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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2-02-07 12:02:04
  • 수정 2022-02-07 12: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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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 전쟁기념관은 20222월의 호국인물로전명운 의사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전쟁기념관에 따르면 전명운 의사는 1884 6 25일 한성부 명례방 종현(現 서울시 중구 명동 천주교성당 부근)에서 태어났다. 1903년 미국으로 이민, 하와이에 정착하였다가 1년 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한 전 의사는 안창호를 중심으로 설립한 애국계몽운동 단체인 공립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 전명운(田明雲) 의사(1884.6.25.~1947.11.18.) / 사진출처=전쟁기념관


1908 3, 대한제국 외교 고문으로서 을사늑약 등을 체결하는데 일본을 도운 더럼 W.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이 미국으로 귀국하여 일본의 한국 지배는 한국에 유익하다.’라는 발언을 하였다. 이에 샌프란시스코 지역 한인들이 항의하며 발언 철회와 사과를 요구하였으나, 스티븐스는 사과는커녕 한국의 인민은 우매하여 독립할 자격이 없다.’라는 등의 망언을 늘어놓았다.


▲ 1908년 3월 24일 THE SAN FRANCISCO CALL 신문-스티븐스 저격 의거가 일어난 3월 23일 다음날 발행된 THE SAN FRANCISCO CALL 신문이다. 1면 전체를 저격 의거 관련 보도에 할애했다. 신문 중앙에는 위에서부터 차례대로 스티븐스의 사진, 저격 의거가 일어난 당시의 상황을 나타내는 삽화, 의거 주인공인 전명운·장인환 의사의 사진이 실려있다. / 사진출처=전쟁기념관


이에 전명운 의사는 스티븐스를 처단하기로 결심하고 1908 3 23일 권총을 준비하여 샌프란시스코 페리빌딩에서 스티븐스를 향해 권총을 발사했다. 그러나 권총이 불발되자 스티븐스의 얼굴을 가격하며 격투를 벌였다. 이때 역시 스티븐스를 저격하기 위해 기다렸던 장인환이 그를 향해 권총을 발사해, 스티븐스는 이틀 후 사망했다. 정명운 의사는 장인환과 함께 체포되었으나 동포사회의 끈질긴 석방운동을 통해 6 27일 무죄 석방되었다.


▲ 1908년 스티븐스 저격의거가 일어난 `샌프란시스코 페리빌딩` / 사진출처=독립기념관


이후 일제의 감시를 피하고자 이름을 맥 필즈(Mack Fields)로 개명한 전 의사는 1908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하여 최재형, 안중근이 활동한 동의회(同議會)에 참가하였으며, 미국 한인 독립운동단체인 국민회(國民會)의 특파원으로 활동하였다.


1909년 미국으로 돌아온 후, 대한인국민회(前 국민회) 활동을 계속하던 중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전시봉사회를 조직하고, 한인국방경위대(韓人國防警衛隊, The Korean Brigade)에 참여하여 조국의 독립에 이바지하고자 했다.


▲ 샌프란시스코 한인감리교회가 주최한 ‘장인환 의사 석방 축하대회’에서 악수하고 있는 전명운·장인환 의사-장인환 의사는 1908년 스티븐스 저격 의거 이후 복역 중 1924년 가석방되었다. 오른쪽이 전명운 의사, 왼쪽이 장인환 의사이다. / 사진출처=독립기념관


▲ 1930년 3남매 자녀들과 함께 촬영한 전명운 의사 사진-왼쪽부터 둘째딸 마가렛(경용), 전명운 의사, 막내아들 알프레드, 맏딸 로즈메리(경숙) / 사진출처=독립기념관


전 의사는 1947 11 18일 미국에서 타계하여 미국 로스앤젤레스 위티어 천주교 묘지에 안장되었다. 이후 1994년 국내로 유해가 봉환되어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정명운 의사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공로훈장 복장(現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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