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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전현충원 2019년 1월의 현충인물, 한필순 국가사회공헌자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립대전현충원이 2019년 1월의 현충인물로 한필순 국가사회공헌자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한필순 국가사회공헌자는 1933년 평남 강남군에서 태어났다. 한 박사는 공군 장교를 지내고 서울대와 미국 일리노이대, 캘리포니아대 등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과학자다. 한 박사와 원자력의 인연은 1982년 한국원자력연구소의 전신인 한국에너지연구소의 대덕공학센터 분소장에 임명되면서부터 시작됐다. 당시 정부는 원자력연구소를 핵 개발 기관으로 의심하는 미국의 시선을 의식해 연구소 이름에서 ‘원자력’이란 단어를 쓰지 못하게 하고, 역할과 예산을 대폭 축소했다. 뿐만 아니라 상급기관에서는 한국에너지연구소가 큰 성과를 내지 못한다는 이유로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결국 날이 갈수록 연구원들의 사기는 떨어졌고 연구소를 떠나는 연구원들도 하나둘씩 생겨났다. 하지만 한 박사는 좌절하지 않았다. 당시 중수로인 월성 1호기가 1983년 가동 예정에 있었고 박사는 이곳에 필요한 핵연료를 전량 국산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 ‘중수로 핵연료 국산화’ 사업에 연구소의 사활을 걸었다. 일각에서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와 불신이 있었으나 늦은 시간까지 연구실을 돌며 연구원들을 격려하고, 연구 환경개선으로 연구원들의 사기 진작에 힘썼다. 한 박사의 이러한 열정과 헌신에 연구원들은 다시 한마음으로 뭉쳤고, 이들의 열의에 찬 노력 끝에 1985년 드디어 중수로 핵연료 양산 기술을 개발해냈다. 개발과정에서 시제품을 검증하는데 필요한 시설과 예산이 부족해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한 박사는 특유의 배짱과 끈기로 문제를 해결했다. 이어 1988년에는 경수로 핵연료까지 국산화해 국내 가동 중인 모든 원전에 전량 국산 핵연료 양산 공급 체제를 구축하게 됐다.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중수로 핵연료에 이어 경수로 핵연료까지 국산화해내자 국내의 많은 사람뿐만 아니라 해외 유수의 원자력 기관들 또한 한국의 놀라운 기술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한 박사는 국내 원자력 기술 자립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우리나라에서 에너지자립은 국가와 국민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다. 한 박사가 주도한 중수로 및 경수로 핵연료 국산화와 한국형 경수로 개발은 우리나라의 에너지 수급 문제를 해결하고 한국이 세계적인 원자력 강국으로 도약하는 데 그 기초를 마련했다. 정부는 원자로 설계기술과 핵연료 기술을 완전 자립화시키는 등 한국 과학기술계에 눈부신 업적을 남긴 박사의 공로를 기려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묘역 32호에 안장하여 고인의 공훈을 기리고 있다(자료제공=국립대전현충원).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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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월의 6‧25전쟁영웅, 김영옥 미국 육군 대령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가 ‘김영옥’ 미국 육군 대령을 2019년 1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김영옥 대령은 재미교포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이탈리아와 프랑스 전선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제대했으나 6․25전쟁이 발발하자 자원입대하여 군에 복귀했다. 그는 한국인 유격대를 지휘하며 정보수집 임무를 수행하고 미 제7사단 31연대 정보참모로 활동했다. 1951년 4월 중공군의 춘계공세로 소양강 지역을 방어하던 제31연대가 철수를 단행하자 미군과 한국군을 엄호하라는 명령을 받아 적을 저지시키기 위해 후퇴하는 중대급 한국군 병력을 집결시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작전을 수행했다. 그 해 5월, 중공군의 제2차 춘계공세가 이어지자 구만산‧탑골 전투와 금병산 전투에서 직접 부대를 진두지휘하며 사기가 떨어진 부대원들을 독려해 승리로 이끌었고, 1951년 서울 탈환 후 38도선을 전술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임진강-연천-화천저수지-양구-양양으로 연결되는 방어선인 캔자스 선에 유엔군 부대 중 가장 빠른 진격으로 제일 먼저 도달했다. 이후 철의 삼각지대에서 전투를 수행하던 중 중상을 입고 일본 오사카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은 후 다시 전선에 복귀하여 제1대대장에 임명되었다. 1952년 9월 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그는 한국 전선에서 수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 정부로부터 은성무공훈장과 동성무공훈장을 수여받았고, 2005년에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자료제공=국가보훈처).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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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월의 독립운동가, 유관순 열사 ··· 조국독립을 위해 꽃다운 청춘과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이 공동으로 유관순(1902. 