25전쟁영웅, 김한준 육군 대위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가 ‘김한준’ 육군 대위를 2019년 2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김한준 대위는 19세가 되던 1947년 4월 국방경비대에서 모병을 시작하자 지원 입대했다. 이후 6‧25전쟁이 발발하자 제7사단 제8연대 소속으로 평양탈환작전에 참여한 후 압록강을 향해 북진했으며, 풍부한 전투경험과 지휘 능력을 인정받아 육군 소위로 현지 임관되었다. 6‧25전쟁의 전 기간을 전장에서 보낸 김한준 대위는 “전투는 상하 간의 신뢰로 이루어진다. 지휘관이 부하를 믿고 신뢰해야 자신을 사지(死地)로 몰아가는 명령이라 해도 부하는 따르게 된다”는 전투철학을 신조로 삼았으며 지휘관으로서 서로에 대한 신뢰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휴전협상이 막바지에 달했던 1953년 7월 13일, 중공군은 전략적 요충지인 강원도 금성천 부근을 장악하기 위해 5개 군 15개 사단을 투입해 이른바 ‘7‧13공세’로 불리는 최후공세를 취했다. 당시 김한준 대위는 중대장으로 425고지를 사수하는 임무를 받고 직접 중대원들을 진두지휘하여 중공군을 물리치고 추격전을 전개하여 큰 전과를 거두었다. 425고지 전투의 승리는 사단의 주보급로를 확보하고 전력공급원인 화천댐을 사수하는데 일조했으며, 연대 주저항선의 한 축을 지키고 금성천 방어선의 안정적 유지에 크게 기여했다. 정부는 김한준 대위의 공적에 대해 1953년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했으며, 2012년 4월 29일 향년 83세로 별세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자료제공=국가보훈처).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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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월의 6‧25전쟁영웅, 김영옥 미국 육군 대령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가 ‘김영옥’ 미국 육군 대령을 2019년 1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김영옥 대령은 재미교포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이탈리아와 프랑스 전선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제대했으나 6․25전쟁이 발발하자 자원입대하여 군에 복귀했다. 그는 한국인 유격대를 지휘하며 정보수집 임무를 수행하고 미 제7사단 31연대 정보참모로 활동했다. 1951년 4월 중공군의 춘계공세로 소양강 지역을 방어하던 제31연대가 철수를 단행하자 미군과 한국군을 엄호하라는 명령을 받아 적을 저지시키기 위해 후퇴하는 중대급 한국군 병력을 집결시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작전을 수행했다. 그 해 5월, 중공군의 제2차 춘계공세가 이어지자 구만산‧탑골 전투와 금병산 전투에서 직접 부대를 진두지휘하며 사기가 떨어진 부대원들을 독려해 승리로 이끌었고, 1951년 서울 탈환 후 38도선을 전술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임진강-연천-화천저수지-양구-양양으로 연결되는 방어선인 캔자스 선에 유엔군 부대 중 가장 빠른 진격으로 제일 먼저 도달했다. 이후 철의 삼각지대에서 전투를 수행하던 중 중상을 입고 일본 오사카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은 후 다시 전선에 복귀하여 제1대대장에 임명되었다. 1952년 9월 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그는 한국 전선에서 수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 정부로부터 은성무공훈장과 동성무공훈장을 수여받았고, 2005년에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자료제공=국가보훈처).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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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의 6‧25전쟁영웅, ‘에드워드 포니’ 미 해병대 대령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가 2018년 12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에드워드 포니’ 미 해병대 대령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에드워드 포니(Edward H. Forney) 대령은 6․25전쟁 당시 흥남철수작전에서 현봉학 박사를 도와 약 10만여 명에 이르는 피난민을 구출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주인공이다. 