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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0-11-16 17:21:13
  • 수정 2020-11-16 17: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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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안락한 삶을 버리고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한 우당 이회영 선생 순국 88주기 추모식이 오는 17() 오후 2, 서울 종로구 우당기념관에서 열린다.


16일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에 따르면 ()우당이회영선생기념사업회(회장 윤형섭)()우당이회영선생교육문화재단(이사장 이종찬) 공동 주관으로 진행되는 이날 행사는 코로나19로 인원을 축소한 가운데 서울북부보훈지청장을 비롯한 독립운동 관련 단체장 및 회원, 유족 등 50여 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추모식은 국민의례, 기념사 및 추모사, 장학금 전달, 연구지원비 전달, 격려사 등의 순으로 진행되며, 우당 선생의 독립정신을 널리 기리기 위해 대학생들과 독립운동사 연구학자에게 장학금과 연구지원금이 전달된다.


▲ 우당 이회영 선생 흉상-서울시 중구 명동11길 20(명동1가) / 사진출처=대한민국 구석구석


이회영(李會榮, 1867.3.17~1932.11.17) 선생은 서구와 일제의 조선 침략이 노골화되던 1867년 서울 남산골(苧洞)에서 이유승(李裕承)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 가문에서 우당을 비롯해 형 건영(健榮) 석영(石榮) 철영(哲榮)과 아우인 시영(始榮) 호영(頀榮) 등 일곱 형제 중에 6명의 형제 50여 가족이 1910년 국치(國恥)를 당하자 모두 만주로 가 항일투쟁의 기틀을 마련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선생은 21세 때인 1898년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이상재(李商在) 이상설(李相卨) 이범세(李範世) 서만순(徐晩淳) 조한평(趙漢平) 여규형(呂圭亨) 이강연(李康演) 등과 교류하면서 민중의 계몽, 신진 정치가들의 협력, 내치(內治)와 외교정책의 수립 등 기울어져가는 나라 일을 수습하려 힘썼다.


이후 이회영 선생은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한 민중계몽 운동(1898), 을사오적에 대한 규탄(1905), 안창호·전덕기·양기탁·이동녕· 신채호·노백린 등과 함께 설립한 비밀결사 신민회 활동(1906), 중국 동삼성(일제는 만주라고 불렀음)에 이상설 이동녕 등을 특파해 교포 자녀교육을 하게 한 서전서숙 개설(1907), 서울 상동(尙洞)교회의 상동청년학원 개설(1908), 농업 생산과 교육을 위한 교민자치단체 경학사 조직(1911), 청산리전투의 주역들을 배출한 신흥무관학교 설립(1912), () 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조직(1924), 항일구국연맹 조직(1931) 등 하나하나 모두 놓칠 수 없는 투쟁을 거칠게 전개했다.


이후 선생은 중국 다롄 항구에서 일제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다가 순국하셨다. 고통에 시달리던 국민들은 독립운동사의 빛나는 별이 사라졌다며 통곡하였다.


선생을 기리는 우당기념관이 1990년 세워졌고, 2001년에는 서울 종로구 신교동으로 옮겨졌다. 그의 묘소는 국립현충원에 모셔졌으며, 2000년 중국정부는 우당 선생에게 항일혁명열사 증서를 수여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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