12. 16. ~ 1920. 9. 28.) 선생을 2019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선생은 1902년 12월 16일 충남 목천(현재 천안)에서 5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1918년 4월 이화학당의 고등과 1학년에 진학한 선생은 3․1운동이 발발하기 바로 전날 고등과 1학년 학생들과 시위 결사대를 조직해 만세시위에 참가할 것을 맹세했다. 3월 1일 탑골공원을 나온 만세 시위대가 학교 앞을 지나자 선생은 5명의 시위 결사대 동지들과 함께 시위운동에 동참했다. 3월 5일, 선생은 5명의 시위 결사대 동지들과 함께 서울에서 전개된 최대의 시위운동인 남대문역 만세 시위운동에도 참여했다. 학교가 문을 닫게 되자 선생은 서울의 독립운동 소식을 고향에 전하고, 또 거기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고서 선생은 3월 13일 사촌 언니인 유예도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몰래 숨겨 귀향하여 본격적으로 고향에서의 만세 시위운동을 추진했다. 4월 1일 병천면 아우내 장날, 선생은 장터 어귀에서 밤새 만든 태극기를 나누어 주면서 만세 시위운동에 참여하러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시위 대열이 아우내 장터 곳곳을 누비자 병천 헌병주재소의 헌병들이 달려와 총검을 휘두르며 만세 시위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 때 선생의 아버지 유중권이 “왜 사람을 함부로 죽이느냐”고 항의하다가 일본 헌병의 총검에 찔려 순국하였고, 이를 보고 남편의 원수를 갚으려고 달려들다가 선생의 모친마저도 일본 헌병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이에 선생은 군중들을 이끌고, 아버지의 시신을 둘러메고 병천 헌병주재소로 쇄도하여 항의 시위를 계속했다. 그 날 저녁, 선생과 유중무, 조인원·조병호 부자 등 시위 주동자들은 체포되어 천안헌병대로 압송되었다. 선생은 천안헌병대에서 갖은 고문을 받으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시위 주동자라고 말하면서 죄 없는 다른 사람들을 석방하라고 호통을 쳤다. 선생은 서대문 감옥에서의 온갖 탄압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옥중 만세를 불렀다. 특히 1920년 3월 1일, 3․1운동 1주년을 맞이하여 수감 중인 동지들과 함께 대대적인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선생은 지하 감방에 감금되어 야만적이고 무자비한 고문을 당하게 되었다. 선생은 고문으로 인해 방광이 터지는 중상을 입었으나 치료하지 못한 채 고문의 후유증과 영양실조로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경, 서대문감옥에서 18살의 꽃다운 나이로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자료제공=국가보훈처).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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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근성 경위, 국립대전현충원 2018년 12월의 현충인물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립대전현충원이 2018년 12월의 현충인물로 2011년 교통사고 현장에서 전기 감전으로 순직한 ‘배근성 경위(1969.10.4~2011.12.4)’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배근성 경위는 2011년 12월 4일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파포리 인근 지방도에서 빗길에 미끄러진 승용차가 전신주를 들이받는 사고 현장에 긴급 출동했다. 배 경위는 운전자는 무사해서 안전하게 귀가시킨 후, 교통사고 현장을 수습하던 중 전신주에서 떨어진 전깃줄에 감전돼 쓰러진 주민을 구하려다 함께 감전돼 순직했다. 당시 배근성 경위는 두 아들(7세, 5세)과 부인, 노모를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주민의 안전을 위해 목숨을 바친 배근성 경위의 공로를 기려 1계급 특진과 옥조근정훈장을 추서했으며, 국립대전현충원 경찰관묘역에 안장했다(자료제공=국립대전현충원).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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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의 6‧25전쟁영웅, ‘에드워드 포니’ 미 해병대 대령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가 2018년 12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에드워드 포니’ 미 해병대 대령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에드워드 포니(Edward H. Forney) 대령은 6․25전쟁 당시 흥남철수작전에서 현봉학 박사를 도와 약 10만여 명에 이르는 피난민을 구출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주인공이다. 그는 미국 역사상 전투 상황에서 이루어진 최대 규모의 민간인 해상 탈출 작전인 흥남철수작전에서 장비, 보급품, 병력 철수를 조직적으로 이끈 미 제10군단 지휘단의 책임관으로 활약했다. 당시 철수하는 미군과 한국군을 따라 10만여 명에 이르는 피난민이 흥남에 발이 묶여있었다. 미 제10군단의 고문으로 활동하던 현봉학 박사의 요청을 수락해 군수 물자를 운송하기 위해 투입됐던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 호(SS Meredith Victory)에 1만 4천 명의 피난민을 태워 무사히 거제도까지 이송시켰다. 