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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0-07-30 22: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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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공동으로 임병극 선생2020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에 따르면 임병극(1885~미상) 선생은 1885년 평안도에서 출생하였으며 1917년 고향을 떠나 북간도(北間島)로 망명하여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일원으로 북간도에서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대한국민회가 만든 항일무장활동 기관인 국민회군의 제2중대장에 임명되어 독립전쟁의 최일선에서 활동했다.

 

국민회군과 함께 북간도에 근거지를 구축하고 항일무장활동을 펼치던 독립군단들은 효과적인 항일전을 위해 1920522일 북간도 독립군 연합체인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를 탄생시켰으며, 북간도의 여러 독립군단 소속의 독립군 유격대는 수시로 국내진입전쟁을 전개해 일제 침략자들을 응징했다.

 

192064일 독립군 유격대는 국내로 진입하여 일본군 헌병 순찰대를 격파하는 큰 전공을 세운 후, 66일 대한북로독군부 주력부대가 주둔해 있는 왕청현(汪淸縣) 봉오동(鳳梧洞)으로 향했다.

 

봉오동은 마치 삿갓을 뒤집어 놓은 모양의 지형으로 들어 올수 있는 입구가 하나였고, 나머지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외부의 공격을 방어하기에는 최적의 요건을 갖춘 요새지로 오늘날에는 그 지형의 이점을 살려 봉오저수지가 축조되어 있는 곳이다.

 

192067일 홍범도 사령관의 공격 신호탄에 따라 일제히 일본군을 공격하였으며, 대한북로독군부 피복과장이면서 국민회군의 2중대장이었던 임병극 선생도 부하 독립군을 독려해 적극적인 공격을 실시하여 봉오동 전투 승리에 기여하였다.

 

▲ 임병극 선생 관련 자료 / 사진제공=국가보훈처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발표한 결과에서 일본군 사망자 157, 중상자 200여명, 경상자 100여명이었으나, 독립군은 전사자 4, 중상자 2명뿐으로 독립군의 완승이었다.

 

이로 인해, 봉오동전투는 침략자 일제에게 한민족이 기필코 조국광복을 달성하리란 증표를 보여준 독립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선생은 192010월 청산리 전투에도 참여하여 전승을 거두었으며, 이후 1921년 안도현에서 의용대를 조직하여 군자금을 모집하고 일제의 기관을 기습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923년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연해주 민족운동계 및 고려혁명군 대표자격으로 참가하였다.

 

선생은 북간도에서 의열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192428일부터 10일까지 3일간 적기단(赤旗團북로군정서의 인사들과 회합을 가졌다. 이후 선생에 대한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돈화(敦化)와 연길을 왕래하며 지하활동을 이어갔다.

 

선생의 이 같은 활동은 중국군에 포착되어 19249월 연길현 숭례향 대명월구(大明月溝)에서 부하 5명과 함께 체포되어,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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