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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03-26 11:3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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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순국 108주기 추모식326일 오전 10시에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열렸다.

 

()안중근의사숭모회 주관으로 열리는 이날 추모식은 심덕섭 국가보훈처 차장, 외손녀 황은주, 증손자 안도용, 안중근함 부함장 정창식 중령 등 승조원 및 안중근의사숭모회 회원, 시민 등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약전 및 최후의 유언 봉독, 참석 내빈의 추모사, 안중근 의사 순국 108주기 전국 학생 글짓기대회 수상자 시상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특히, 일본에서 도쿄 호세이대학 마키노 에이지(牧野英二) 교수, 가노겐(鹿野元) 변호사, 시마네현의 고마츠 아키오(小松昭) 인간자연과학연구소 이사장, 미야기현의 오노데라 쿠니요시(小野寺邦義) 사담회 회장, 사가현에 안중근의사 동양평화기원비를 건립한 야마사키 케이코(山綺惠子) 일행 등 안중근 의사를 연구하고 기리며 존경하고 있는 교수, 변호사 등 30여 명도 참석했다.

 

▲ 안중근 의거 기록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안중근 의사와 형제들의 면회 모습. ⓒ독립기념관


▲ 사형 집행 직전 안중근 의사. ⓒ독립기념관


안중근 의사는 187992일에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나 1905년 을사늑약 후 중국 상해로 건너 가 국권 회복의 길을 강구하다가 부친상을 당하고 돌아와서 사재(私財)를 털어 삼흥학교(三興學校)돈의학교(敦義學校)를 세워 인재 양성에 힘썼다.

 

그러나 광무황제의 폐위, 군대의 해산 등 나라가 식민지 상태에 이르자 다시 해외로 나가 이범윤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며, 1908년에는 의군장이 되어 의병부대를 거느리고 함경북도로 진입하여 경흥회령 등지에서 대일 항전을 전개했다.

 

그 후 다시 러시아령의 블라디보스톡연추(煙秋) 등지를 왕래하면서 동지들과 구국의 방도를 모색하고 1909년 봄에는 김기룡(金起龍)조응순(趙應順)황병길(黃柄吉) 등 동지들과 함께 손가락을 잘라 단지동맹을 결성하여 일사보국(一死報國)을 맹세했다.

 

19099,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톡에서 일제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우덕순 등과 함께 거사 계획을 세웠다. 마침내 의거 당일인 10269시경, 하얼빈역에서 러시아 군인들의 경례를 받으며 각국 영사들이 도열해 있는 곳으로 걸어가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향해 총을 쏘아 3발을 모두 명중시켰다. 일본 헌병이 그를 체포하려고 하자, 하늘을 향해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크게 세 번 외쳤다.

 

안중근 의사는 190911월 러시아 헌병대에서 여순(旅順)에 있는 일본 감옥으로 이송되어 심문과 재판을 받는 가운데에서도 일본의 부당한 침략 행위를 공박하며 시정을 요구했고 조국의 완전 독립과 동양 평화의 정착을 주장했다. 1910214일 사형을 선고받은 후, 326일 순국했다.

 

정부는 의사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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