그는 미국 역사상 전투 상황에서 이루어진 최대 규모의 민간인 해상 탈출 작전인 흥남철수작전에서 장비, 보급품, 병력 철수를 조직적으로 이끈 미 제10군단 지휘단의 책임관으로 활약했다. 당시 철수하는 미군과 한국군을 따라 10만여 명에 이르는 피난민이 흥남에 발이 묶여있었다. 미 제10군단의 고문으로 활동하던 현봉학 박사의 요청을 수락해 군수 물자를 운송하기 위해 투입됐던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 호(SS Meredith Victory)에 1만 4천 명의 피난민을 태워 무사히 거제도까지 이송시켰다. 미군에서는 흥남철수작전에서 포니 대령이 보인 뛰어난 공로를 치하해 청동무공훈장(Oak Leaf Cluster)을 수여했다. 또한 그는 인천상륙작전의 주 설계자였으며 포항상륙작전 당시 제1기병사단의 하역과 상륙에 관한 계획을 준비, 1만 명이 넘는 병력과 2천대 이상의 차량을 포항에 상륙시켰다. 이는 부산지역 방어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포항상륙작전에서 보여준 뛰어난 공적을 인정받아 미국 공로훈장(Legion of Merit)을 수여받았다. 이후 포니 대령은 대한민국 해병대가 고도로 훈련되고 기동력을 갖춘 군대로서 준비태세를 확립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줬으며 외국 군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우리나라 군 기지 내에 자신의 이름을 딴 도로를 가지게 됐다(자료제공=국가보훈처).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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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의 6‧25전쟁영웅, ‘박기석 육군 이등중사·최재효 육군 하사’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가 ‘박기석 육군 이등중사·최재효 육군 하사’를 11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박기석 이등중사·최재효 하사는 철원지구 281고지전투에서 탁월한 전투력을 발휘해 고지를 재탈환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주인공들이다. 이들이 소속된 제9중대가 281고지 정상 20여m 전방에 이르렀을 때 중공군은 모든 자동화기를 동원하여 아군의 돌진을 필사적으로 저지하기 시작했다. 이를 격파하지 못하면 고지 점령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때 박기석 이등중사가 포복으로 중대장에게 다가가 특공대를 조직해 적의 자동화기 진지를 격파하겠다고 말했다. 중대장은 박 이등중사의 제안을 허락했고 최재효 하사를 비롯해 특공대 4명을 선발했다. 박 이등중사와 최 하사가 먼저 절벽을 기어올라 2개의 적 기관총진지를 각각 수류탄으로 파괴하고, 뒤이어 나머지 대원들이 백병전으로 중공군을 물리쳤다. 이에 당황한 중공군은 사분오열로 도주하였고, 특공대원들은 오전 11시 50분에 281고지를 탈환하였다. 이로써 아군은 적의 공세를 격파하고 철원 북쪽의 진지를 고수할 수 있었다. 281고지 탈환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박기석 이등중사와 최재효 하사는 1951년 11월 25일 충무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자료제공=국가보훈처).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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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의 6‧25전쟁영웅, 딘 헤스 미국 공군 대령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가 ‘딘 헤스’ 미국 공군 대령을 10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딘 헤스 대령은 미국의 공군 장교로,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 공군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한국 공군의 F-51D 머스탱 18번기 신념의 조인기의 주인이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군은 대한민국 공군을 지원 할 제6146군사고문단을 창설하면서 대령을 책임자로 임명했다. 제6146군사고문단은 대한민국 공군 재건을 위한 작전을 한판 승부(Bout One)라 이름 짓고 부대명도 이 이름을 따서 ‘바우트 원 대대’라고 명명했다. 이후 미군은 바우트 원 대대를 해체시켜 미 공군에 전속시킬 것을 결정했지만, 헤스 대령은 상부에 부대의 존속을 결사적으로 주장해 존속할 수 있게 했다. 헤스는 전투기가 부족하다는 상부의 압박이 들어올 때마다 교육 중인 한국 조종사들과 함께 전투기를 타고 출격해 임무를 완수했다. 훈련부대였음에도 불구하고 헤스는 1951년 6월에 한국을 떠날 때까지 무려 250회나 출격하며 각종 전투임무를 수행했다. 