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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의 6‧25 전쟁영웅, ‘정락구’ 육군 중위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황기철)는 ‘2022년 1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정락구’ 육군 중위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지난 31일 보훈처에 따르면 정락구(1928.11.28.~1952.10.14.)
중위는 6·25전쟁 기간인 1952년 10월 6일부터 10월 15일까지 중국군 제38군에 맞서 치열하게 싸운 강원도 철원의 ‘백마고지 전투’에서 국군 제9사단 28연대 11중대 소대장으로 임무 수행 중에 적의 수류탄을 온몸으로
막아 부하들을 구하고 장렬히 전사한 전쟁영웅이다.
정락구 중위는 1928년 11월 28일 충청북도 괴산에서 출생했고, 6‧25전쟁 중인 1952년에 갑종장교 제12기로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국군 제9사단 28연대 11중대 소대장으로 근무하였다.
1952년 10월 13일에 정 소대장(당시 계급은 소위)은 자신의 소대를 이끌고 백마고지의 외곽 능선을 공격하던 중 진지 속에 엄폐한 적군의 치열한 사격을 받았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정 소대장은 먼저 앞으로 계속 전진하였고, 그의
용기에 감복한 소대원 3명도 함께 적의 진지를 향해 돌격하였다.
정 소대장은 적의 거세지는 사격에도 계속 전진하여 수류탄을 투척해 적의 기관총 진지를 격파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날아온 적의 수류탄을 온몸으로 막아 부하들을 구하고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러한 살신성인 정신으로 임무를 수행한 정 소대장의 죽음으로 분개한 소대원들은 즉시 공격을 가해 적에게 큰 피해를
입히고, 적 진지를 탈환하였다.
정락구 중위는 생전인 1952년 7월 20일 화랑무공훈장을 수여받았고, 전사 후에 그에게 백마고지 전투
등의 공적으로 1953년 6월 9일에 미국의 십자수훈장(Distinguished Service Cross)이, 1953년 7월 1일에는
을지무공훈장이 추서되었다.
한편, 정락구 중위가 받은 십자수훈장은 6‧25전쟁 중 한국인으로선 단 4명에게만
수여된 것이었으며, 정락구 중위의 유해는 2010년 국립대전현충원
장병 3묘역에 안장되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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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의 독립운동가, 제주해녀항일운동을 주도한 ‘부춘화·김옥련·부덕량’ 선생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공동으로 부춘화·김옥련·부덕량 선생을 ‘2022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지난 31일 국가보훈처(처장
황기철)에 따르면 이번에 선정된 세분의 선생은 1931~1932년에
걸쳐 제주도 일대 해녀들을 중심으로 일제와 해녀조합의 수탈과 착취에 항거한 제주해녀항일운동을 주도한 분들이다.
‘제주해녀항일운동’은 일제강점기
여성들이 주체가 된 민족운동으로, 연인원 1만 7천여 명이 참여한 제주도 최대 항일운동이다. 일제의 부당한 경제적
차별과 수탈, 그리고 억압에 저항한 조직적인 투쟁으로써, ‘법정사항일운동’, ‘조천만세운동’과 함께 제주 3대
항일운동의 하나로 꼽힌다.세분의 선생 모두 제주도 구좌면(현,
구좌읍) 출생으로, 부춘화 선생은 15세에, 김옥련 선생은 9세에, 부덕량 선생은 13세에 가족 생계에 보탬을 위해 어린 나이에 해녀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제주도의 토지는 척박하여 여성이라면 해녀 생활을 하지 않으면 살아가기 어려웠고, 근대 교육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러나 선생들은 1928년부터
1931년까지 하도보통학교 야학강습소에서 함께 공부하고 근대 항일·민족의식을 깨우치기 시작했다.
1930년 해녀조합의 우뭇가사리 해조류 부정판매에 항의하던 하도리
청년들이 일제 경찰에 검거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하도리 해녀들도 함께 저항하기 시작하였다.
이듬해인 1931년 12월
일제의 해녀 착취에 항의하기 위해 세분은 하도리 해녀 회의에서 대표로 선출되었다.
1932년 1월 12일은 제주시 구좌면 세화리 장날이자, 제주도사(현, 제주도지사) 겸 해녀조합장이 부임 후 순시하러 구좌면에 오는 날에 하도리 해녀들을 포함한 제주 일대 해녀들이 호미와 비창(전복을 따는 도구)을 휘두르며 시위를 시작했다.
특히, 세분의 선생은 해녀들을 규합하며 시위에 앞장섰고, 모든 해녀 투쟁 참여자를 대표하여 “도사의 조합장 겸직 반대, 일본 상인 배척” 등의 요구조건 관철을 위해 제주도사와 직접 협상했다.
이러한 과정에 위협을 느낀 제주도사는 요구조건을 5일 내에 해결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제주도사가 돌아간 이후 일제는 무장경찰을 출동시켜 1월 23일부터 27일까지 34명의
해녀 주동자들과 수십명의 청년들을 체포했다.
세분의 선생은 경찰에 체포되어 미결수로 수 개월간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어 고초를 겪었고, 안타깝게도 부덕량 선생은 고문 후유증으로 몸이 극도로 쇠약하여 28세
나이로 사망했다.
