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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9-02-22 15: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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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보훈방송=오재욱 기자대일 항쟁기 언론인, 사학자로서 민족의식 고취에 힘쓴 독립운동가 신채호 선생을 기리는 단재 신채호 선생 순국 83주기 추모식221일 목요일 오전 11, 백범기념관 대회의실에서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열렸다.

 

기념식은 오진영 서울지방보훈청장을 비롯해 각계인사, 독립운동 관련 단체 대표 및 회원, 유족, 시민 등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단재선생 약력보고, 헌사 및 추모사, 단재의 노래 제창, 헌화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신채호 선생(1880.12.08.1936.02.21.)은 충청도 회덕현 산내면 어남리(대전 중구 어남동)에서 출생해 유교학문 수양에 힘썼으나, 1898년 성균관에 입학한 후 개화사상을 접하고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적극 활동했다.

 

19054월에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바로 사직하고 그 해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관직 진출을 포기하고 황성신문에 논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후, 양기탁의 요청으로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활약하며 일제의 침략과 친일파의 매국행위를 비판하고 국권회복에 민족이 힘쓸 것을 역설했다.

 

1907년 안창호, 이갑 등과 더불어 비밀결사 신민회의 창립에 참가하여 신민회의 이념을 논설에 반영하는 등 대변인과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선생은 그 해 대구를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전개된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 참여했고 기호흥학회월보, 대한협회회보등 언론을 통한 애국계몽운동에 주력했다. 뿐만 아니라, 독사신론을 비롯한 많은 역사 관련 서적을 저술하여 근대민족사학의 기초를 확립했다.

 

1910년 신민회 동지들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한 선생은 무관학교 설립, 교관 양성 등 독립운동 방안을 협의하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갔다. 1911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교민단체인 권업회를 조직하고 기관지인 권업신문의 주필로서 재러동포들의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권익을 옹호하는 등 항일언론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이후 만주 일대의 고구려, 발해 유적지를 답사하는 등 국사 연구와 문필 활동에 힘쓰던 선생은, 19194월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하여 의정원 의원, 전원위원회 위원장 등으로 활동했다.

 

이후 중국 북경을 중심으로 상해, 천진 등을 무대로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사연구초집필 등 역사연구에 힘쓰던 선생은 무정부주의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고 무정부주의동방연맹활동 등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했으나, 독립운동 자금 모집을 위해 대만으로 가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뤼순 감옥에서 복역하던 중 1936년 옥사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자료제공=국가보훈처).

 

[오재욱 기자 jbctv@jbctv.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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