미군에서는 흥남철수작전에서 포니 대령이 보인 뛰어난 공로를 치하해 청동무공훈장(Oak Leaf Cluster)을 수여했다. 또한 그는 인천상륙작전의 주 설계자였으며 포항상륙작전 당시 제1기병사단의 하역과 상륙에 관한 계획을 준비, 1만 명이 넘는 병력과 2천대 이상의 차량을 포항에 상륙시켰다. 이는 부산지역 방어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포항상륙작전에서 보여준 뛰어난 공적을 인정받아 미국 공로훈장(Legion of Merit)을 수여받았다. 이후 포니 대령은 대한민국 해병대가 고도로 훈련되고 기동력을 갖춘 군대로서 준비태세를 확립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줬으며 외국 군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우리나라 군 기지 내에 자신의 이름을 딴 도로를 가지게 됐다(자료제공=국가보훈처).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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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의 독립운동가, 한인애국단원 유상근 선생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이 공동으로 2018년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일본군 고위관료 처단 계획을 실행하려다 붙잡혀 광복을 하루 앞두고 옥중 순국한 한인애국단원 유상근(柳相根, 미상~1945. 8. 14.) 선생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선생은 강원도 통천에서 태어나 한학을 공부하다 10세 되던 해 통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집안 사정으로 북간도 연길현 2도구로 이주했고, 봉밀구(峰密溝) 필산촌(畢山村)을 거쳐 용정촌으로 가 동흥중학교에서 1년간 수학했다. 재차 화룡현으로 이주한 뒤 19세 되던 해 이모부인 이종익이 있는 하얼빈으로 갔다. 하얼빈에서 생활하던 선생은 1930년경 상하이로 갔다. 상하이에서 김구를 만났고, 그의 도움으로 영국인이 운영하는 버스회사의 검표원으로 취직했지만 궁핍한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홍콩과 광둥지방을 오가며 인삼장사를 했다. 중국정부는 1931년 9월 18일 만주를 침략한 일본을 국제연맹에 제소했다. 국제연맹은 릿튼(Lytton)을 위원장으로 하는 조사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했고, 조사단은 이듬해인 1932년 5월 26일부터 다롄(大連)에 오게 되었다. 김구는 일본군 고위관료가 조사단 환영식에 참가하면 이들을 처단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1932년 1~2월경 김구의 부름으로 상하이로 돌아온 선생은 2월 24일 한인애국단에 가입했고, 4월 27일 윤봉길의사가 홍커우공원에서 사용한 것과 같은 폭탄을 들고 다롄으로 갔다. 선생은 의거를 위해 미리 가있던 최홍식을 다롄에서 만났고, 이성원․이성발 형제의 협조를 받아 거사를 준비했다. 그러나 거사 이틀 전인 5월 24일 최홍식이 상하이로 보냈던 전보가 추적당해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선생은 다롄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살인예비, 폭발물취체규칙 위반’으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광복을 하루 앞둔 1945년 8월 14일 뤼순감옥에서 순국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유상근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자료제공=국가보훈처).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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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귀범 소방관, 국립대전현충원 11월의 현충인물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허귀범 소방관은 1960년 서울에서 태어나 1990년 11월 26일 영등포소방서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평소 성실하고 모범적인 허 소방관은 직업에 긍지를 갖고 솔선수범하여 동료들로부터 두터운 신망을 받았다. 더욱이 1993년도에는 소방의 날을 맞아 모범공무원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소방관을 천직으로 여겼던 허 소방관은 출동의 매 순간, 삶과 죽음의 갈림길임을 알면서 앞장서서 위험한 불길로 뛰어들었다. 재난현장의 최전선에서 인명탐색 및 구조작업을 병행해야하는 소방관은 물·불을 가릴 수 없고, 본인의 안전은 생각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런 위험천만한 재난현장에 앞장서서 구조 활동을 펼치는 허 소방관을 보며 지인들은 어린자녀를 생각해 앞장서는 것만이라도 만류를 했으나 “불구덩이 속에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외면할 수 있습니까. 이 직업은 사명감이 없으면 못합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소방의 소임을 천명으로 여겼다. 1994년 6월 1일 서울 영등포구 대림3동 내쇼날플라스틱 서울공장의 대형화재가 발생하자 허 소방관은 화점 10m 앞까지 접근하여 조기진화를 시도하였으나 불길은 계속 번져나갔다. 이윽고 11시간 만에 불길이 수그러들었고 허 소방관을 포함한 소방대원 10여명이 다시 투입되어 마지막 화재진압에 나섰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허귀범 소방관은 화재진압 도중 순직하여 주위를 슬프게 했다. 