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벽 선생은 황해도 은율에서 장로교 목사 김태석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1914년 서울로 올라와 경신학교를 졸업하고 숭실전문학교를 거쳐 연희전문학교로 진학했다.
1919년 1월 경성 시내 학생대표 회동에 참석하며 국제 정세와 시국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선생은 1919년 2월 박희도(朴熙道)·이갑성(李甲成) 등과 모임을 가지면서 3·1운동에 참여하게 됐다.
김원벽 선생은 만세운동을 추진할 학생 조직의 필요성을 느껴 각 중등학교 대표를 뽑아 학생들을 결속시켰고, 2월 25일, 학생대표들과 정동교회 이필주(李弼柱) 목사의 사무실에 모여 만세운동의 추진계획을 논의했다. 이때 3월 1일에 중등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진행하고 전문학교 학생대표들은 제2차 만세시위를 준비하기로 결의했다.
2월 28일, 승동교회에 다시 모인 학생대표들은 이갑성에게 받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가졌다. 그리고 전문학교 학생들은 3월 5일 남대문역에서 제2차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1919년 3월 1일, 김원벽과 학생대표들은 오후 2시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 낭독이 있을 것임을 학생들에게 전하고 제2차 만세운동의 계획을 말하면서 3월 1일 시위에 가급적 참가를 자제해달라고 요청했다.
3월 1일, 수천 명의 학생과 일반인이 탑골공원에 모였으나, 민족대표들은 유혈충돌을 우려하여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했다. 이에 김원벽 선생을 비롯한 학생대표는 자체적으로 독립선언을 하고서 남대문과 대한문 양쪽으로 행진하며 만세운동을 시작했다. 급보를 받고 출동한 경찰과 헌병이 탄압을 시작했으나 오후 늦게까지 시위를 계속 진행했다.
3월 4일 김원벽은 학생대표들과 배재고등학교 기숙사에 모여 3월 5일 오전 9시 남대문역(현 서울역)으로 집결하기로 결정하고 5일 오전 9시 김원벽은 인력거를 타고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흔들며 남대문역으로 나아갔다.
김원벽의 만세소리를 듣고 모여든 군중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남대문을 거쳐 대한문, 종로 보신각으로 나아갔다.
선생은 일제 경찰이 행사한 폭력에 쇄골이 부러지는 부상을 입어 일생동안 고통을 받았다.
그후 2년간 옥고를 치르고 잡지 ‘신생활’과 일간지 시대일보 창간에 힘썼으나 일제에 의하여 폐간되는 등 실패로 돌아갔다. 선생은 낙향해 살다 1928년 35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정부는 1962년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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