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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9-10-25 15: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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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안중근 의사 의거 110주년 기념식1026일 오전 10,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열린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안중근의사숭모회 주관으로 열리는 이번 기념식은 이병구 국가보훈차장을 비롯한 각계인사, 안중근 의사의 유족(증손자 토니 안, 외손녀 황은주), 독립운동관련 단체장 및 회원, 안중근함 함장 홍승택 대령 및 승조원, 시민 등 4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안중근 의사 약전봉독, 의거의 이유 낭독, 기념사, ‘안중근 안쏠로지도서발간 봉정, ‘안중근체공개, 안중근장학금 수여, 기념공연, 만세삼창 등의 순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특히, 의거 110주년을 맞이하여 안중근 의사의 손 글씨 서체(폰트)안중근체를 제작하여 기념식에서 첫 공개하고, 안중근의사기념관과 한국저작권위원회 홈페이지 등에서 무료로 배포할 계획이다.

 

안중근체는 안중근 의사가 19091026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의거 전날 밤, 자신의 굳은 뜻을 담아 지은 글 장부가를 토대로 한글 필적을 추출하여 개발했으며, 일반 컴퓨터의 사용성과 활용성을 고려하여 제작했다. ‘안중근체는 한글 KS코드 기반 2,350자와 추가자 320, 라틴은 숫자와 일부 기호, 그리고 장부가에 적용된 고어 5자가 지원된다.


▲ [안중근 의사 친필 〈장부가〉 원본 / 사진제공=국가보훈처] 〈장부가〉는 안중근 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의거 전날 밤, 자신의 굳은 뜻을 담아 지은 글이다.

    

▲ [‘안중근체’로 쓴 〈장부가〉 / 사진제공=국가보훈처] 안중근체’는 안중근 의사가 친필 쓴 〈장부가〉의 원본을 토대로 한글 필적을 추출하여 개발했으며, 일반 컴퓨터의 사용성과 활용성을 고려하여 제작했다.


안중근 의사(1879.09.02.~1910.03.26.)는 황해도 신천 출생으로, 1905년 을사늑약 후 중국 상해로 건너가 국권 회복의 길을 강구했으며, 부친상을 당하고 돌아와서는 사재(私財)를 털어 삼흥학교(三興學校돈의학교(敦義學校)를 세워 인재 양성에 힘썼다.

 

그러나 광무황제의 폐위, 군대의 해산 등 나라가 식민지 상태에 이르자 다시 해외로 나가 이범윤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며, 1908년에는 의군장이 되어 의병부대를 거느리고 함경북도로 진입하여 경흥·회령 등지에서 대일 항전을 전개했다.

 

그 후 다시 러시아령의 블라디보스톡·연추(煙秋) 등지를 왕래하면서 동지들과 구국의 방도를 모색하였고, 1909년 봄에는 김기룡·조응순·황병길 등 동지들과 함께 손가락을 잘라 단지동맹을 결성하며 일사보국(一死報國)을 맹세했다.

 

19099,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톡에서 일제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우덕순 등과 함께 거사 계획을 세웠다. 마침내 의거 당일인 10269시경, 하얼빈역에서 러시아 군인들의 경례를 받으며 각국 영사들이 도열해 있는 곳으로 걸어가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향해 총을 쏘아 3발을 모두 명중시켰다. 일본 헌병이 그를 체포하려고 하자, 하늘을 향해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크게 세 번 외쳤다.

 

안중근 의사는 190911월 러시아 헌병대에서 여순에 있는 일본 감옥으로 이송되어 심문과 재판을 받는 가운데에서도 일본의 부당한 침략 행위를 공박하며 시정을 요구하였고, 조국의 완전 독립과 동양 평화의 정착을 주장했다. 1910214일 사형을 선고받은 후, 326일 순국했다. 정부는 안 의사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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