비록 36살의 길지 않은 생이었지만 천직에 목숨을 건 장한 삶을 살아낸 허 소방관의 살신성인의 정신은 우리 가슴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정부는 허귀범 소방관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려 소방사에서 소방교로 1계급 특진과 옥조근정 훈장을 추서하고, 국립대전현충원 소방공무원묘역에 제1호로 안장하여 고인의 공훈을 기리고 있다.(자료제공 : 대전국립현충원).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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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징 순국선열, 국립대전현충원 10월의 현충인물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우리말을 아끼고 사랑했던 언어학자 한징 선생은 1886년 서울에서 태어나 평생 우리말과 글을 지킨 독립운동가다. 어려서 한학과 국학을 공부한 선생은 15세에 사서삼경에 정통한 수재로 우리말과 글 연구에도 집중하기 시작했다. “말과 글은 민족정신의 가장 중요한 소산인 동시에 민족정신이 거기에 깃들이는 둥주리다. 민족 문화의 창조 계승 발전은 그 말과 글의 의지에 있다.” 선생은 1922년부터 시대일보, 중외일보, 조선중앙일보의 기자로 활동하면서 민족 언론 창달에 노력하였고, 1927년에는 계명구락부가 추진하던 조선어사전 편찬에 참여하였다가 편찬이 중단되자 조선어연구회의 우리말 사전 편찬 활동에 합류했다. 이후 1931년 조선어학회가 조직되자 회원으로 가입하고 조선어학회가 추진한 표준어의 제정과 우리말사전 편찬에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 표준어가 정해져 있지 않아 각 도의 사투리가 난무하여 합리적인 언어생활을 위해 표준어를 정해야 함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대의 아래, 조선어학회가 추진하던 표준어 사정작업에 선생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조선어학회는 조선 민중의 지지를 받아가며 민족어 3대 규범집 「한글 맞춤법 통일안(조선어 철자법 통일안)」(1933),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1936), 「외래어표기법 통일안」(1941)을 완성했다. 일제강점기의 국어사전 편찬은 ‘국권 회복 운동’의 연장선에 있었다. 조선어사전편찬회에서 진행하던 이 사업은 자금 문제로 난항을 겪다가 1936년 조선어학회로 인계되어 추진되었고 일제는 사전 편찬의 중요성을 알고 조선어학회 인사들을 주시하였다. 결국 조선어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일제가 조작한 ‘조선어학회사건’에 선생도 체포되어 악독한 고문과 심문을 받다 1944년 2월 함흥형무소에서 순국하셨다. 선생께서 목숨으로 지키고자 했던 우리말 사전은 순국하신 지 3년 만인 1947년이 돼서야 ‘조선말큰사전’으로 세상에 나오게 됐다. 정부는 한글운동으로 민족의 얼을 지키고자한 선생의 뜻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고,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1묘역 397호에 안장하여 고인의 공훈을 기리고 있다(자료제공 : 대전국립현충원).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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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의 6‧25전쟁영웅, ‘박기석 육군 이등중사·최재효 육군 하사’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가 ‘박기석 육군 이등중사·최재효 육군 하사’를 11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박기석 이등중사·최재효 하사는 철원지구 281고지전투에서 탁월한 전투력을 발휘해 고지를 재탈환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주인공들이다. 이들이 소속된 제9중대가 281고지 정상 20여m 전방에 이르렀을 때 중공군은 모든 자동화기를 동원하여 아군의 돌진을 필사적으로 저지하기 시작했다. 이를 격파하지 못하면 고지 점령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때 박기석 이등중사가 포복으로 중대장에게 다가가 특공대를 조직해 적의 자동화기 진지를 격파하겠다고 말했다. 중대장은 박 이등중사의 제안을 허락했고 최재효 하사를 비롯해 특공대 4명을 선발했다. 박 이등중사와 최 하사가 먼저 절벽을 기어올라 2개의 적 기관총진지를 각각 수류탄으로 파괴하고, 뒤이어 나머지 대원들이 백병전으로 중공군을 물리쳤다. 이에 당황한 중공군은 사분오열로 도주하였고, 특공대원들은 오전 11시 50분에 281고지를 탈환하였다. 이로써 아군은 적의 공세를 격파하고 철원 북쪽의 진지를 고수할 수 있었다. 281고지 탈환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박기석 이등중사와 최재효 하사는 1951년 11월 25일 충무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자료제공=국가보훈처).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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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의 독립운동가, 조경환 선생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조경환(曺京煥, 1876. 2.14.~1909. 1.10.) 선생을 2018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1876년 현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난 선생은 시대의 전환기에 유학(儒學)을 공부했다. 20세기 초반 노골적인 일제의 침략이 자행되던 시기에 전국을 순회하며 조국의 현실을 목도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서당을 차려 후학을 육성했다. 