정부는 선생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부춘화 선생에게 2003년 건국포장을, 부덕량 선생에게는 2005년 건국포장을 각각 추서했으며, 김옥련 선생에게 2003년 건국포장을 수여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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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2021년 3월의 호국인물, 김교수 육군대위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은 2021년 3월의 호국인물로 ‘김교수 육군대위’를 선정했다.전쟁기념관에 따르면 김교수 대위는 1923년 6월 19일 함경남도 함흥시 신보리에서 태어났다. 북한 치하에서 흥남공업대학 2학년을 수료하고, 1950년 12월 흥남철수작전을 통해 월남한 뒤 군에 자원입대했다. 이후 육군종합학교 제32기를 거쳐 1951년 8월 18일 소위로 임관하여 국군 제6사단 제2연대 소속의 소대장으로 2년 가까이 고지쟁탈전의 현장을 지켰다.휴전을 불과 2주 앞둔 1953년 7월 10일, 금성돌출부를 방어하던 국군 제6사단은 중국군의 최후 공세를 맞아 교암산을 둘러싸고 격전을 벌였다. 제2연대 제6중대장 김 중위(당시)는 12일 교암산 ‘가’고지의 진지를 인수했으나, 다음날인 13일 21시부터 격렬한 포격에 이어 중국군 4개 대대 규모 병력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다.
사단의 전초진지 전체가 돌파될 위기에 처한 순간, 김 중위가 지휘하는 제6중대는 진지 내로 돌입한 적 부대와 백병전을 벌이고 6차례나 진내사격을 요청하며 14일 새벽까지 8시간 동안 적의 공격을 격퇴했다. 이 과정에서 중대장 김 중위를 비롯하여 제6중대원 대부분이 전사하는 큰 피해를 입고 끝내 교암산을 빼앗겼다. 그러나 이들의 희생으로 사단은 인접부대를 주저항선으로 안전하게 철수시키고 금성천 일대에 전선을 정비하여 현재의 휴전선을 확보할 수 있었다.
정부는 최후의 순간까지 교암산 ‘가’고지를 지켜낸 김교수 중위의 공적을 기려 1953년 10월 13일 국군 최고의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훈기번호 제132호)과 1계급 특진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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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전현충원 2021년 3월의 현충인물, 홍준옥 애국지사
【중앙보훈방송=김하늘 기자】 국립대전현충원이 2021년 3월의 현충인물로 ‘홍준옥 애국지사’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국립대전현충원에 따르면, 홍준옥 지사는 1888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 1919년 3월 화성군 송산면 사강리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송산면 뒷산에서 1천여 명의 군중이 모여 대대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됐다. 일본인 순사부장이 이를 제지하려 했으나 군중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독립만세운동을 이어나갔다. 홍준옥 지사는 도주하는 순사부장과 일경을 추격하여 투석으로 격살 시키는 등, 격렬하게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피체되어 1920년 7월 5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소요·살인 및 보안법 위반혐의로 징역 1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고,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1묘역 제2호에 안장하여 그 업적을 기리고 있다. 김하늘 기자 hn90071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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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의 독립운동가, 이인정·송재만·한운석 선생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공동으로 '이인정·송재만·한운석 선생'을 '2021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국가보훈처(처장 황기철)에 따르면 선생들은 대호지면·정미면(현 당진시)에서 일제에 맞서 민·관이 하나 되어 주도면밀하게 준비하고 다양한 계층이 적극적으로 참여한 4·4 독립만세운동의 주역들이다. 선생들은 고종의 국장과 3․1독립만세운동을 목격하고 내려온 대호지면 유생들과 협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실행하는 일을 주도적으로 수행했다. 먼저, 이인정 선생(1859~1934)은 대호지면 면장으로 만세운동 준비를 전반적으로 지휘했으며, 송재만 선생(1891~1951)은 만세운동을 위해 작성한 도로 수선 공문을 면내 8개 마을 이장 집을 직접 방문해 전했고 마을 주민들에게 만세 내용을 안내했다. 도호의숙에서 학생을 가르치던 한운석 선생(1884~1950)은 만세 계획과 애국가 작사를 요청받은 후 그 자리에서 애국가를 작사하고 참여계획을 논의했다. 4월 4일 대호지면 면사무소 앞에 집합한 면민 400~500명에게 이인정 선생은 “도로 수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조선독립운동을 위해 모이게 한 것이다.”라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천의시장으로 향해 가자”라고 연설했다. 그리고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하며 적극적으로 만세운동을 지휘했다. 송재만 선생은 사전에 준비한 태극기를 꺼냈고 애국가가 적힌 인쇄물을 배포했다. 그리고 오전 11시경 천의시장에 도착해 시장 일대와 천의경찰관주재소, 정미면사무소 등을 행진하면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일본 경찰들은 오후가 되어 귀가하려는 민중들에게 태극기를 탈취하려고 시도했고, 군중들은 저항하며 돌을 던지고 일경을 구타하며 격렬하게 저항했다. 이러한 일경의 검거 및 탄압으로 이인정, 송재만 선생 등이 체포되는 등 1차로 17명이 검거를 당했다. 계속된 탄압으로 군인과 경찰에 의해 200여 명 이상이 검거되어 고초를 겪었고, 그중에서 재판에 54명이 회부 됐다. 