당시 미 공군 조종사들이 100회의 출격을 달성하면 일본 등 후방으로 전출 보내주었던 것과 대조적으로 그는 한국에 남았고 끝까지 대대를 지켰다. 또한, 중공군 개입으로 전황이 급속도로 악화되면서 전쟁고아들을 대비할 계획을 세웠지만 단 1대의 항공기도 아쉬운 판국에 전쟁고아들을 실어 나를 비행기를 따로 편성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헤스는 적이 코앞까지 다가온 상황에서 김포 비행장을 뜨려 하던 수송기들을 붙잡아 950명의 고아와 80명의 직원을 제주도로 구출했다. 제주항공우주박물관에는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2017년 3월 9일 건립되었고, 대한민국 공군은 그를 전쟁 중 대한민국 공군의 아버지로 현양하고 있다(자료제공=국가보훈처).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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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9월의 6․25 전쟁영웅, 박정모 해병대 대령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가 ‘박정모’ 해병대 대령을 9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보도했다. 박정모 대령은 1927년 3월 20일 전남 신안군에서 태어나 1946년 해군 1기로 입대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해병대 소대장으로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해 용전분투했다. 1950년 9월 27일, 서울탈환 작전 시 해병 제2대대 제6중대 1소대장으로서 소대원들과 함께 새벽에 공격을 시도했다. 치열한 교전 끝에 중앙청 안으로 들어가 중앙청 옥상에 걸려 있던 인공기를 걷어내고 태극기를 가장 먼저 게양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박 대령은 1951년 가리산지구 전투에서 최종 목표인 957고지를 해병대 최초로 은밀한 야간 기습공격을 감행해 탈취함으로써 국군과 유엔군의 총반격 작전인 리퍼(ripper)작전에 기여했고 도솔산지구 전투에서는 24개 목표 중 적의 최후 방어선인 제9목표를 7일 만에 탈취 확보함으로써 ‘무적해병’의 전통을 수립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정부는 6‧25전쟁기간 중 이룬 그의 혁혁한 공에 대해 을지무공, 충무무공 훈장을 수여했다. 박정모 대령은 2010년 5월 6일 향년 85세로 타계해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자료제공=국가보훈처).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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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의 6․25 전쟁영웅, 허봉익 육군 대위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가 ‘허봉익’ 육군 대위를 8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허봉익’ 육군 대위는 1950년 8월 죽음으로 적진을 막아선 안동전투의 영웅이다. 안동지구 전투는 1950년 6월 25일 6·25전쟁이 발발한 후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으로 철수하기 직전에 국군 제8사단과 수도사단 1연대가 안동지역에서 북한군 제12사단과 제8사단 소속 일부 병력의 침공을 4일간 저지한 방어전투이다. 7월 31일 새벽 북한군 제12사단이 전차를 선두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자 육군본부는 낙동강방어선 형성계획에 따라 7월 31일 24시를 기해 안동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하고 명령을 하달했다. 제8사단 16연대는 북한군 1개 연대와 치열한 접전을 벌이다가 철수명령을 뒤늦게 받아 북한군에게 포위되어 각개로 철수를 진행했고 포위망 돌파와 도하과정에서 연대병력 중 장교 21명과 병사 814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는 손실을 입었다. 이 과정에서 제3대대 3중대장 허봉익 대위는 임전무퇴의 정신을 발휘해 2개 소대 병력을 인솔하여 안동 점령을 기도하는 북한군 2개 대대 병력과 백병전을 전개했다. 허 대위가 지휘하는 제3중대는 북한군 1개 중대를 격멸하고 압축된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해 고군분투했으나 북한군의 포격과 중과부적으로 인해 허봉익 대위는 현장에서 전사했다. 1950년 8월 2일 안동에서 전사한 그의 유해는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고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려 1954년에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