선생은 1906년 태인에서 을사늑약에 반발해 최익현과 임병찬 등 순창 12의사가 의병을 일으켰으나 서울로 압송되고 최익현은 대마도에서 순국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1907년 후반 재차 호남지방에서 기삼연과 김준 등이 고창읍성을 점령하는 등 맹활약을 떨치자 선생은 그 해 12월 중순 김준 의진에 합류하여 좌익장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선생은 김준 의진에서 좌익장을 맡아 함평읍, 창평 무동촌(茂洞村), 장성 낭월산(浪月山), 영광 월암산(月岩山), 광주 어등산(魚登山) 등 수많은 전투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했다. 1908년 음력 3월 어등산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의병장 김준이 순국하고, 일본군이 추격해오자 함평 당산촌 나평집(羅平集)으로 후퇴하여 후일을 도모했다. 일본군의 진압작전이 종료되고 감시망이 느슨해지자 흩어진 의병들을 다시 모아 전열을 정비하기 시작했고, 이때 전북 이석용(李錫庸)의진에서 활동하던 전수용과 연합하여 용진산(聳珍山)에서 200여 명 규모로 의진을 재편하고 의병장이 되었다. 의병장이 된 선생은 어등산에서 김준 의병장의 장례를 치르고 결사항전의 의지를 다졌다. 곧 용진산에서 군사들에게 음식을 베풀어 위로하고 광주 흑석(黑石)에 있는 일본군 순사대를 공격하며 의병장으로서 본격적인 전투를 시작했다. 조경환 의진은 1~200명 내외의 군세를 형성하여 전남 광주, 함평, 영광, 장성, 담양 등지를 무대로 활동했다. 의진은 일본제 30년식 보병총과 기병총 4정, 한병총(韓兵銃) 12정, 천보포(千步砲) 8문, 개조 화승총 약 60정 등의 열악한 무기로 일본군경과 맞서 싸웠다. 1909년 1월 혹한기를 맞아 대부분의 부하를 일시 귀향시키고, 귀가하지 않은 50여 명과 함께 어등산에 주둔했다. 그러나 의진은 일본군 광주수비군에 의해 주둔 사실을 탐지 당했다. 1909년 1월 10일(음력 1908년 12월 19일) 조경환 의진은 야마다 소위가 이끄는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전사 20명, 체포 10명의 피해를 입었다. 선생은 총탄을 맞고서도 부하들의 명단을 불사르고 어등산 전장에서 순국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조경환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자료제공=국가보훈처).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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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의 6‧25전쟁영웅, 딘 헤스 미국 공군 대령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가 ‘딘 헤스’ 미국 공군 대령을 10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딘 헤스 대령은 미국의 공군 장교로,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 공군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한국 공군의 F-51D 머스탱 18번기 신념의 조인기의 주인이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군은 대한민국 공군을 지원 할 제6146군사고문단을 창설하면서 대령을 책임자로 임명했다. 제6146군사고문단은 대한민국 공군 재건을 위한 작전을 한판 승부(Bout One)라 이름 짓고 부대명도 이 이름을 따서 ‘바우트 원 대대’라고 명명했다. 이후 미군은 바우트 원 대대를 해체시켜 미 공군에 전속시킬 것을 결정했지만, 헤스 대령은 상부에 부대의 존속을 결사적으로 주장해 존속할 수 있게 했다. 헤스는 전투기가 부족하다는 상부의 압박이 들어올 때마다 교육 중인 한국 조종사들과 함께 전투기를 타고 출격해 임무를 완수했다. 훈련부대였음에도 불구하고 헤스는 1951년 6월에 한국을 떠날 때까지 무려 250회나 출격하며 각종 전투임무를 수행했다. 당시 미 공군 조종사들이 100회의 출격을 달성하면 일본 등 후방으로 전출 보내주었던 것과 대조적으로 그는 한국에 남았고 끝까지 대대를 지켰다. 또한, 중공군 개입으로 전황이 급속도로 악화되면서 전쟁고아들을 대비할 계획을 세웠지만 단 1대의 항공기도 아쉬운 판국에 전쟁고아들을 실어 나를 비행기를 따로 편성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헤스는 적이 코앞까지 다가온 상황에서 김포 비행장을 뜨려 하던 수송기들을 붙잡아 950명의 고아와 80명의 직원을 제주도로 구출했다. 제주항공우주박물관에는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2017년 3월 9일 건립되었고, 대한민국 공군은 그를 전쟁 중 대한민국 공군의 아버지로 현양하고 있다(자료제공=국가보훈처).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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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의 독립운동가, 현천묵 선생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2018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현천묵 (玄天黙, 1862.4.9.∼1928) 선생을 선정했다고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이 밝혔다. 현천묵 선생은 함경북도 경성군 출신으로 40대 중반이었던 1906년 보성학교 학감으로 학교의 주요 업무와 학생들을 관리·감독하며 본격적인 교육활동을 시작했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된 이후 계몽단체인 대한협회 경성지회에 참여했고, 이후 지회장을 맡아 경성지회의 활동을 공고히 시키고 교육 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선생은 대한협회 경성지회를 이끄는 수장으로 교육과 자강을 통해 구국의 방법을 모색했으며, 경성의병을 지원하는 한편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등 항일전선에 앞장섰다. 1909년 선생은 우리겨레, 우리민족을 중심으로 하는 단군교(대종교)에 입교했고, 1910~11년 사이 북간도로 망명했다. 