이인정, 한운석 선생은 1920년 2월 7일 상고 기각으로 징역 1년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고, 송재만 선생도 같은 날 상고 기각으로 징역 5년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조직적이고 대규모로 일어난 만세운동으로 인해 일제의 탄압도 극렬하여 순국 3명, 태형 88명, 불기소 65명, 면소 4명, 징역 39명 등 199명이 처벌을 받았으며, 이에 2020년까지 총 124명이 독립유공자로 서훈 됐다. 당시, 만세운동에 참여한 남상락(‘90, 애족장) 선생이 부인 구홍원 선생과 같이 하얀 명주 천에 색실로 자수를 놓은 태극기를 사용했다. 이후 이 자수 태극기는 국가등록문화재 386호로 등재됐고, 2021년 3월의 독립운동가 홍보 포스터에도 반영되었다. 정부는 선생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이인정·송재만·한운석 선생에게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각각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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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의 6·25 전쟁영웅, 임택순 공군 대위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황기철)는 ‘임택순 공군 대위’를 ‘2021년 3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처에 따르면 임택순 대위(1930.12.31.~1953.3.6.)는 6·25전쟁 중 1953년 3월 6일 강원도 고성 월비산지구와 351고지에서 작전 수행 중 적 대공포에 피탄되자 전투기와 함께 적 대공포 진지로 돌입하여 장렬히 전사했다. 임택순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7월 10일 공군사관학교 1기로 졸업하여 소위로 임관했다. 임관 후 그는 제21정찰비행대대와 제15교육비행전대에서 임무를 수행했으며, 1953년 1월 5일 강릉 제10전투비행전대로 전속되어 F-51 무스탕을 조종하며 적진을 공격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952년 3월 6일 임택순 중위(당시) 동부전선의 요충지로서 2년 동안 격전이 거듭되던 강원도 고성 351고지의 방어를 돕기 위해 열두번째 출격에 나섰다. 임택순 중위는 351고지의 적의 진지를 파괴하고 재차 공격을 위해 진입하던 중 적군의 대공포탄에 우측 날개가 피탄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게 됐다. 이때 지상에서 이를 지켜보던 전방공중통제관은 임 중위에게 신속히 탈출할 것을 권유했으나, 그는 그대로 기수를 적진으로 향해 마지막까지 조국을 위한 충정을 바치며 그렇게 아끼던 전투기와 함께 장렬히 산화하며 호국의 별이 됐다. 공군사관학교 출신 조종사로서 최초의 전사자가 된 임택순 중위의 전공을 기려 대한민국 정부는 1953년 4월 20일 대위로 1계급 특진과 함께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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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 이달의 충북여성독립운동가, 한말 최초의 여성 의병 대장 '윤희순' 선생
【중앙보훈방송=신경호 기자】 충북도는 금년 2월부터 그동안 역사에서 소외되었던 충북여성독립운동가 열 분의 삶과 발자취를 기리기 위하여 매월 도정소식지와 SNS를 통해 한분씩 소개한다고 밝혔다. 먼저, 이달의 충북여성독립운동가로 충북 중원군(현재 충주)이 본적인 한말 최초의 여성 의병 대장 윤희순 선생의 삶을 소개한다. 윤희순 선생은 1895년 시아버지 유홍석이 의병을 일으켰을 때 여성들을 모아놓고 “나라를 구하는 데에는 남녀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며 여성들의 의병활동을 촉구했다. 1907년 일본이 한국군대를 해산하고 고종 강제퇴위를 진행하던 때 유홍석 등이 의병을 모아 일본군과 전투를 하였고, 이때 윤희순은 군자금을 모으는 동시에 무기와 탄환을 제조·공급하는 탄약제조소를 운영하기도 했다. 나아가 여성 30여 명으로 여성의병대를 조직하는 한편, 《안사람 의병가》등 8편의 의병가를 작사·작곡하고, 4편의 경고문을 제작·배포하는 등 여성들의 의병활동을 이끌어내는데 적극 앞장섰다. 1911년에는 중국 만주로 이주하여 에 가입하는 등 항일운동을 지속하였고, ‘노학당’과 조선독립단학교를 설립하는 등 군사교육을 통해 학생들을 애국투사로 길러내고자 했다. 꽃다운 삶을 광복을 위해 바친 그는 40년 이상 지속된 일제의 핍박속에서 아들 유돈상이 일제의 고문으로 순국한지 11일 만에 향년 76세의 나이로 이역만리에서 눈을 감았다. 오랜 활동에도 사진과 자료는 많이 남아있지 않지만, 그가 쓴 “의병가사집”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한글로 쓰여진 노랫말은 그의 강한 항일정신과 애국심을 떠올리게 한다. 충북도는 독립에 대한 열망 하나로 민족의 아픔을 끌어 안은 채 불꽃 같은 삶을 살다간 여성독립운동가 중 충북에 연고가 있는 열 분을 기리는 반신상을 제작하여 충북미래여성플라자 내에 전국 최초로 충북여성독립운동가 전시실을 조성해 지난해 8월부터 개관·운영하고 있다. 또한 충북도는 이번 3.1절에 충북여성독립운동가 열 분의 반신상과 주요행적을 예술의전당에 전시할 예정이다. 한편, 온라인 전시실을 통해서도 충북의 여성독립운동가 16명에 대한 인물별 소개와 동영상자료, 가상(VR)전시관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신경호 기자 rudgh973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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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2021년 2월 호국인물, 김용식 육군 일등병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은 2021년 2월의 호국인물로 ‘김용식 육군 일등병’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전쟁기념관에 따르면 故 김용식 일등병(1931.2.8~1950.9.29)은 1931년 2월 8일 경기도 옹진군 부민면에서 태어나, 6·25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50년 5월 육군에 자원입대했다. 이후 전쟁의 발발로 전선의 상황이 급박해지자 입대한 지 1개월 만에 제주도 신병훈련소를 나와, 당시 낙동강 방어선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던 수도사단 제17연대 제9중대의 보충병으로서 최전선에 배치되었다.1950년 8월 24일, 제17연대는 포항 비학산을 탈환하기 위한 공세를 전개하고 있었다. 당시 비학산은 앞선 안강-기계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고 퇴각한 북한군 제12사단과 제766부대가 마지막 방어거점을 구축한 곳이었다. 예상 밖의 강력한 저항을 맞아 국군의 공격이 지연되는 가운데, 김 이등병(당시)은 같은 소대원인 홍재근 이등병(전쟁기념관 1월의 호국인물)과 함께 첨병 임무에 자원하여 적의 진지를 기습했다. 두 사람은 적의 기관총 진지까지 포복으로 다가간 뒤 착검한 채로 돌격하여 기관총 사수와 장교를 쓰러트리고, 적 15명을 사살 또는 생포하는 전공을 세웠다. 비록 연대는 이 날 비학산을 점령하는 데 실패하였으나, 두 신병이 보여준 용맹함은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는 수많은 장병들의 귀감이 되었다. 김 이등병은 이후 인천상륙작전과 서울탈환작전에 참여했으며, 안타깝게도 1950년 9월 29일 구리 백교리(現 교문동)에서 북한군과 교전 중 적 다수를 사살하고 전사하였다. 정부는 故 김 이등병의 전공을 기려 1951년 7월 26일, 그와 같은 날 전사한 故 홍재근 이등병과 함께 사병으로서는 최초로 국군 최고의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훈기번호 제12호)과 1계급 특진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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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전현충원 2021년 1월의 현충인물, 민관식 국가사회공헌자
【중앙보훈방송=김하늘 기자】 국립대전현충원이 2021년 1월의 현충인물로 한국스포츠 근대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민관식 국가사회공헌자’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국립대전현충원에 따르면, 민관식 국가사회공헌자는 1918년 개성에서 태어나 경기고의 전신인 경성제일고보와 수원고등농림학교(현 서울대 농대)를 졸업한 후 일본에 건너가 교토제국대학 농예화학과를 졸업했다. 해방 이후, 언론인 및 정치인으로 활동한 그는 대한체육회장, 대한올림픽위원장, 문교부장관 등을 역임하면서 체육계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건강을 잃으면 인생 전부를 잃는다”는 생활신조를 지녔던 그는, ‘태릉 국가대표 선수촌’ 건립을 본인의 가장 자랑스러운 공으로 여겼다. 정부는 한국스포츠 발전에 이바지한 공을 인정하여 민관식 국가사회공헌자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 청조근정훈장, 체육훈장 청룡장 등을 수여하였으며, 현재 그는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묘역 14호에 안장되어 있다. 김하늘 기자 hn90071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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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의 독립운동가, 권쾌복·배학보·유흥수 선생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공동으로 ‘권쾌복·배학보·유흥수 선생’을 2021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29일 국가보훈처(처장 황기철)에 따르면 권쾌복(1921~2009)·배학보(1920~1992)·유흥수(1921~2016) 선생은 대구사범학교 내의 비밀결사인 ‘다혁당 (茶革黨) 사건’의 주요 인물들이다. 다혁당은 항일운동 역량을 하나로 결집하기 위해 대구사범학교 전 학년이 참여하는 단체를 만들기 위해 결성됐지만, 5개월 만에 일제에 발각되어 본격적인 활동은 하지도 못하고 와해됐다. 세 명의 선생은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어려운 가정 형편과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 모습에 매료되어 1937년 4월에 대구사범학교 심상과 9기생으로 입학했다. 그러나 민족차별 교육이 자행되던 학교에서 1939년 학생들의 노동력 강제동원과 일본과 조선학생의 마찰로 빚어진 왜관사건으로 폭발했으며 많은 대구사범학교 조선인 학생들이 본격적으로 항일운동에 뛰어드는 원인이 됐다. 세 명의 선생은 왜관사건 이후 조선 역사와 문학 관련 서적, 잡지 등을 읽고 시국에 관한 의견을 나누는 모임인 ‘백의단’을 결성했으며, 이후 다혁당으로 발전했다. 1940년에 감시와 통제가 심해지고, 그해 11월 23일 유흥수 선생은 독서회 참가자들과 일제 식민지로부터 벗어나 독립할 것을 목표로 하는 비밀결사인 ‘문예부(文藝部)’를 결성했고, 『학생(學生)』 이라는 잡지를 만들어 학생들에게 배부했다. 또한 다가올 독립에 대비할 목적으로 학문 분야를 연구하여 실력을 양성하는 또 하나의 비밀결사인 ‘연구회(硏究會)’가 조직됐다. 1941년 2월 중순 유흥수 선생은 권쾌복 선생과 배학보 선생 등을 만나 역량을 결집하기 위해 통합된 비밀결사 조직인 ‘다혁당(茶革黨)’을 결성했다. 다혁당은 조직 체계에서 당수와 부당수를 두고, 총무, 문예, 예술, 운동부 등 4개 부서를 두고 기존의 활동을 계승했으며, 특히 문예부 산하에 문예창작부와 연구부를 두었는데, 이전의 ‘문예부’와 ‘연구회’를 계승한다는 의미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권쾌복 선생은 당수를 맡았으며, 배학보 선생은 부당수를 맡고, 유흥수 선생은 문예부 산하 문예창작부 책임을 맡았다. 이렇게 통합되어 활발한 활동을 준비하던 다혁당은 갑작스러운 사건이 발생했다.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활동하던 정현이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내용이 발각되어 1941년 7월에 일제 경찰에 체포됐다. 수사과정에서 다혁당 활동이 발각되어 다혁당은 결성된 지 5개월여 만에 일제 경찰에 와해됐다. 이후 대규모 검거 열풍이 불어 1941년 12월에 35명이 재판을 받았는데, 이 시기 비밀결사 사건으로서는 가장 큰 규모였다. 