북간도 망명 이후 선생은 서일과 함께 중광단을 조직해 대종교 포교에 앞장섰고, 대종교에서 설립한 교육기관의 교장을 맡아 민족교육을 이어가며 이주한인 자녀들에게 교육받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고, 이들이 독립군으로 성장하도록 이끌었다. 또한 1919년 대한군정서의 부총재를 맡아 총재 서일을 보좌하며 단체를 이끌었고, 청산리 전투 이후 조직된 대한의용군 총사령부(후에 대한독립단)의 부총재를 맡았다. 1921년 자유시참변의 충격으로 서일이 자결한 후에는 대한군정서의 총재를 맡아 조직의 재정비를 담당했다. 대한군정서 총재로서 선생은 단체를 재정비하며, 대종교 포교 및 한인들의 교육,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에 힘썼다. 그리고 신민부의 중앙집행위원과 검사원장 등의 직책을 맡으며 적극적인 활동을 이어나갔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현천묵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자료제공=국가보훈처).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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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병탁 수경, 국립대전현충원 2018년 9월의 현충 인물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립대전현충원이 살신성인의 의로운 전경대원 ‘주병탁 수경’을 했다고 발표했다. 순직경찰 주병탁 수경은 2001년 4월 16일 해양경찰 전투경찰로 입대해 동년 6월 29일까지 해군훈련소 및 경찰종합학교에서 군사기본훈련과 전경직무과정을 수료했다. 이후 군산해양경찰서 111정을 거쳐 2001년 12월 29일부로 군산해양경찰서 홍원파출소 장포출장소로 전입해 근무를 시작했다. 주 수경은 2002년 8월 13일 서천군 장포리 해안에서 100m 해상에 빠져 위급한 상황에 처한 어린이 오 군을 구조하기 위해 바닷물로 뛰어 들었다. 주 수경은 100m를 헤엄쳐 허우적거리는 오 군을 꼭 붙잡고 다시 건너오기 위해 힘을 썼으나 만조로 불어난 바닷물의 몰아치는 거센 파도에 휩쓸리며 안타깝게도 순직하여 주위를 슬프게 했다. 국민의 소중한 생명을 구하고자 했던 주 수경의 숭고한 희생정신이 알려지자 군산에 마련된 빈소에는 애도의 물결이 이어졌고, 김대중 대통령은 살신성인의 정신을 보여준 주 수경의 빈소에 해양수산부장관을 보내어 고인을 애도하고 가족들을 위로했다. 정부는 자신의 위험을 돌보지 않고 어린 생명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져 살신성인의 정신을 보여준 주 수경에게 1계급 특진(상경에서 수경)과 해양경찰공로장을 추서했으며, 국립대전현충원 경찰제2묘역 509묘판 1515호에 안장하여 고인의 공훈을 기리고 있다(자료출처 : 국립대전현충원).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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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9월의 6․25 전쟁영웅, 박정모 해병대 대령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가 ‘박정모’ 해병대 대령을 9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보도했다. 박정모 대령은 1927년 3월 20일 전남 신안군에서 태어나 1946년 해군 1기로 입대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해병대 소대장으로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해 용전분투했다. 1950년 9월 27일, 서울탈환 작전 시 해병 제2대대 제6중대 1소대장으로서 소대원들과 함께 새벽에 공격을 시도했다. 치열한 교전 끝에 중앙청 안으로 들어가 중앙청 옥상에 걸려 있던 인공기를 걷어내고 태극기를 가장 먼저 게양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박 대령은 1951년 가리산지구 전투에서 최종 목표인 957고지를 해병대 최초로 은밀한 야간 기습공격을 감행해 탈취함으로써 국군과 유엔군의 총반격 작전인 리퍼(ripper)작전에 기여했고 도솔산지구 전투에서는 24개 목표 중 적의 최후 방어선인 제9목표를 7일 만에 탈취 확보함으로써 ‘무적해병’의 전통을 수립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정부는 6‧25전쟁기간 중 이룬 그의 혁혁한 공에 대해 을지무공, 충무무공 훈장을 수여했다. 박정모 대령은 2010년 5월 6일 향년 85세로 타계해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자료제공=국가보훈처).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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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9월의 독립운동가, 최용덕 선생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이 최용덕(崔用德, 1898.9.19.~1969.8.15.) 선생을 2018년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선생은 1898년 9월 19일 서울 성북동에서 태어나 경술국치 이후 중국 북경으로 건너가 새로운 사상을 익혔고, 1916년 원세개가 설립한 중국 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단기서 군의 제2사단에서 복무했다. 1919년 중국에서 3.1만세운동 소식을 접한 선생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해 다수의 한인독립운동가들과 유학생들이 거주하던 중국 북경지역을 중심으로 대한독립청년단 단원 모집을 위해 활동했다. 1921년 4월 이후 의열단에 참여해 단장 김원봉과 함께 1922년 의열단의 국내거사를 준비하여 김상옥 의사의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 의거를 지원했다. 이후 북경에서 민족유일당운동에 참여하여 1926월 10월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 결성에 기여했다. 선생은 독립운동과 더불어 중국 국민혁명군에서 복무했으며, 중화민국 공군 창설에 참여하여 중국 공군 대령으로 활약했다. 1940년 9월 임시정부의 국군인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비서처장에 임명되어 총사령 이청천을 보좌했고, 1942년과 1943년 총사령부의 편제가 개편되면서 각각 총무처장과 참모처장에 임명되어 한국광복군의 운영과 실무를 총괄했다. 그리고 1943년 임시정부 국무위원회에 비행대 창설을 건의해 공군설계위원회의 설계위원 및 부주임을 맡아 임시정부의 공군 창설 준비를 추진했다. 해방 후에는 화북지역의 한교선무단의 군사조장으로 군무를 총괄하고, 북평잠편지대의 지대장으로 한국광복군 확군 활동에 기여했으며, 1946년 7월 귀국하여 줄곧 군인으로서 공군 창설에 노력했다. 대한민국 정부 초대 국방부 차관, 공군사관학교 교장, 제2대 공군참모총장을 지내고 1956년 공군 중장으로 예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최용덕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자료제공=국가보훈처).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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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지방보훈청, 2018년 9월의 우리지역 독립운동가 ‘이종건’ 선생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대전지방보훈청이 9월의 우리지역 독립운동가로 ‘이종건’ 선생을 선정한다고 밝혔다. 이종건(李鍾乾, 1906.5.14~1960.6.19) 선생은 1906년 5월 14일 충청남도 천안군 수신면 속창리에서 태어나 1928년 휘문고보를 졸업했다. 선생은 중국으로 망명한 후 1931년 북경(北京)에서 한족동맹회(韓族同盟會)에 가입하고, 일경의 밀정 신 모(申某)를 주살한 뒤 상해로 피신했다. 그해 10월 대한교민단 의경대원(義警隊員)에 임명되어 출입국자들의 신상파악과 독립운동가들의 신변보호에 전념했다. 같은 해 12월 24일 임시의정원 충청도 대표의원에 선출되어 1933년 3월 6일까지 의정활동에 참여했고 1933년 박찬익(朴贊翊) 등과 한국독립당 남경지부 간부로 활동했다. 1935년 4월에는 중국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를 졸업하고 남경에 머물면서 민족혁명당 창당에 참가했고 1936년 봄에는 동당 훈련단에서 훈련을 받기도 했다. 1942년에 광복군 제1지대에 편입되었고 1944년 3월에는 민족혁명당 감찰위원에 선임되기도 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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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지방보훈청 2018년 8월의 우리지역 독립운동가, ‘문양목 선생’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대전지방보훈청이 2018년 8월의 우리지역 독립운동가로 ‘문양목 선생’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문양목 선생은 1894년 동학혁명에 참여했다가 실패하고 1903년 하와이로 망명했다. 1906년 미국 본토 샌프란시스코로 도항하여 1907년 3월 대동보국회를 결성하고 회장등으로 활동하면서 1909년 1월 경까지 대동공보사(大同公報社) 사장, 대동공보(大同公報) 주필 등으로 활동했다. 선생은 1908년 일본인의 한국침략을 정당화시키는 스티븐의 발언을 비판하고 시정을 요구했으며 이승만 저술 「국민개병설」과 「군인수지(軍人須知)」를 발간해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1909년경 박용만이 네브라스카에 ‘소년병학교’를 개설하자 학생들을 권유하여 입교시켰으며 1911년에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총회장(總會長), 1912년에는 신한민보(新韓民報) 주필로 활동했고 1918년까지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의 회원으로 활동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자료제공=대전지방보훈청).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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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월선 애국지사, 국립대전현충원 2018년 8월의 현충인물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립대전현충원이 일제 강점기에 조선의용대로 활약한 여성 광복군 ‘전월선(1923.2.6~2009.5.25) 애국지사’를 8월의 현충인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전월선 애국지사는 경북 상주 출신으로 1939년 9월 중국 귀주성 계림에서 조선의용대에 입대해 일본군에 대한 정보수집 등 공작활동을 전개했다. 1942년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으로 편입된 그해 4월 20일부터 광복 직전까지 광복군 제1지대 대원으로 활동했다. 