다혁당 사건은 지식인들이 변절하고 항일운동이 침체 된 시기에 벌어진 운동으로, 조선의 독립을 확신하고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교육운동이자 민족운동으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정부는 선생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권쾌복 선생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배학보 선생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유흥수 선생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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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의 6·25 전쟁영웅, '윌리엄 스피크먼' 영국 육군 병장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황기철)는 윌리엄 스피크먼(William Speakman) 영국 육군 병장을 2021년 2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29일 보훈처에 따르면 윌리엄 스피크먼(1927.9.21.~2018.6.20.)은 6·25전쟁 중 1951년 11월 4일 군사 요충지였던 마량산에서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백병전을 감행, 중공군의 남하를 저지하고 중대 철수작전을 완수했다. 1927년 9월 21일에 태어난 스피크먼은 영국 육군 왕실 스코틀랜드 국경연대 제1대대 소속으로 6·25전쟁에 참전했다. 스피크먼(당시 이병)은 1951년 11월 4일 군사 요충지였던 경기도 연천 마량산을 방어하는 임무에 투입됐다. 당시에 수적 우위를 이용해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던 중공군의 공격으로 많은 전우가 부상을 당하자, 6명의 전우를 모아 적진에 수류탄을 던지며 백병전을 감행했다. 스피크먼은 전투에서 다리와 어깨에 심한 부상을 입었음에도, 중공군의 남하를 저지하며 방어선을 끝까지 사수했고 중대는 피해 없이 퇴각할 수 있었다. 1952년 1월 부상 때문에 영국으로 후송되었지만, 3개월 뒤 자진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그해 8월까지 전장을 누볐다. 윌리엄 스피크먼은 전공을 인정받아 1952년 2월 영국 최고 무공훈장인 빅토리아 십자훈장을 받았고, 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 7월 태극 무공훈장을 수여하며 숭고한 희생정신에 감사를 표했다. 국가보훈처는 “자신이 싸워 지켜낸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다”라는 스피크먼의 유언에 따라 2018년 6월 타계한 그의 유해를 2019년 2월에 봉환식을 거쳐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안장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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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2021년 1월의 호국인물, ‘홍재근 육군일등병’ 선정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은 2021년 1월의 호국인물로 ‘홍재근 육군일등병’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전쟁기념관에 따르면 故 홍재근 일등병은 1928년 12월 10일 경상북도 대구시 비산동에서 태어나, 6·25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50년 5월 육군에 자원입대했다. 이후 전쟁의 발발로 전선의 상황이 급박해지자 입대한 지 1개월 만에 제주도 신병훈련소를 나와, 당시 낙동강 방어선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던 수도사단 제17연대 제9중대의 보충병으로서 최전선에 배치되었다. 1950년 8월 24일, 제17연대는 포항 비학산을 탈환하기 위한 공세를 전개하고 있었다. 당시 비학산은 앞선 안강-기계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고 퇴각한 북한군 제12사단과 제766부대가 마지막 방어거점을 구축한 곳이었다. 예상 밖의 강력한 저항을 맞아 국군의 공격이 지연되는 가운데, 홍 이등병(당시)은 같은 소대원인 김용식 이등병과 함께 첨병 임무에 자원하여 적의 진지를 기습했다. 두 사람은 적의 기관총 진지까지 포복으로 다가간 뒤 착검한 채로 돌격하여 기관총 사수와 장교를 쓰러트리고, 적 15명을 사살 또는 생포하는 전공을 세웠다. 비록 연대는 이 날 비학산을 점령하는 데 실패하였으나, 두 신병이 보여준 용맹함은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는 수많은 장병들의 귀감이 되었다. 홍 이등병은 이후 인천상륙작전과 서울탈환작전에 참여했으며, 안타깝게도 1950년 9월 29일 구리 백교리(現 교문동)에서 북한군과 교전 중 적 다수를 처치하고 전사했다. 정부는 故 홍 이등병의 전공을 기려 1951년 7월 26일, 그와 같은 날 전사한 故 김용식 이등병과 함께 사병으로서는 최초로 국군 최고의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훈기번호 제11호)과 1계급 특진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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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출신 2021년 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고사만 선생
【중앙보훈방송=오천지창조 기자】 제주특별자치도보훈청이 제주 출신 2021년 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고사만 선생’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제주보훈청에 따르면, 고사만(1908.10.23.~1962.10.13.) 선생은 제주 구좌 종달 1941 출생으로 제주도에서 해녀들의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투쟁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1927년 사회주의를 받아들이고 혁명적 농민조합 결성을 위해 활동했다. 1930년 그는 문도배·신재홍 등과 혁우동맹(革友同盟)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한 후 농민부·청년부·소년부·여성부를 편성하여 분야별로 계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사유재산제도와 일본제국주의를 부인하는 사회주의 선전에도 나섰다. 조선공산당 제주 야체이카 조직 등에 나선 고사만은 혁우동맹을 해소시키고 농민단체와 해녀조합 결성을 주도했다. 