전 애국지사는여성 광복군으로 활동하면서 김근수(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애국지사와 결혼해 부부가 함께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정부는 전월선 애국지사의 공로를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으며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4묘역에 안장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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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의 6․25 전쟁영웅, 허봉익 육군 대위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가 ‘허봉익’ 육군 대위를 8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허봉익’ 육군 대위는 1950년 8월 죽음으로 적진을 막아선 안동전투의 영웅이다. 안동지구 전투는 1950년 6월 25일 6·25전쟁이 발발한 후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으로 철수하기 직전에 국군 제8사단과 수도사단 1연대가 안동지역에서 북한군 제12사단과 제8사단 소속 일부 병력의 침공을 4일간 저지한 방어전투이다. 7월 31일 새벽 북한군 제12사단이 전차를 선두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자 육군본부는 낙동강방어선 형성계획에 따라 7월 31일 24시를 기해 안동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하고 명령을 하달했다. 제8사단 16연대는 북한군 1개 연대와 치열한 접전을 벌이다가 철수명령을 뒤늦게 받아 북한군에게 포위되어 각개로 철수를 진행했고 포위망 돌파와 도하과정에서 연대병력 중 장교 21명과 병사 814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는 손실을 입었다. 이 과정에서 제3대대 3중대장 허봉익 대위는 임전무퇴의 정신을 발휘해 2개 소대 병력을 인솔하여 안동 점령을 기도하는 북한군 2개 대대 병력과 백병전을 전개했다. 허 대위가 지휘하는 제3중대는 북한군 1개 중대를 격멸하고 압축된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해 고군분투했으나 북한군의 포격과 중과부적으로 인해 허봉익 대위는 현장에서 전사했다. 1950년 8월 2일 안동에서 전사한 그의 유해는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고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려 1954년에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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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의 독립운동가, 김교헌 선생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이 김교헌(金敎獻, 1867.07.05.~1923.11.18.) 선생을 2018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김교헌 선생은 1867년 경기도 수원군 구포리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18세가 되던 1885년에 정시문과(庭試文科) 병과(丙科)에 급제했다. 1898년부터 독립협회에서 몸담기 시작한 선생은 독립협회 간부진들이 개혁내각 수립과 의회개설을 요구하다가 구속되자, 독립협회의 대표위원으로 만민공동회 운동을 전개하는 등 민중계몽에 앞장섰다. 1906년 동래부사에 임명된 선생은 부산에서 통감부의 비호 아래 일본인들이 한인들을 대상으로 경제적 침탈과 만행을 자행하는 것을 목격하고 일본인들의 횡포를 제지하다가 통감부의 압력과 친일파 송병준의 모함을 받고 해직됐다. 선생은 1910년 한국이 일본에 강제병합 당하자 대종교에 입교하고 1914년 「신단실기(神壇實記)」와 「신단민사(神壇民史)」를 저술했다. 이 책은 단군을 중심으로 한 민족서사로서 망국이후 한국 국민들의 애국혼을 고취했다. 조선총독부는 1915년 10월 포교규칙을 발표하고 대종교를 항일독립운동단체로 규정하여 탄압을 가하는 가운데 1916년 9월 대종교 2대 교주로 취임한 선생은 대종교 본사를 만주 화룡현(和龍縣)으로 옮기고, 항일무장투쟁 역량을 강화하고자 46개의 시교당을 각 지역에 설치하여 민족교육을 전개했다. 1919년 2월 대종교 교주로서 대종교 주요 인사 및 해외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와 함께 뜻을 모아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해 세계 각국에 ‘한일합방’은 무효임을 선언하고, 향후 수립될 국가는 자주·독립적인 민주공화제에 기반을 둘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또한, 1919년 3월 24일 만주 안도현(安圖縣)에서 대종교인, 학생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전개하며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했으며 1919년 10월 서일, 현천묵 등 대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에 참여해 1920년 10월 홍범도, 김좌진이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끄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청산리대첩에서 패배한 일본은 만주거주 한인들을 대상으로 학살을 자행했다. 그 상황에서 대종교의 지도자중 한명이었던 서일이 순국했다. 이에 선생은 한인들을 보호하고 대종교를 지키고자 본사를 영안현(寧安縣)으로 옮겼다. 서일의 죽음과 일본의 한인 학살에 충격을 받은 선생은 1923년 11월 18일 본사 수도실에서 순국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김교헌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