이런 가운데 제주지역에서는 민족적 열기와 식민체제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어 갔다. 1931년 1월 제주에서는 해녀들에 대한 불합리한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투쟁이 일어났다. 관제적인 해녀어업조합에 반대하고 있던 해녀들은 1천여 명의 시위대로 일경에 맞섰다. 이때 고사만은 해녀들의 항일운동 배후지도자로 지목되어 일경에 붙잡혀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재판이 지연되는 가운데 1년 10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오천지창조 기자 oh-5004-o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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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의 독립운동가, 기우만·박원영·김익중 선생···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반발하여 1896년에 일어난 호남지역 의병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공동으로 ‘기우만, 박원영, 김익중 선생’을 ‘2021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에 따르면 기우만(1846~1916)·박원영(미상~1896)·김익중(1851~1907) 선생 모두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반발하여 1896년에 일어난 호남지역 의병들이며, 호남지역 유학자인 노사 기정진(奇正鎭)의 학맥을 계승하여 서양 및 일제의 국내정치 개입을 거부하고 왕을 보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장성,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먼저, 조부 기정진의 영향을 받은 기우만 선생은 전남 장성 탁곡에서 출생했으며, 자는 회일(會一), 호는 학정거사(學靜居士)·송사(松沙) 등이다. 선생은 1896년 2월 장성향교에서 최초로 호남의병을 일으켰다. 장성, 나주에서 기반을 다진 선생은 광주에서 대규모로 의진(義陣)을 결집하여 회맹(會盟)을 하고 서울로 북상할 계획을 세웠으나, 국왕의 해산 조칙으로 1896년 봄을 전후하여 해산했다. 선생이 일으킨 의병은 단발령의 철폐와 일제 축출, 개화 정책의 반대, 옛 제도의 복구 등을 내세웠다. 또한 왕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인 체제를 유지할 것을 주장했으며, 의병해산 후에는 의병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해 1909년「호남의사열전」을 집필하여 의병의 활약상을 상세히 정리했다. 다음으로 박원영 선생은 전남 광주에서 출생했으며, 자는 주옥(周玉), 호는 포류재(蒲柳齋)이다. 강직한 성품과 기개를 타고난 선생은 노사 기정진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이름을 알렸다. 선생은 기우만 선생이 의병을 일으키자 바로 달려가 참여했고 나주에서 광주로 이동한 장성의병의 실무를 주관했으며, 의병이 해산된 이후 진위대에 체포되어 처형됐다. 또한, 김익중 선생은 전남 장성 맥동에서 출생했으며, 선생 또한 노사 기정진의 가르침을 받았고 사람 간의 의리를 중요하게 여겼다. 1896년 봄 기우만 선생이 의병을 모으자 무장을 강화하기 위해 평소에 교류가 있던 포수들의 참여를 독려했고, 자신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나주와 광주를 오가며 활약했다. 이후 정미조약으로 전국적인 의병 봉기가 일어나자 1907년 기삼연 선생을 중심으로 한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에 참여했다. 회맹소 의병들은 거점을 마련하려 고창읍성을 공격하여 점령했고, 선생은 고창읍성을 탈환하려는 일제의 습격에 맞서다 전사했다. 정부는 선생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기우만 선생에게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 박원영 선생에게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 김익중 선생에게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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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의 6·25 전쟁영웅, 김갑태 육군 중령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는 ‘김갑태 육군 중령’을 2021년 1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처에 따르면 김갑태(1924.10.1.~1952.10.4.) 중령은 6·25전쟁 중 1952년 10월 2일 강원도 748고지(일명 피의 고지) 탈환을 위해 탁월한 전투 지휘로 기습 공격을 벌이다, 적이 쏜 포탄 파편을 맞고 쓰러져 후송된 지 3일 만인 1952년 10월 4일 전사했다. 깁갑태 중령은 부산에서 출생하여 1949년 5월 육군사관학교 8기로 졸업, 소위로 임관하였다. 그리고 1951년 강원도 한석산·가리봉 전투와 현리전투 등 수많은 전투에 참전하여 전공을 세웠다. 1952년 4월 육군 제3사단 22연대 1대대 1중대장(대위)으로 부임하여 강원도 인제군 서화 북방, 우두산 일대의 방어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당시 우두산 일대의 748고지(피의 고지)와 572고지(독수리 고지)는 이를 확보하지 못할 경우 사단의 주저항선까지 위협받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아군과 적군이 치열한 고지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다. 1952년 10월 2일 당시 1중대장 겸 1대대장 대리 임무를 부여받은 김갑태 대위는 선두에서 부대원을 이끌며 일시 피탈당한 748고지(피의 고지) 탈환을 위한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격전 중 적군이 쏜 포탄의 파편을 맞고 김갑태 대위가 쓰러지자 전 대대원들이 더욱 맹렬히 고지를 향해 돌격하여 마침내 748고지(피의 고지)를 성공적으로 탈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김갑태 대위는 후송된 지 3일 만인 1952년 10월 4일 전사했다. 정부는 748고지 전투에서 살신성인 정신으로 희생한 김갑태 대위의 공훈을 기려 을지무공훈장과 2계급 특진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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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전현충원 2020년 12월의 현충인물, 박정수·권성호 공군 중령
【중앙보훈방송=김하늘 기자】 국립대전현충원이 2020년 12월의 현충인물로 ‘박정수·권성호 공군 중령’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국립대전현충원에 따르면, 박정수·권성호 공군 중령은 투철한 사명감으로 대한민국 국민과 영공을 수호한 전투조종사다. 박정수 중령은 1977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 공군사관학교 48기로 군인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2002년 고등비행교육 과정을 1등으로 이수해 참모총장상 등을 받은 재원이었다. 2002년부터 2010년까지 우리 공군의 주력기인 KF-16을 주기종으로 영공방위의 최전선에서 임무수행을 했고, 2011년 10월부터는 제16전투비행단 216대대 2편대 편대장으로서 학생조종사들의 비행교육훈련과 더불어 대대를 이끌며 바쁜 일정을 소화해내는 탁월한 리더였다. 권성호 중령은 1978년 강원 태백 출신으로 공군사관학교 49기로 군인의 길로 들어섰다. 2001년 공군 소위로 임관해 F-5와 KF-16 등 총 1,500여 시간의 비행경력을 보유한 최정예 전투조종사였다. 또한 우수교관으로 선정돼 참모총장 표창을 받을 정도로 후진 양성과 후배 교육에 힘써온 인물이다. 권성호 중령은 항상 후배들보다 한발 앞서 연구하고 고민해 해답을 제시해 주는 솔선수범형 교관으로 그가 훈육 담당 중대장을 맡고 있을 당시 학생조종사들이 역대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한 일은 그의 탁월했던 리더십을 보여주는 일화 중 하나이다. 2011년 12월 5일 박정수·권성호 중령은 경북 예천 상공에서 T-59 훈련기로 고난도의 ‘가상 긴급착륙(Turn Back) 훈련’을 하던 중 전투기가 조종 불능 상태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주변 민가를 피하고자 마지막 순간까지 조종간을 붙잡고 탈출할 시간을 벌지 못해 안타깝게도 순직하며 사랑하는 가족 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긴급 상황에서도 끝까지 임무를 수행했던 박정수·권성호 중령에게 대한민국 정부는 1계급 특진과 보국훈장 삼일장을 추서하고,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하여 그 숭고하고 아름다운 희생과 공로를 기리고 있다. 김하늘 기자 hn90071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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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2020년 12월의 호국인물, 해군 PC-704함 57용사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은 2020년 12월의 호국인물로 ‘해군 PC-704함 57용사’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전쟁기념관에 따르면 1945년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는 스스로의 힘으로 바다를 지키기 위해 모금운동을 벌어 모은 돈과 정부예산을 들여 1949년 10월 17일 백두산함과 지리산함 등 전투함 4척을 도입했다. 이듬해 현지에서 정비를 마친 전투함은 6·25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으로 출항하여 7월 25일 한국에 도착했다. 이후 남·서해안 해상봉쇄작전에 투입되어 유엔 해군의 작전수행이 어려운 연근해 지역의 화력지원과 해상봉쇄를 담당하며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특히 1950년 8월 16일 덕적도·영흥도 탈환작전 에서는 함포 지원사격 및 상륙작전을 수행하여 30여 명의 적군을 사살 및 생포하고 2개의 섬을 수복하는 등 유엔군의 해양통제권 유지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1951년 12월 25일 지리산함은 악천후 속에서 원산해역의 야간경비작전을 강행하던 중 적 기뢰에 접촉되어 함정이 침몰하고 이태영 함장 등 승조원 57명 모두가 장렬히 전사했다. 차가운 겨울바다에 던져진 지리산함 승조원들은 죽음이 임박한 순간에도 전우가 더 깊은 바다로 들어가 홀로 남지 않도록 서로의 몸을 밧줄로 묶는 진한 전우애를 발휘했다. 정부는 바다에서 나라를 지킨 지리산함 승조원 전원에게 1계급 특진을 추서했다. 해군 제1함대사령부는 매년 12월 26일 이들의 숭고한 희생과 넋을 기리는 추모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해군 PC-704함 57용사는 이태영, 권순달, 김하근, 한우섭, 박찬의, 천세봉, 하윤만, 백명흠, 최수한, 고재돈, 정상관, 이봉조, 임승두, 강남주, 김인제, 윤종수, 백윤봉, 안복석, 김명철, 박호경, 이태읍, 최준우, 임선웅, 김찬석, 이몽길, 이상조, 신조근, 조영구, 정학상, 오경두, 정태용, 정승면, 이판동, 김성안, 김석준, 김경태, 박근수, 이의수, 김태훈, 김서용, 김영대, 김경옥, 손봉수, 이창용, 이영두. 김정태, 이봉춘, 이귀익, 전기석, 정휘두, 민상기, 박인식, 김옥근, 긴희곤, 노동우, 최삼천, 이영복 용사이다(계급 및 군번순).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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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의 6·25 전쟁영웅, 레너드 라루 미국 선장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 이하 보훈처)는 레너드 라루(Leonard Larue) 미국 선장을 2020년 12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보훈처에 따르면 레너드 라루(1914.1.14.~2001.10.14.)는 6·25전쟁 당시 1950년 12월 함경남도 흥남항에서 배편으로 철수한 흥남철수작전에서 만 4천여 명의 피란민을 구한 메러디스 빅토리호(Meredith Victory)의 선장이었다. 레너드 라루는 35세에 7,600톤의 화물선 선장이 됐고, 군수물자 수송 명령에 따라 함경남도 흥남 부두로 향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38선을 넘어 북진했지만, 중공군의 개입과 매서운 추위로 전황이 불리해지자 흥남에서 배편으로 철수하는 작전을 계획했다. 흥남철수작전은 12월 15일부터 12월 24일까지 군인, 피란민, 군수물자를 선박을 통해 이남 지역으로 철수하는 계획이었지만, 군인과 피란민들을 다 태우기에는 선박이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레너드 라루 선장은 단 한 명의 피란민이라도 더 태우기 위해 정원 60명인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있는 군수물자를 버리고 피란민을 승선시키기로 결정했다. 16시간 동안 탑승정원을 훨씬 초과한 만 4천여 명을 태운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사흘간 항해 중에 태어난 5명을 포함한 승선자 전원이 12월 25일 경상남도 거제도에 무사히 도착했다. 이러한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항해를 일컬어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고 부르며, 단일 선박으로 ‘가장 많은 인원을 구조한 배’로 기네스북 기록에 오르게 됐다. 한편, 거제도포로수용소기념공원에 이러한 인도주의 작전의 뜻을 기억하기 위해 흥남철수작전 기념비가 세워졌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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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의 독립운동가, 윤창하 선생 선정···광주학생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항일정신 일깨워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공동으로 광주학생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항일정신을 일깨운 ‘윤창하 선생’을 2020년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에 따르면 윤창하 선생(1908.4.9.~1984.12.29.)은 전남 해남 출신으로 독서회 활동과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하여 항일정신을 일깨웠다. 선생은 1926년 광주고등보통학교(이하 ‘광주고보’)에 입학해 광주고보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28년에 동맹휴학이 일어나자, 적극 동참했다.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광주중학교(일본인 학교) 학생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생 박기옥(朴己玉)을 밀친 것을 발단으로,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났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3․1운동 이후 가장 크게 전국으로 확산된 대중운동이었으며 학내 문제에 그치지 않고 식민지 교육문제, 일제 식민정책에 대한 저항에서 나아가 민족독립, 민족해방을 제기한 총체적 민족운동이었으며, 1920년대에 축적된 민족역량을 전국 규모로 분출했다는 점에서 국내 민족운동의 역량을 집약적으로 보여준 것이었다. 선생은 1929년 11월 3일 광주고보 시위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독서회 중앙부와 광주고보 독서회의 간부로 활동했다. 11월 3일 체포되어 1930년 5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시위운동으로 금고 4월에 집행유예 5년, 1931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독서회 활동으로 징역 2년을 각각 언도받았다. 두 번째 판결로 인해 앞의 집행유예 판결이 취소되어 총 2년 4월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선생은 옥고 후유증으로 일제강점기나 광복 이후에도 특별한 사회활동을 하지 못하다가 1984년 77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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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2020년 11월의 호국인물, 라희봉 경찰 경감
【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은 2020년 11월의 호국인물로 ‘라희봉 경찰 경감’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전쟁기념관에 따르면 고(故) 라희봉 경찰 경감은 1928년 1월 25일 전라북도 진안에서 태어났다. 1949년 7월 10일 전북 경찰에 순경으로 임용되었고, 1951년 1월 순창경찰서 쌍치 지서장으로 부임했다. 1950년 9월 국군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퇴로가 차단된 북한군 패잔병과 지방 잔류 공비들은 덕유산, 지리산 등지에 은거하여 후방지역을 위협, 교란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군·경 합동으로 공비토벌작전을 수행하였고, 라희봉 경위가 소속된 전북 경찰도 합동작전에 참여했다. 쌍치 지서장으로 부임한 후, 같은 해 7월 10일에는 의용경찰대원 45명을 지휘하여 100여 명의 공비들이 은거중인 순창군 쌍치면 국사봉 일대에 대한 토벌작전을 실시, 공비 9명을 사살했다. 10월 2일에는 의용경찰대원 40명을 인솔, 구림면 금창골에서 매복 작전을 실시하여 공비 2명을 사살하고 소총 3정을 노획하는 등 공비토벌에 많은 전공을 세웠다. 1952년 11월 20일 쌍치면 용전마을 뒷산 오두봉고지에 공비가 침투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의용경찰대 병력 300여 명을 직접 지휘하여 수색작전을 벌이던 중 ‘항미연대’와 ‘외팔이부대’등 약 700여 명의 공비들과 마주쳐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때 적이 투척한 수류탄에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으나 회복하지 못한 채 안타깝게도 사흘 만에 전사했다. 이 전투에서 라희봉 경감과 의용경찰대원 7명이 전사했다. 정부는 그의 전공을 기려 경감으로 1계급 특진을 추서했다. 전북 순창군 쌍치면 주민들은 그의 애석한 죽음을 기리기 위해 쌍치면 오두봉을 ‘라희봉고지’라 부르고 있으며, 라희봉 경감과 함께 전사한 7용사의 묘를 양신리 삼양마을 뒷산에 안치하고 ‘7용사의 묘’라고 부르고 있다. 2001년에는 고인의 모교인 진안 부귀초등학교 졸업생들이 주축이 되어 학교에 동상을 건립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